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양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어린 양에게 호통을 쳤다. “이 어린놈아! 내가 마실 물을 왜 흐리고 있느냐?” 어린 양은 자기가 물을 마시던 위치와 늑대가 선 곳을 찬찬히 살펴본 후,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저는 하류에 있는데 어떻게 제가 늑대님이 마실 물을 흐릴 수 있나요?”
늑대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순순히 포기하지 않고, 머리를 굴리더니 다시 호통쳤다. “네 이놈, 어디서 봤다 했더니, 작년에 날 욕하고 도망갔던 그 녀석이로구나!” 어린 양은 기가 막혔다. “저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또 할 말이 없어진 늑대는 잠시 고민 후 외쳤다. “그렇다면 네 형이 날 욕했구나. 그 대가로 널 잡아먹을 테니 원망하지 마라!”
프랑스의 우화 작가 장 드 라퐁텐이 쓴 ‘늑대와 어린 양’의 내용이다. 늑대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폭력을 정당화하려 든다. 어린 양은 논리적으로 대응하여 상대방 말문을 막는다. 하지만 늑대가 한 말이 거짓임을 폭로해도 소용이 없다.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는 늑대는 또 다른 이상한 소리를 하며 계속 어린 양을 위협한다. 이런 식의 말하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말 아침부터 점잖지 못한 단어를 보여드리는 필자를 양해해주시길.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미국의 분석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늑대가 하는 말은 ‘개소리(bullshit)’다. 방금 보신 그 단어가 맞다. ‘개소리’. 프랭크퍼트는 1986년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라는 짧은 논문을 펴냄으로써 일상 언어 사용에 대한 철학적 분석의 한 획을 그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재명이다’라는 말을 고찰해 보자. 저 말이 거짓말이 되려면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이재명이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사실. 둘째, 상대방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본인의 행위. 요컨대 참과 거짓을 구별해야 하고, 자신이 그 선을 넘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리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영어 단어 ‘bullshit’만 봐도 그렇다. 철학자는 그 안에 포함된 ‘똥(shit)’이라는 단어를 성찰한다. “대변은 설계되거나 수공예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싸거나 누는 것이다.” 개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개소리는 ‘싸지르는’ 것이다. 똥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다.”
영어 단어를 통한 분석이지만 우리말에서도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가 개소리를 내뱉는다.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짜증을 낸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사람 입에서 공기와 함께 언어를 내뱉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전혀 공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항문에서 나오는 방귀와 다르지 않다.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들이지 않는다. 가끔 거짓말쟁이들도 느끼는 작은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 아무렇게나 내뱉고 되는대로 지껄이면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윤리적으로 더 해롭다. 거짓말은 참과 거짓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을 전제로 하는 반면, 개소리는 그조차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 그것이 프랭크퍼트가 말하는 개소리의 본질이다.
프랭크퍼트가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쓴 것은 1986년 일. 화제의 논문이었지만 철학계라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본격적으로 이 논의가 확산된 것은 논문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2005년부터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던 부시 정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분노가 ‘개소리에 대하여’를 출구 삼아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결국 철학 논문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이변이 벌어졌다. 개소리라는 철학적 개념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가 내뱉던 ‘막말’을 분석하는 도구로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개소리가 우화 속에만 있다면, 남의 나라 일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현실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그로테스크하다. 지난 6일 국회 대정부 질문 현장을 떠올려 보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불러놓고 야당 의원들이 호통을 치고, 빈정거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째려보았다. 어린 양을 잡아먹을 핑계를 대고 싶은 늑대처럼 안달이 나 있던 그들은 바야흐로 개소리의 향연을 펼친 것이다.
그중 백미는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말. “장관은 들기름, 참기름 안 먹고 아주까리 기름 먹어요?” 여기서 정청래라는 사람은 ‘한동훈이라는 사람이 아주까리 기름을 식용유로 쓴다’고 거짓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뒤이어지는 문답을 보면 분명하다. 당황한 한 장관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라고 되묻자, 정 의원은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아주까리 기름. 왜 이렇게 깐족대요?” 상대방에 대한 본인의 비호감을 드러내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는, 교과서적 개소리인 셈이다.
민주당 박성준 의원도 그에 질세라 국회의 품격을 높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왕’ 자 쓴 거 알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 장관이 “나에게 물어볼 일이냐”고 답하자, 마치 준비했다는 듯 박 의원이 하는 말. “그럼 왕세자가 도대체 누구냐? 세자 책봉했다. 그것은 바로 한동훈 장관 아니겠느냐?” 이런 장면을 보며 라퐁텐의 우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작년에 나를 욕했던 양의 동생 아니냐’고 개소리를 하던 늑대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으니 말이다.
라퐁텐의 우화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어린 양이 잡아먹히는 비극으로 끝난다. 늑대가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를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어린 양은 ‘반격’ 대신 ‘반박’만 하다가 도망갈 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야생이 아닌 민주주의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 개소리를 하며 호시탐탐 때를 노리는 자를 겁낼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 국회에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무언가가 가득 차 있다. 문을 활짝 열고 환기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