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은 활주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날 폭설이 내렸다고 했다. 입국장에는 스키 장비를 든 사람이 많았다. 스키복에 스키 장갑, 고글, 털모자로 완전무장한 외국인들이 눈길을 끌었다. 당장 스키장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홋카이도는 1년 중 3분의 1은 눈이 내린다고 했다. 연간 적설량은 평균 6m로 관측된다. 11월에 첫눈이 오면 이듬해 3월까지 새하얀 눈을 볼 수 있는 겨울 왕국. 한국에서는 2월에 스키장이 문을 닫지만, 홋카이도에서는 1·2월이 겨울 스포츠 성수기다. 5월 초순까지 스키장을 여는 곳도 있다. 코로나 해제로 다시 북적이기 시작한 신치토세 공항에서 130km 떨어진 홋카이도 북부의 후라노시(市)로 3박 4일 스키 여행을 떠났다.
◇홋카이도엔 세로 신호등만 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자작나무 숲은 눈이 부시도록 하얬다. 누구도 밟지 않아 하얀 솜이불처럼 펼쳐진 눈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2m는 족히 쌓인 눈을 헤치고 뛰어다니는 야생 사슴도 보였다. 인가가 모여있는 마을엔 제설차가 서 있었다.
가이드 류오스케 오미씨가 도로 위 신호등을 가리켰다. “신호등이 세로형만 있죠? 눈이 워낙 많이 쌓이기 때문에 가로형 신호등은 눈이 쌓이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 있어 홋카이도에선 쓰지 않습니다.”
모든 집 지붕이 세모로 뾰족하게 기울어진 것도 눈 때문이었다. 눈이 아래로 흘러내리게 지붕을 깎았다. 후라노로 가는 국도 가장자리엔 붉은 화살 깃을 매단 가로등이 연달아 서 있었다. 눈에 파묻혀 도로 경계선이 보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차선 위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오후 3시쯤 후라노 스키장에 도착했다. 아시베츠 산자락에 위치한 이곳 최정상은 해발 1074m.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은 194헥타르나 되는 슬로프 면적에 압도당한다. 1977년 알파인 스키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해 유명해진 뒤, 스노보드 월드컵 등 국제 대회를 여러 번 치른 곳이다.
정작 후라노시는 인구 2만의 소도시다. 한국인 관광객들에겐 비에이 지역과 함께 묶어 후라노·비에이의 설경(雪景)을 만끽하기 위해 당일치기 코스로 여행하는 도시다. 하지만 가이드 류오스케씨는 “당일로 후라노 지역을 오기엔 볼 것이 너무 많은 곳”이라고 했다. 스키장은 물론, 천혜 자연과 먹거리가 풍부해서 그렇단다. 후라노 지역 이름을 딴 치즈를 비롯해 ‘후라노 와인’도 유명하다. 여름에는 라벤더가 후라노 전역에서 만개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깃털 위에서 스키를 타는 느낌
스키장에 한 발 내딛자 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가루 같은 질감에 뽀송뽀송하고 질척거리지 않는 눈이었다. 가이드는 홋카이도 지역 눈을 ‘파우더 스노’라고 부른다고 했다. 스키와 스노보드 마니아들은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눈이라고 해서 ‘자포우(Japow·Japan Powder)’라고도 부른다.
특히 아사히다케, 구로다케, 도카치다케, 후라노다케 산들이 솟아 있는 홋카이도 중앙부 지역은 ‘파우더 벨트’라고 부른다. 내륙이라 기온과 습도가 낮아, 일본에서 가장 가볍고 건조한 눈이 내린다. 후라노 토박이인 리조트 직원 사이토(57)씨는 ‘파우더 벨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 지방 눈은 습기가 적어서 푹신하고,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볍지요. 마치 깃털 위에서 스키를 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천혜 자연환경이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본 정부가 관광객 입국을 막은 탓에 2020년, 2021년 스키장들은 두 시즌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로 보냈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홋카이도 일대 스키장은 외국인 관광객이 내국인의 배 이상 되는 상황. 그러다 지난해 10월 코로나 빗장이 해제되면서 스키장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스위스 마테호른에서 온 수단과 게일 부부는 “스키로 유명한 동네에 살고 있지만, 유럽의 이상 기후로 눈이 들쭉날쭉 내려 설질(雪質)이 안 좋아졌다. 스위스와 달리 홋카이도 스키장은 눈이 너무 좋아 루스츠, 테이네 등 이 일대 스키장들을 돌며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홋카이도 스키장 관계자는 “인기 있는 리조트는 객실 수용 인원의 120% 이상 예약 문의가 들어온다”며 “코로나 이전엔 호주, 유럽, 미주 지역 사람들이 ‘원정 스키’를 왔다면, 최근엔 홍콩과 대만,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고 했다.
