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가장 번화한 교차로인 시부야의 스크램블 거리. / TCVB

“후쿠오카 공항 면세점 줄이 ‘쇼미더머니’ 지원 줄 같았다.”

설 연휴였던 지난달 24일 국내 최대 일본 여행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 지원자 수만큼 면세점 대기 줄이 길었다는 소리다. 같은 시간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 면세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면세품을 고르는 동안, 나머지 한 사람은 일단 줄부터 섰는데도 계산대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피카츄 도쿄 바나나’ 등 일부 인기 품목은 아예 진열장이 텅 비어 있었다. 앞뒤 사람은 물론이고 그 앞 앞 앞 사람까지 모두 한국인. 그럴 만도 하다. 지난해 12월 한 달에만 한국인 45만명이 일본에 입국했으니 말이다.

최근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그야말로 ‘폭증’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109만3260명으로, 직전 해(약 2만명) 대비 50배 이상 증가했다. 그중에서도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사이에만 90만명이 몰렸다. 양국이 본격적으로 해외 입국자의 PCR 검사 의무를 해제하면서 여행객이 급증한 것이다. 지금 일본은 코로나 백신 3차 접종자나, 72시간 내 PCR 검사에서 음성이면 누구나 입국이 가능하다.

지난해 12월 29일 도쿄 하네다 공항의 모습. / 교도 연합뉴스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이후 ‘보복 소비’가 나타났듯, 코로나로 억눌렸던 여행 수요가 ‘보복 여행’으로 폭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항공기 공급이 원활해 노선이 많고, 단기간 다녀오기 적합한 일본이 가장 많은 보복(?)을 당하고 있다. 지난 설날 연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간 곳도 ‘일본’이었다. 만석 비행기를 타고 이 대열에 합류해봤다.

◇일단 5% 할인받고 시작? 엔야스의 마법

24만2000원이 순식간에 20만원이 되는 마법이 일어났다. 지난 23일 일본 도쿄 긴자 한큐 백화점에서 그랬다. 2만4200엔이 적힌 아동용 외투를 샀다. 한국인이면 으레 여기에 10원을 곱해 24만2000원 정도라고 머릿속으로 계산할 것이다. 지금은 일본 엔 시세가 외국 통화보다 훨씬 저렴한 ‘엔야스(えんやす)’ 시기. 1년 전만 해도 100엔에 1050원 정도였던 엔화는 940원대(2월 1일 기준)로 내려갔다. 2만4200엔이 우리 돈으로 약 23만원이 됐다. 여기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스트 쿠폰 할인 5%, 택스 리펀드 8%를 받으니 외투 값이 2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

점원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오늘 날짜가 적힌 5% 할인 쿠폰을 즉석에서 발행해줬다. 지금 당장 적용은 물론이고, 일주일간 이 백화점 대부분 매장에서 쓸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른바 ‘명품’ 매장은 대부분 할인 행사에서 제외된다. 일본에선 비싼 시계만 제외하면 대부분 매장에서 이 쿠폰 적용이 가능했다. ‘생활 방수가 되느냐’고 영어로 물어보니, 점원이 휴대전화로 재빨리 뭔가를 누르더니 한국어로 된 화면을 보여줬다. “비 올 때 입어도 됩니다.”

6층 면세 환급 계산대에선 아예 직원이 한국어로 된 안내 종이를 내밀었다. 1분도 안 돼 그 자리에서 8%에 해당하는 현금을 돌려받았다. 앞에서 세금을 환급받던 젊은 한국인 부부는 유명 브랜드 쇼핑백을 2개씩 들고 있었다.

일본 백화점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요 7국(G7)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엄격한 국경 통제를 유지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달 22일(현지 시각) “코로나 팬데믹에서 회복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일본 경제가 되살아나는 데 해외 관광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관광객의 소비는 지난 6개월간 엔 약세로 심화된 자본 유출에서 일본이 회복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해외 관광객 유치를 성장 전략의 한 축으로 삼고, 2030년까지 방문객을 6000만명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백화점들이 면세 계산대를 늘리고, 할인 쿠폰을 발행하며, 자동 번역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이런 목표를 이루려는 활동인 셈이다.

◇'싹쓸이 쇼핑' 하는 중국인이 없다

일본엔 2015년 만들어진 ‘바쿠가이(爆買い)’란 신조어가 있다. 매장에서 물품을 싹쓸이하는 중국인 관광객의 소비 행태를 뜻하는 말이다. ‘중국인이 지나간 자리엔 공기밖에 남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난해 12월 27일 중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사실상 종료하고 국경을 개방하자, 일본은 중국발 입국자 전원을 대상으로 코로나 검사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8일에는 중국발 입국자의 코로나 음성 증명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중국인들의 일본 입국 조건이 까다로워지면서, 한국인으로선 같은 물건 놓고 경쟁할 큰손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최근 내국인 면세 한도가 800달러까지 오른 데다, 달러가 강세라 입국 시 관세 부담도 줄었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선 ‘일본에서 명품 하나 사면 비행기표 값 나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국내에서 인기인 ‘레이디 디올 휴대폰 홀더’는 한국에서는 165만원이지만, 일본에선 14만323엔(133만원)에 살 수 있다. 관세청에서 여행자 휴대품 예상 세액 조회를 해보면 관세는 5만1000원 정도. 관세를 내도 한국보다 28만원가량 싸게 살 수 있다. 인천-후쿠오카 왕복 비행기 요금이 30만원 안팎이니 비행기 요금 쓰고도 올 만하다는 이야기가 영 틀리는 말은 아닌 셈이다.

