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년 어니스트는 아버지가 없었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는 학교도 가지 못했다. 착하고 영특한 소년의 자질을 알아보고 따로 챙겨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이름 그대로 정직하고 선량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저 먼 산의 큰 바위 얼굴이 언제나 고개를 들면 어니스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 옛날 이 골짜기에 살던 원주민들의 전설에 따르면 언젠가 이 골짜기에 저 바위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 실로 고귀하고 바람직한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니스트는 어머니가 말해준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너는 아마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이 말을 마음에 새긴 어니스트는 힘겨운 노동으로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누군가를 만날 그날을 고대하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갔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 발표한 소설 <큰 바위 얼굴>의 내용이다. 그 마을 출신 부자, 군인, 정치가가 큰 도시로 나가 성공을 거둔 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라는 환호성 속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기대를 품고 찾아간 어니스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실망한다. “전혀, 조금도 닮지 않았어.” 그렇게 노인이 된 어니스트를 본 시인이 외친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한평생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던 어니스트는 결국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됐다. 큰 바위 얼굴을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아 스스로의 인격을 키워나간 것이다. 역할 모델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표현이지만 엄연히 누군가 만들어낸 학술적 개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Robert Merton)이 바로 그 저작권자다.
1910년 필라델피아 남부 빈민촌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소년 메이어 로버트 스콜니크. 취미가 마술이었던 영특한 소년은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기 위해 열네 살 어린 나이부터 마술 무대에 올랐다. 그는 전설적인 탈출 마술사 로버트 후딘에게서 ‘로버트’를, 아서 왕의 전설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으로부터 멀린(Merlin)’을 따와 ‘로버트 멀린’이라는 무대명을 지었고, ‘멀린’이 다소 낯설게 들린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로버트 머턴’으로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으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서 공부하여 현대 사회학의 거목이 된 것이다.
역할 모델이란 무엇일까? 인류에게는 모방 본능이 있다. 눈앞의 누군가와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며 보고 듣고 따라 하는 대상을 머턴은 ‘준거적 개인’(reference individual)으로 정의한다. ‘선배님은 제 롤 모델이에요’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여기서 쓰이는 ‘롤 모델’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역할 모델이 아니라 준거적 개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역할 모델은 추상화된 개념이다. 우리는 역할 모델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역할 모델이 표상하는 몇몇 요소를 추상화, 동일시, 모사한다. 가까운 예로 로버트 머턴의 역할 모델이었던 마법사 멀린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가난한 유대인 소년이 스스로를 멀린이라 소개했던 것은 멀린의 지혜와 용기를 본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지, 본인이 전설 속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큰 바위 얼굴>도 마찬가지다. 어니스트는 아버지가 없다. 학교를 가지 못했으니 선생님도 없다. 준거적 개인을 갖지 못한 불우한 소년이다. 대신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역할 모델로 삼았다. 큰 바위 얼굴처럼 지혜롭고, 너그러우며, 강인하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른 이들을 바른길로 이끄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큰 바위 얼굴은 우연히 만들어진 바윗덩어리의 형상에 불과하지만,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역할 모델로 삼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어니스트는 돌멩이가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볼 때다.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지폐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왜일까? 인류는 수백만 년간 모여 살면서 다른 인간의 얼굴과 표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도록 진화해 왔다. 사람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최선의 위조 방지 도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듯 화폐 속 인물을 자주 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나라가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역할 모델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갑을 열어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종은 훌륭한 군주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은 어떤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무관한 유학자 두 명도 의아하지만, 조선시대의 ‘현모양처’를 여성 인물로 제시한 것은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데 지갑 속에는 여전히 조선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불거진 3만원권 발행 논란을 보면 그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지난 2022년 6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1년 경제주체별 현금사용행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가구의 전체 지출액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1.6%에 불과한 반면, 58.3%의 지출이 신용‧체크카드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카들 세뱃돈 주는데 5만원은 부담스럽고 1만원은 부족하니 3만원권이 필요하다는 한 아티스트의 자유분방한 발언에 정치권 일각이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다.
정치인이 범국민적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정치에 뜻을 품은 사람이라면 좋은 롤 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요즘은 정반대다. 온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을 큰 바위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본인이 했던 일도 안 했다고 우기며 피해자 행세를 하는 ‘야바위 얼굴’만 즐비하다. 역할 모델은 고사하고 반면교사도 못 될 사람들. 어니스트가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뭘 보고 배울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 가난한 소년 어니스트도 자수성가할 수 있는 그런 나라의 역할 모델, 우리의 큰 바위 얼굴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