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 커피를 망치고 계십니다. 우리 나폴리인이 마시는 그대로 드세요.”
2015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카페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덜기 위해 뜨거운 물을 부었다가 바리스타에게 혼쭐이 났다. 이탈리아, 특히 나폴리는 에스프레소를 ‘신성시’한다. 한국처럼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거나 얼음을 띄워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행위는 신성 모독에 가깝다.
그런데 교황조차 허락받지 못한 ‘에스프레소에 물 붓기’를 할 수 있는 외국인이 최근 나폴리에 나타났다. 이번 시즌 SSC 나폴리로 이적해 주전 수비수로 활약 중인 ‘코리안 몬스터’ 김민재(26)다. 김민재의 활약을 전하는 SSC 나폴리의 공식 SNS 게시물에는 “민재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도 된다(Minjae ha il permesso di aggiungere acuqa all’espresso)”는 댓글이 달린다. 매 경기 눈부신 활약을 펼치면서 나폴리 사람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결과다.
하지만 김민재에게 자만이나 기복은 없다. 경기를 치를수록 점점 더 좋은 활약을 선보인다. 지난 22일 새벽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선 사실상 ‘인생 경기’를 펼쳤다. 지난 시즌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한 분데스리가의 강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는 홈 경기임에도 나폴리와 김민재를 전혀 위협하지 못했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프랑스 국가대표 공격수 콜로 무아니는 김민재의 터프한 수비에 번번이 가로막혀 공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고,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해 무리한 파울을 범하고 경기 도중 퇴장당했다.
경기 결과는 2대0 나폴리 승. 통계 기반 축구 매체들은 골을 넣은 나폴리 선수들이 아닌 수비수 김민재를 이날 경기의 최고 평점 선수, 최우수 선수로 선정했다. 이 경기에서 김민재는 총 148회의 볼 터치로 모든 선수 중 1위를 기록했고, 125개의 패스를 성공해 이 역시 1위를 했다. 볼 경합, 위험 지역에서의 볼 걷어내기, 태클 성공도 모두 1위였다. 사실상 프랑크푸르트의 공격 시도 대부분을 김민재가 막아내고, 동시에 나폴리 공격 전개의 출발점 역할까지 완벽히 해낸 것이다. 이탈리아의 레전드 수비수 출신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는 “내가 나폴리 감독이라면 경기 후 라커룸에 들어가서 김민재와 악수하며 칭찬부터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점이 안 보인다” 역대 최고 아시아 출신 센터백
현재 김민재는 세계 축구계로부터 ‘세리에 A 최고의 중앙 수비수이자 월드 클래스 수비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냉정한 평가로 유명한 한준희 축구 해설위원도 최근 유럽 5대 빅리그 상반기 베스트 11중 센터백으로 김민재를 꼽으며 “절대 흥행이나 국뽕으로 뽑은 게 아니다”라고 강조해 축구 팬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축구 전문 매체 포포투도 작년 말 김민재를 마르퀴뇨스(PSG·브라질), 피르질 판 다이크(리버풀·네덜란드) 등 세계적인 센터백과 함께 ‘현 시점 세계 10대 센터백’으로 꼽았다. 10명의 센터백 중 세리에A 선수는 김민재가 유일했다.
한준희 위원은 김민재를 “수비수로서 가진 도구(Tool)가 너무 좋은, 이른바 ‘육각형’ 선수”라고 했다. 중앙 수비수가 가져야 할 능력들을 골고루, 뛰어나게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전문가들도 “김민재는 결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중앙 수비수로서 가져야 할 거의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중앙 수비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하드웨어’, 즉 체격 조건이 유독 중요한 포지션이다. 상대 공격수와의 몸싸움과 위치 경합, 공중볼 경합이 빈번하기 때문. 키 190㎝에 체중 84~88㎏kg의 탄탄한 체격, 높은 점프력과 강력한 헤딩력을 두루 가진 김민재는 유럽·남미 출신 월드클래스 수비수와 공격수를 압도하는 피지컬 능력을 갖고 있다. 현지 언론 가제타(La Gazzetta dello sport)가 “공중볼에서는 누구도 김민재를 이길 수 없다”고 묘사할 정도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 헤딩으로만 이미 2골 1어시를 기록해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상대 팀에겐 ‘공포 그 자체’다.
보통 수비수가 체격이 크면 스피드가 부족한 단점이 나타나지만, 김민재는 크고 탄탄한 체격에 빠른 발까지 갖추고 있다. 지난해 나폴리 자체 훈련에서 스피드 테스트를 한 결과 김민재는 최고 시속 35㎞를 기록, 나폴리 주전 공격수 빅터 오시먼(시속 37㎞)에 이어 팀 내 2위를 기록했다. 어지간히 발이 빠른 세계적인 공격수들도 김민재 앞에선 고전할 수밖에 없다. 유도 선수 출신 아버지와 육상 선수 출신인 어머니로부터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현대 축구는 강팀일수록 수비 라인을 높게 올리는 추세라 중앙 센터백들이 빠른 스피드로 넓은 공간을 커버해야 하는데, 김민재의 스피드는 그래서 더 빛난다. 이번 시즌 나폴리는 측면 수비수를 높게 전진시키는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함에도 김민재가 폭넓게 뒷공간을 커버해준 덕분에 23경기 중 15골 실점으로 세리에A 팀 중 가장 적은 실점을 기록하고 있다.