◇‘요정의 숲’에서 마시는 구운 우유
위도가 높은 홋카이도의 겨울은 오후 4시면 해가 진다. 야간 스키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야간 스키 대신 후라노 스키장 인근의 닝구르테라스를 찾았다. ‘닝구르’는 홋카이도 지역 원주민 아이누 민족 말로 ‘작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요정’을 가리킨다. 이곳엔 요정이 살 법한 아기자기한 통나무집 15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물건을 만드는 공방이다.
각 오두막에선 후라노에서 활동하는 수공업자들이 각양각색 기념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후라노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로 조각한 목공예품, 자연 원료로 만든 물감과 크레파스, 유리 공예품, 향초와 은 세공품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200엔짜리 천연 안료부터, 1700엔짜리 통나무 모양 향초, 3만 3000엔짜리 수제 목공예품까지 가격대도 다양하다. 류오스케씨는 “후라노시가 공인한 장인들만 입점하는 곳이라,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보일 때 사지 않으면, 공항이나 시내 매장들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귀띔했다.
닝구르테라스 바로 옆엔 카페 모리노도케이가 있다. ‘숲의 시계’란 뜻의 이 카페는 일본 후지TV에서 2005년 방영한 드라마 ‘다정한 시간’을 촬영한 장소로 유명하다. 홍차, 커피 등을 600엔에 팔고 있지만, 이 집 명물은 ‘말차를 얹은 구운 우유(Baked milk with matcha)’(560엔)다. 홋카이도 목장에서 생산한 우유를 이 카페만의 방식으로 조리한 것이다. 생크림과 푸딩 사이의 말랑말랑한 식감으로 고소하고 달콤했다.
◇자연설로 덮인 광활한 슬로프
여행 둘째 날은 후라노 스키장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호시노 리조트 도마무 스키장으로 이동했다. 해발 1239m의 도마무 설산에서 보송보송한 ‘파우더 스노’를 밟으며 타는 스키는 어떨까. 야간 스키를 포함한 종일권은 5900엔, 4시간 이용권은 5000엔이다. 이 스키장에서 가장 긴 슬로프는 4200m. 한국에선 기껏해야 500m 안팎 중급 슬로프만 탔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리프트에 올랐다. 슬로프를 타고 내려가며 곧 기우였음을 알게 됐다. 코스가 29개나 되고 슬로프 면적만 124헥타르. 사람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어 서로 부딪쳐 넘어질 걱정 없이 스키를 탈 수 있었다. 리프트나 곤돌라를 대기하는 시간도 길어야 2분 안팎이다.
한국에선 리프트 줄을 기다리다 지친다면, 일본에선 스키를 너무 많이 타서 지친다. 체력이 다한 스키어들은 슬로프 정상에 있는 클라우드 카페에 들어간다. 커피 600엔, 구름 모양 우유 아이스크림이 600엔. 일본에서 소비하는 유제품의 80%를 공급할 정도로 낙농업이 발달한 홋카이도에서 우유 아이스크림은 영하 10도 날씨에도 꼭 맛봐야 할 주전부리다.
스키를 타고 난 뒤 도마무의 겨울밤을 특별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호시노 리조트 안에 있는 아이스빌리지를 찾는 것이다. 이 마을의 모든 것은 얼음으로 만들어졌다. 건물의 천장과 벽은 물론, 의자와 탁자까지도 모두 얼음이다. 얼음 잔에 칵테일과 주스를 담아 파는 ‘아이스 바’, 따뜻한 음료와 얼음 파르페를 파는 ‘아이스 북카페’도 있다. ‘아이스 호텔’에선 숙박이 가능하다. 하룻밤에 2만 9000엔. 12월 초부터 3월 중순에만 여는 아이스빌리지 입장료는 600엔이다.
삿포로 근교에서 시내 관광과 스키를 다 같이 즐기고 싶다면 테이네 스키장이 좋은 선택지다. 차로 35분이면 갈 수 있다.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당시 경기 대부분을 치른 이곳은 최장 6000m의 슬로프도 있다. 1023m 정상에 서면 삿포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설원 속 십자가… 눈 소복이 쌓인 대불상
홋카이도에 왔다면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놓칠 수 없다. 호시노 리조트 도마무 안에 있는 물의 교회(Chapel On The Water)는 세계인들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물’로 꼽는 걸작이다. 모든 장식을 걷어내고 오로지 눈과 십자가와 물이 고요하게 자리한 이 교회 내부 관람은 오후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입장료는 없다.
