한겨울의 캐나다 동부는 색(色)으로 먼저 각인됐다. 거리마다 온통 화이트였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 폭포에선 거대한 물기둥보다 하늘을 찌를 듯 피어오른 뽀얀 물안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 퀘벡에도 흰 눈이 내려앉았다. 도깨비 김신(공유)이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을 향해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눈부셨다’고 고백했던 바로 그 도시. 둘이 마주 보고 서 있던 투르니 분수대엔 노란 단풍 대신 투명한 얼음 조각이 들어섰고, 도깨비 묘비가 있던 언덕엔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종아리를 감싸는 방한 부츠와 손바닥만 한 핫팩만 있으면 즐길 수 있다. 13시간의 비행 끝에 설국(雪國) 여행이 시작됐다.
◇한겨울의 폭포를 즐기는 방법
출발은 나이아가라 폭포다.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관광지’로 누구나 손에 꼽는 곳. 언젠가 이곳을 다녀온 선배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에 이골 난 여행객들이 최후에 끌리는 곳이 대자연의 순수한 장엄함”이라고. 높이 57m, 폭 671m에 달하는 폭포에서 사정없이 곤두박질치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 자잘하게 괴롭혔던 머릿속 찌꺼기가 굉음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1초에 쏟아내는 물이 3160t. 1분이면 욕조 100만 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이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걸쳐 있다. 캐나다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규모나 경치 면에서 더 웅장한 편. 나이아가라는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이로쿼이족 언어로 ‘천둥소리를 내는 물기둥’이란 뜻이다. 천천히 흐르던 강물이 절벽에서 갑작스레 거대한 폭포가 돼 떨어진다. 말발굽 모양의 절벽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서서히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는 듯 긴장감을 일으킨다. 한국 관광객 사이에선 유람선 타고 폭포 물살을 맞으며 “나이야, 가라!” 하고 외치면 몇 살은 젊어진다는 우스개가 있다.
한겨울 폭포 체험에 그런 박진감은 없다. 나이아가라 폭포 앞까지 돌진하는 유람선은 겨울엔 운항하지 않는다. 대신 하늘을 날며 폭포를 감상하는 헬기 투어가 있다. 겨우 10분 남짓이지만, 폭포 상공을 비행하며 급류 구간을 내려다보는 쾌감이 짜릿하다. 순간이지만 풍경을 장악할 수 있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처럼 눈 덮인 지붕이 장난감처럼 놓여있고, 거대한 물기둥도 미니어처처럼 작아 보인다. 폭포의 속살을 보고 싶다면 ‘폭포 뒷면 여행(Journey Behind the Falls)’을 추천한다. 테이블 록(Table Rock)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8m 지하로 내려가면 폭포 뒷면으로 뚫린 길이 나온다. 얼음이 붙어있는 바위를 액자 삼아 폭포수 사진을 담으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린다.
여름에 북새통을 이루는 이 화려한 관광지를 한가하게 독점할 수 있다는 것도 겨울 여행의 장점이다. 호텔을 잘 잡으면 소파에 앉아 폭포를 조망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앰버시 스위트 바이 힐튼 호텔엔 폭포 전망을 갖춘 ‘폴스뷰’ 객실이 있다. 아침에 커튼을 젖히니 떨어지는 폭포 옆으로 무지개가 떴고, 밤에는 조명을 받은 물기둥이 오색찬란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퀘벡 구석구석엔 ‘도깨비’ 흔적
퀘벡의 심장은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낙 호텔이다. 130년 역사를 간직한 이 지역 랜드마크. 프랑스 고성(古城)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외관으로 절벽 위 모퉁이에 우뚝 서 있어 퀘벡 어디에서도 눈에 띈다. 샤토 프롱트낙의 역사가 20세기 퀘벡의 역사다. 1943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총리, 캐나다 매킨지 총리가 이곳에 모여 2차 대전 종전과 그 이후를 논의했다. 히치콕 감독이 영화 ‘나는 고백한다’를 찍었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프랑스 드골·미테랑 대통령을 비롯해 찰리 채플린, 스티븐 스필버그, 셀린 디옹이 투숙했다. 우리에겐 ‘도깨비 호텔’로 더 유명하다. 드라마 속 도깨비가 천연덕스럽게 “내 거”라고 말한 바로 그 호텔이다. 로비의 엘리베이터 앞 황금색 우체통은 기억을 잃은 도깨비 신부가 오래전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만났던 그 우체통이다.
자연스럽게 도깨비 흔적을 따라 나선다. 호텔을 빠져나와 눈 쌓인 언덕을 올라가면 도깨비 김신의 묘비가 서 있던 풍광이 나타난다. 봄·가을엔 퀘벡 시민이 즐겨 찾는 피크닉 장소다. 원래 퀘벡의 겨울은 영하 20도, 평균 적설량 4m라는데, 운 좋게도 영하 10도의 따뜻한(?) 날씨 덕분에 한참을 서 있어도 견딜 만했다. 높이 솟은 샤토 프롱트낙과 퀘벡시티 풍경에 넋을 놓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얼음이 느릿느릿 떠다니는 세인트로렌스강이 보인다. 밤에는 불을 켠 호텔과 도시가 한결 더 고풍스럽게 빛난다.
겨울에 얼어붙어 미끄럽기로 악명 높다는 ‘목 부러지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퀘벡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티 샹플랭 거리가 나타난다. 아기자기한 상점과 예쁜 카페, 옷가게가 즐비한 이 거리 중간쯤에 도깨비가 순간 이동하던 빨간 문이 있다. 퀘벡 토박이라는 가이드 린(Lynn)은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빨간 문 앞에 줄을 서서 사진을 찍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드라마 인기 덕분이었다. 처음엔 한국인만 찍다가 이제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인증샷을 찍는다”고 했다.