‘아빠는 슬램덩크 기념품 사고, 아이는 포켓몬스터 인형 사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은 캐릭터 쇼핑 성지이기도 하다. 젊은 층 중에선 네이버후드, 베이프 등 일본 스트리트 브랜드를 비롯해 꼼데 가르송, 요시다 포터 등 일본 태생 브랜드를 구입하기 위해 여행 가는 일도 많다. 국내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저렴할 뿐 아니라 물건도 다양하다.

도쿄 기치조치 인근의 야키토리 가게. / TCVB

◇긴자 밥값이 광화문보다 저렴하다

쇼핑만이 아니다. 최근 명동 노점상의 닭꼬치가 5000원으로 코로나 이전보다 67% 급등한 반면, 도쿄 쓰키지 장외 시장의 명물인 ‘계란말이’는 여전히 100엔(약 950원)이었다. 국내 고물가 현상이 심화되면서, 콧대 높았던 도쿄 외식 물가도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졌다. 일본 유명 라면 체인점 이치란에서 돈코츠 라멘(980엔·약 9300원)과 생맥주(580엔·5500원)를 주문하고 1480엔(1만4000원)을 냈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한 일본 라멘 전문점에서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면 돈코츠 라멘(1만1000원)과 생맥주(1만원)를 합해 2만2000원을 냈을 것이다. 엔저를 감안하더라도 30% 이상 저렴했다. 아침 특선, 점심 메뉴 등을 활용하면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가게는 더 많아졌다. 일본의 ‘김밥 천국’이라 불리는 프랜차이즈 식당 스키야에선 350엔(3300원)에서 시작하는 조식 메뉴가 있다.

쓰키지 시장의 명물 100엔 계란말이. / 블로거 ‘마누리’

코로나 이후 5년 만에 도쿄를 찾았다는 서울 광화문 직장인 김모(41)씨는 “예전엔 긴자에서 돈가스를 1400엔 주고 먹으면서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서울엔 2만원 넘는 돈가스도 많아졌다. 도쿄에서도 비싸다는 긴자의 웬만한 식당을 가도 광화문보다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달 12일 글로벌 국가·도시 비교 통계 사이트 넘베오(Numbeo)가 조사한 식당 물가지수에 따르면 서울은 전 세계 540개 도시 중 283위로 식당 물가가 일본 도쿄(303위)와 오사카(313위)보다 높았다.

◇韓, 코로나 이후 관광 전략 재정비해야

한국도 코로나 이후 관광 계획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작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19만8017명, 해외여행을 떠난 한국인은 655만4031명이었다. 한국은 2000년 이후 관광 수지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관광 수지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에서 지출한 금액(관광 수입)과 외국으로 여행 간 우리 국민이 지출한 금액(관광 지출)의 차이를 뜻한다.

한양대 관광학부 이훈 교수는 “지금 유럽은 물론이고 일본, 태국 등 각 나라들이 코로나로 망가진 관광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해 초기 경쟁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며 “이런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대규모 이벤트와 인센티브가 필요한데 한국은 이 점에서 많이 아쉬운 상황이다. 한류와 융합한 관광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정작 K팝 스타들이 대규모로 공연하기 위한 아레나급 공연장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우리도 일본처럼 강력한 관광 컨트롤 타워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은 2008년 국토교통성 관광국을 청으로 승격시켜 일본 관광청을 출범시켰고, 총리가 주재하는 관광 전략 회의를 연다. 한국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무 부처지만, 담당 공무원들이 2~3년마다 바뀌어 전문성이 떨어진단 지적이 나온다. 국가 관광 전략 회의 또한 대통령 산하 기구로 추진했으나, 총리 산하로 격하됐다.

김근종 건양대 호텔관광학과 교수는 “지금 우리는 지자체별로 예산도 많이 쓰고 관련 행사도 많이 열지만 근시안적이고 일회적인 성격이 강하다”며 “관광청과 같은 종합 컨트롤 타워를 설립해 분산된 관광 업무를 일원화하고 장기적인 전략 수립을 통해 정책에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오익근 계명대 관광경영학과 명예 교수는 “일본처럼 개별 소도시의 강점을 브랜딩해 관광객을 유치하면 지역 소멸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