삿포로 시내에서 35분 떨어진 곳에 있는 부처의 언덕(Hill of the Budda)도 안도의 작품이다. 공립 공원 묘원인 마코마나이 다키노 레이엔에 2011년 조성된 불상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모아이 석상 20여 좌가 늘어서 이방인을 맞는다. 저 멀리 언덕에 봉긋이 솟은 머리가 보인다. 부처의 머리다. 눈밭 사이로 묘지의 비석들이 보였다. 류오스케씨는 “일본인들은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는다. 주거지에 공동묘지가 함께 들어선 곳도 있고, 묘원도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원처럼 운영한다”고 했다.
입구엔 양손을 씻을 수 있는 물이 보였다. 콘크리트 길을 좀 더 걷다 보면 직사각형 연못이 나온다. 연못을 따라 걸어가면 마침내 불상의 발치가 보이는 석굴이 나온다. 콘크리트로 만든 석굴 속 40m를 걸어가면 발치만 보이던 불상이 점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천장은 둥그렇게 뚫려 있고 부처의 어깨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정성스레 예불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을 간절히 비는 것일까. 관람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수프 카레로 몸 녹여볼까, 지글지글 칭기즈칸 먹어볼까]
‘일본의 식품 창고’ 홋카이도 별미
세계에서 21번째로 큰 섬인 홋카이도엔 대규모 산지와 농장, 목장이 가득하다. 채소, 고기, 해산물 등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재료가 넘쳐 ‘일본의 식품 창고’라는 별명이 붙었다. 먹을거리도 넘쳐난다. ‘수프 카레’와 양고기 요리인 ‘칭기즈칸’, 여러 종류의 해산물을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가이센동’이 홋카이도 대표 음식이다.
삿포로시(市)에서 태어난 수프 카레는 묽은 국물이 특징이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이기에도 제격이다. 돼지 뼈와 닭고기, 각종 향신채로 육수를 낸다. 당근, 피망, 감자, 우엉, 호박, 브로콜리, 가지 등 채소도 큼직하게 썰어 불맛이 나게 구운 뒤 곁들여 낸다. 닭다리를 올린 카레가 수프 카레의 정석이지만, 채소, 소시지, 돼지고기 토핑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한다. 삿포로 중심가에 있는 가라쿠(GARAKU)가 맛집으로 유명하다. ‘닭다리살 카레(1250엔)’ ‘돼지삼겹살 카레(1390엔)’ ‘채소 카레(1190엔)’가 있다. 호시노 리조트 도마무 스키장 안에도 분점이 있으나, 시내보다 600엔가량 비싸다.
홋카이도식 양고기 ‘칭기즈칸’은 “홋카이도 도민이 가장 사랑하는 향토 요리”라고 한다. 한가운데가 봉긋 솟아오르고 홈이 파인 전용 화로에 기름을 바르고 양파와 숙주 나물, 피망 등 채소에 양고기를 얹어 구워 먹는다. 삿포로 시내에선 1954년에 문 연 다루마가 유명하다. 기본 맛인 ‘칭기즈칸(1290엔)’이 대표 메뉴다. 후라노시에선 칭기즈칸 히쓰지노카를 추천한다. ‘서포크(1210엔)’ ‘밀크램(1000엔)’ ‘화이트램(990엔)’ 세 가지 양고기가 있다. 서포크 품종은 잡내가 없고 부드러운 맛, 밀크램은 생후 3개월 된 어린 양을 써서 담백한 맛을 낸다. 화이트램은 비계가 붙어 있어 좀 기름진 맛이다.
홋카이도 해산물을 한 번에 맛보고 싶을 땐 성게, 연어, 흰 살 생선, 새우 등이 종류별로 올라간 덮밥 가이센동이 좋다. 삿포로 중심가에 있는 니조 시장엔 홋카이도 각지에서 수산물이 모여든다. 오전 7시부터 열어 이른 시간부터 식사할 수 있다. 시장 정문 입구에 있는 식당 오이소가 유명하다. 연어, 흰 살 생선, 고등어, 참치, 어패류 등이 다양하게 올라간 ‘오이소동(2480엔)’이 대표 메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