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난생처음 일본에 갔을 때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일본 버스의 승객 안전 배려였다. 일본에서는 버스를 탈 때 달릴 필요가 없었다. 버스는 정류장 앞에 와 섰고, 문이 열리면 그때 올라타면 됐다. 당시 우리나라 버스는 정류장이 멀찍이 남아 있는데도 문을 열곤 했다. 그럴 땐 우선 달려야 한다. 때를 놓치면 버스는 떠나기 때문이다. 북새통 속에서 승객들은 서로 부딪히기 일쑤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국에서 버스는 올라타자마자 승객이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에 쫓기듯 출발하곤 했다. 버스 안은 관성의 법칙을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물리학 현장’으로 변했다. 일본 버스는 느긋했다. 자리에 앉을 시간이 충분했다. 승객이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기 때문이다.
일본 버스의 안전 배려가 가장 돋보일 때는 내릴 때였다. 정거장을 앞두고 미리 일어나 대기하는 승객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차가 서면 그때 일어나라고 했다. 한국 버스에서 그랬다가는 큰일이다. 정거장을 놓치지 않으려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엉금엉금 움직여 문 앞에 가 있어야 했다.
30년 가까이 지났다. 일본 버스의 배려는 여전하다. 한국 버스는 달라졌나? 최근 서울 시내에서 겪은 일이다. 비가 오는 저녁 무렵이었다. 여행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타는데, 미처 교통카드를 찍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했다. 넘어질 뻔했다. 버스는 급제동과 급출발을 반복했지만, 승객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결국 사달이 났다. 가방을 끙끙 밀어 하차 대기를 하다가 문이 열리고 내리려는데, 갑자기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문 사이에 가방과 함께 끼여 버린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단말마 같은 비명에 놀랐는지 버스는 그제야 멈췄다. 나의 항의에 운전사는 “입구에 서 계시길래 안 내리시는 줄 알았잖아요”라고 볼멘소리다. 졸지에 나는 제때 하차도 못 하는 사람이 됐다.
작년 발생한 핼러윈 압사 사고 조사 결과가 지난달 나왔다. 경찰은 특수본을 구성해 수사에 나섰고, 관련자 6명을 구속했다. 국회는 국정조사 특위를 만들어 55일간 조사 끝에 900페이지가 넘는 결과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제 우리는 핼러윈 사고의 아픈 교훈을 딛고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별로 그러는 것 같지 않다. 국회 보고서의 주된 내용은 비난과 처벌이다. 누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누구를 처벌해야 한다 등등…. 책임자 색출과 ‘비난 정치’가 주를 이룬다. 물론 대안도 있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 ‘관련 법령 미비’ 등 천편일률적 일반론이다.
사실 대규모 압사 사건이 인류 역사상 작년 10월 한국에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1989년 영국에서는 축구 경기장 압사 사고로 94명이 사망했고, 2001년에는 일본 효고현에서 불꽃놀이 인파가 몰려 11명이 깔려 죽었다. 2010년 독일에서는 음악 축제 도중 2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났고, 불과 2년 전 미국 텍사스주에서는 콘서트 도중 8명이 사망했다. 외국에서만 있던 일도 아니다. 멀리는 1959년 부산 공설운동장 사고(67명 사망), 1960년 서울역 사고(31명 사망)가 있었고, 2005년에도 경북 상주시 콘서트장에서 11명이 사망한 바 있다. 압사 사고 연구도 많다. 국내외 논문이 한둘이 아니다.
많은 유사 사건이 이미 있었음에도 또 사고가 난 것은, 국회의원들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위험을 위험으로 느끼고 끈기 있게 구체적 대안을 만들기보다는 책임 소재 따지기에만 급급한 ‘비난 정치’에 골몰했기 때문은 아닐까?
세월호 사건으로 수많은 이가 슬퍼하던 것이 불과 9년 전 일이다. 세월호 인양에 1000억원 이상, 사건 조사에 500억원이 넘는 세금을 쏟아부었지만,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다짐이 무색하게 우리의 바다는 더 위험해졌다.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 통계에 따르면 세월호 발생 직전인 2013년 1093건이던 해양 사고는 2021년 2720건으로 거의 3배가 되었다. 같은 기간 인명 피해 역시 307명에서 512명으로 67% 늘었다. 재난에 대한 위험 의식을 높이고 구체적인 매뉴얼을 정비하기보다는 ‘비난의 정치’만을 거듭한 결과 아닐까?
사실 압사 사고 예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위험 요소를 사전에 인지하고, 군중 분산과 일방통행 원칙만 잘 지켜도 좀처럼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황별 위험 평가 기준과 인파 통제를 실행할 구체 지침을 만들어, 홍보와 교육을 통해 국민이 스스로 지침을 체화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책임자 색출과 ‘비난 정치’만으로는 절대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구체적인 생활 속 대응책을 익혀 나가야 한다. 수십 년째 계속되는 한국 특유의 버스 난폭 운전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으면서 무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관련자를 더 많이 처벌하고, ‘진상 파악’에 더 많은 돈을 쓰면 정말 안전 사회 구현이 가능할까?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애도와 추모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생활 속 안전 의식과 그에 기반한 실행 개선이 없다면 6명이 아니라 600명을 구속해도, 수조원을 쏟아붓는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재난에 대한 진정한 방벽은 우리의 생활 속에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