퀘벡은 멕시코 이북 아메리카 대륙 유일의 성곽 도시다. 올드 퀘벡시티를 둘러싼 성벽 길이가 4.3㎞.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퀘벡시티의 중심지역은 세인트로렌스강을 끼고 있는 높은 벼랑 지대에 형성돼 있다.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어퍼타운’이라 부르고, 강변과 먼 낮은 지대를 ‘로어타운’이라 부른다. 어퍼타운은 다시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는데, 퀘벡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모두 구시가에 밀집해 있다. 성벽으로 둘러친 구시가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가이드 린은 “프랑스가 맨 처음 북미 대륙에 진출했을 때 퀘벡 역사가 시작됐고, 지금도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고 했다. 1608년 퀘벡시티에 프랑스인 정착 마을을 건설했고, 1763년 영국에 최종적으로 패배하기 전까지 이곳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퀘벡이 지금도 ‘북미 속 작은 프랑스’라고 불리는 이유다. 퀘벡주 최고(最古) 석조 건물 ‘승리의 노트르담 교회’, 퀘벡 역사의 중요 인물 15인을 실물 크기로 그려넣은 프레스코 벽화가 있고, 지은탁이 촛불을 꺼서 도깨비를 소환했던 상점 ‘부티크 노엘’도 만난다. 1년 365일 내내 성탄 음악이 흐르고, 크리스마스 용품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이글루에서 마법 같은 하룻밤
설국 여행의 정점은 빙박(氷泊). ‘캐나다 이글루’라고 불리는 아이스 호텔(Hotel de Glace)에서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냈다. 눈과 얼음으로만 만들어진 이 호텔은 2001년 문을 연 이래 200만명 이상이 방문하고 7만여 명이 숙박했다. 퀘벡시티에서 북쪽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레저 단지 발카르티에 베케이션 빌리지에 매년 겨울 새로 지어져 1~3월에만 운영되고 봄이 되면 사라진다.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는 12월에 이글루 공사가 시작된다. 50여 명의 조각가가 한 달 이상 눈과 얼음으로 새하얀 왕국을 창조한다. 얼음 예배당에서 지금까지 커플 수백 쌍이 결혼식을 올렸다. 바(bar)에선 얼음 잔에 넣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 첫 잔을 마시고 추가 음료를 주문하면 그 사이 잔이 녹아서 더 많은 양의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는 게 팁.
야외 노르딕 스파와 사우나에서 몸을 따뜻하게 덥힌 후 얼음 침대 위에 누웠다. 상상만 해도 이가 덜덜 떨릴 것 같지만, 실내 온도가 영하 3~5도 사이로 유지돼 고성능 침낭 안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안락했다. 진공 상태에 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둥근 천장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다만 침낭 안에 넣어둔 핫팩이 아니었으면, 이마가 더 시릴 뻔했다. 얼굴과 목을 감쌀 수 있는 모자와 머플러 준비가 필수다. 호텔 매니저는 “아이스 호텔을 예약하면 발카르티에 호텔의 일반 객실도 함께 쓸 수 있기 때문에 짐 보관, 샤워 등은 일반 객실에서 하면 된다”며 “추워서 견디기 힘들면 언제든 일반 객실로 이동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투숙하지 않고 얼음 호텔을 감상하는 방법도 있다. 입장 티켓(25~30캐나다달러)만 구입하면 객실과 예배당 내부를 관람하고, 얼음 의자로 채워진 아이스 바에서 얼음 잔에 담긴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
[나이아가라서 맛보는 ‘사랑의 묘약’]
캐나다 대표하는 아이스 와인
나이아가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와인이다. 나이아가라강과 온타리오호 주변에 130여 개의 와이너리가 몰려있다. 다양한 품종으로 여러 와인을 생산하고 있지만, 캐나다를 대표하는 건 단연 아이스와인이다. 캐나다 전체 생산량의 70%가 나이아가라 일대에서 나온다.
아이스와인은 만드는 방법이 독특하다. 보통 와인은 8~9월에 수확한 포도를 숙성시켜 만들지만, 아이스와인은 한겨울인 1월에 수확한 와인으로 만든다. 포도가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 수분이 증발되고 당분만 남게 된다. 이 고농축 진액을 숙성시킨 것이 바로 아이스와인. 시럽을 들이켜는 것처럼 당도가 높지만 중독성이 있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들어올 때 행복감이 치솟는다. 캐나다 사람들은 그래서 아이스와인을 ‘사랑의 묘약’이라 부른다.
와이너리 역사와 와인 생산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시음까지 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 와이너리 투어’를 추천한다. 3~4곳의 와이너리를 돌고, 벽난로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곁들여 식사도 할 수 있다.
캐나다 국적 항공사인 에어캐나다는 인천에서 밴쿠버와 토론토까지의 직항편을 각각 주 7일, 주 5일 운항하고 있다. 인천에서 토론토까지 12시간 50분 걸린다. 에어캐나다의 강점은 캐나다 국내선 연결이 편리하다는 점. 지난해 6월 ‘수하물 자동 환승 서비스’를 도입해 환승 공항에서 수하물을 찾을 필요 없이 최종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 여행사 ‘샬레트래블’에서 나이아가라, 퀘벡을 결합한 캐나다 동부 여행 코스를 이용할 수 있다. 캐나다의 겨울은 한국보다 춥지만, 옷차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는 방한 부츠 정도만 있으면 된다. 자세한 정보는 캐나다관광청 홈페이지 참고.
/나이아가라·퀘벡=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