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방에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한 점이 놓여있고, 둥근 스크린에 별자리 295개, 별 1467개가 촘촘하게 빛난다.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 마련된 공간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두운 전시실 한복판에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각석(刻石)’이 우뚝 서 있다. 얼핏 보면 그냥 시커먼 돌덩이 같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하늘의 질서를 돌판에 새긴 천문도다. 지름 6.5m 원형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상이 관람객들을 조선의 밤하늘로 인도한다. 별자리 295개, 별 1467개가 하늘에서 촘촘하게 빛난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전면 개편한 과학문화실의 하이라이트 공간이다. 넓은 방에 유물은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뿐. 하지만 15분마다 상영하는 영상이 공간을 꽉 채우며 관람객을 압도한다. 태조 즉위 초인 1395년 제작한 각석은 세계에서 둘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다.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이전까지는 전시장 구석에 놓여 있어 주목받지 못했다. 별자리를 새긴 표면이 흐릿해 맨눈으로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충배 고궁박물관 전시과장은 “각석에 새겨진 이야기를 영상으로 구현해 계절이 바뀌며 변하는 별자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전시했더니, 천문 마니아들은 물론 MZ 세대 관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불교조각실 독립 공간에 홀로 놓인 국보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국립경주박물관

◇단 한 점만을 위한 전시

박물관 전시실 풍경이 바뀌고 있다. 유물을 빼곡히 진열하던 과거와 달리, 단 한 점만을 강조하는 전시가 새로운 흐름이 됐다.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만을 전시한 439㎡ 공간을 조성해 화제가 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이후 나타난 변화다. 전문가들은 “관객의 눈높이가 올라가고, 조명·디자인·영상 등 전시 기법이 좋아지면서 명품을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게 조성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이라며 “과거처럼 유물만 잘 보이게 전시하는 게 아니라 공간까지 포함해서 디자인하는 것이 최근 추세”라고 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전시된 방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김충배 과장은 “네모난 전시실에 둥근 스크린을 띄운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남을 뜻하는 조선 시대 천문관을 공간 디자인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개편한 국립경주박물관 불교조각실에도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다. 국보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48㎡ 독립 공간에 홀로 놓였다. 관람객들은 불상의 옆모습과 뒷모습까지 360도 천천히 돌며 감상한다. 박아연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통일신라 3대 금동불 중 한 점인 데다 높이 180㎝에 이르는 대형 금동불상은 흔치 않은데 그동안 다른 석조 불상과 섞여 있어 아쉬웠다”며 “경주를 답사하는 느낌으로 전시장을 거닐며 여유 있게 불상을 보셨으면 한다”고 했다. 벽에는 유물 설명도 없다. “시선이 분산돼 감상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아서, 유물 설명은 QR코드로 넣어 원하는 분들만 찾아볼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정교한 백제 미술의 최고봉이라 할 국보 ‘금동 대향로’도 더 번듯한 공간에서 조명된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예산 217억원을 들여 연면적 4743㎡의 ‘백제 국보관’을 2025년 개관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지금도 금동 대향로를 독립 공간에서 전시하고 있지만, 공간이 크지 않은 데다 섬세하고 화려한 향로의 특징을 세밀히 볼 수 없어 아쉽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금동 대향로를 비롯해 왕흥사 사리기, 부여 규암 출토 금동 관음보살입상 등 대표 국보만 ‘백제 국보관’ 3층 국보전시실에서 집중 조명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공개한 국립중앙박물관 기증Ⅰ실에서 '손기정 투구'가 독립 공간에 놓여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손기정 투구'가 단독 전시된 방 입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Ⅰ실에서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교육 공간에서 치유 공간으로

명품만 독방을 차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해 12월 공개한 국립중앙박물관 기증Ⅰ실에선 ‘스토리’가 주인공이다. 박물관은 그동안 관심이 저조했던 기증관을 전면 개편하면서 기증자의 삶과 스토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새 단장을 하고 있다. ‘나눔의 서재’라고 명명한 복합 공간을 지나면,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전시된 ‘손기정 투구’를 만날 수 있다. 원래 이 투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부상이었다. 당시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가 받아야 했으나, 전달되지 못한 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박물관에 50여 년간 보관돼 있었다. 뒤늦게 이를 안 손기정 선생이 돌려받고자 노력한 끝에 투구는 50년 만인 1986년에야 돌아왔고, 그는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1994년 기증했다. 이원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기증관은 유물 자체보다 나눔의 취지와 이야기가 중요한 공간이라 손기정 선수가 기증한 투구를 대표 유물로 내세운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박물관 상설 전시는 정해진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연대순으로 유물을 감상하는 게 공식이었다. 전시 가능한 유물을 최대한 꺼내 출토 상태 그대로 보여주는 기법이 각광받기도 했다. 이수미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예전엔 박물관이 역사 교육 현장이라는 인식이 컸다면 이제는 일상에 지친 이들을 치유하는 휴식 공간으로 바뀌었다”며 “쉼과 여백의 미가 두드러지면서 단 한 점을 관객 마음에 전달하려는 시도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