김민재는 피지컬만 뛰어난 게 아니라 볼을 다루는 기술과 패싱력, 중앙 수비수로서의 위치 선정과 판단 능력 등 ‘소프트웨어’도 이미 최정상급이다. 임형철 축구 해설위원은 “김민재는 중앙 수비수로서 언제 전진해야 하고 물러서야 하는지 정확하게 판단한다”며 “시야도 넓어 공을 보면서도 수비해야 할 상대 공격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을 뺏은 후에는 팀이 자연스럽게 공격을 전개하도록 돕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말했다. 김민재는 이번 시즌 세리에A에서 90분당 73.5개의 패스를 성공해 리그 1위에 올라있다.
강한 정신력에 부상과 기복이 없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한준희 위원은 “과거에는 경기 중에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보완됐고, 이제는 수비부터 공격까지 다 미리 계산하고 자연스럽게 플레이하는 능력을 갖췄다”며 “멘털적으로 항상 자신감과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출신 수비수들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압박감에 무너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며 “반면 김민재는 정신적으로도 이런 부분을 완전히 극복한, 축구사상 가장 뛰어난 아시아 출신 수비수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폴리 현지 언론과 팬들도 김민재의 경기에 임하는 태도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나폴리 매거진’은 “김민재는 어떤 상대를 만나도 침착하고 자신감이 넘친다”고 했고, 가제타는 “김민재는 경기장에서 생각을 하고 책임감을 갖고 움직이며, 대단한 믿음을 주는 선수”라고 묘사했다. 나폴리 팬들은 “쿨리발리는 자잘한 실수들이 잦았는데, 김민재는 경기장에서 항상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인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레알·맨유·PSG도 노리는 명실상부 ‘월드클래스’
국내에선 오래 전부터 김민재의 성공을 예상한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2017년 전북 현대에 입단한 이후 ‘괴물 센터백’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최강희 당시 전북 현대 감독은 기자들에게 김민재를 두고 ‘쟤가 제2의 홍명보가 될 재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민재와 잠시 훈련했던 전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 김형일은 한 방송에서 “이미 대학 시절부터 김민재는 큰 덩치에 빠른 스피드, 준수한 볼 간수 능력을 선보여서 프로들 사이에서도 ‘쟤는 미쳤다’는 말이 나왔다”고 회상했다.
의구심이 제기된 때도 있었다. K리그를 평정한 김민재가 유럽 구단의 관심에도 2019년 중국 베이징 궈안으로 이적하자 국내 축구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선 ‘결국 발전보다 돈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김민재는 이런 의심들을 실력으로 불식시켰다. 중국 리그로 이적한 첫 시즌에 리그 베스트 11에 뽑혔고, 3시즌 동안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유럽 구단의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2021년에 튀르키예 명문 페네르바체로 이적한 직후에도 적응 기간 없이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고작 1년 뒤 나폴리로 이적했지만 지금도 튀르키예 팬과 언론 사이에서 “김민재가 그립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탈리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민재가 나폴리로 이적하자 이탈리아 현지 언론과 전문가들은 김민재의 실력에 공공연히 의구심을 드러냈다. 김민재가 오기 전 나폴리는 칼리두 쿨리발리(31·세네갈)라는 세리에A 최고의 센터백과 무려 8년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온 낯선 센터백이 EPL로 떠난 최고의 센터백을 단박에 대체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언론과 전문가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현재 이탈리아 언론과 전문가들은 “김민재가 쿨리발리보다 훨씬 낫다”는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 축구 통계 매체 풋몹(Futmob)에 따르면 지난 22일까지 세리에A 선수 평균 평점에서 김민재는 7.52점으로 전체 선수 중 7위에 올라 있다. 1~6위 중 센터백은 없고, 수비수 중에서는 김민재의 팀 동료인 왼쪽 풀백 마리오 후이(3위)가 유일하다. 현지 언론과 팬들은 ‘몬스터’ ‘철기둥’ ‘화성인’ 등으로 김민재를 부른다.
김민재와 흐비차 크바라츠헬리아(22·조지아) 등 신입생들의 활약에 힘입어 나폴리는 이번 시즌 세리에A에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현재까지 20승 2무 1패, 승점 62점으로 리그 2위 인터밀란과의 승점 차이는 이미 15점까지 벌어진 상황. 현지 언론들은 “이미 이번 시즌 세리에A 우승 경쟁은 끝났다”고 말한다. 나폴리가 이번 시즌 우승하게 되면 1990년 디에고 마라도나의 극적인 활약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무려 33년 만에 세리에A 우승을 되찾게 된다. 나폴리와 나폴리 팬들에겐 김민재가 복덩이일 수밖에 없다.
나폴리가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이어가면서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민재와 빅터 오시먼을 앞세운 나폴리가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 22일 프랑크푸르트 전 승리 이후 스페인 축구 전문 매체 마르카는 이번 시즌 나폴리의 성공 요인으로 김민재와 오시먼을 꼽으며 “김민재는 무명으로 나폴리에 와 거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수비진의 보스”라고 평가했다.
김민재의 위상과 몸값도 곧 손흥민을 넘어 아시아 선수 중 최고가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신에 따르면 현재 세계 최고 명문 구단인 레알 마드리드와 박지성이 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오넬 메시와 킬리안 음바페가 뛰고 있는 프랑스 최고 명문 파리 생제르맹(PSG)도 이번 시즌이 끝나고 김민재를 영입하는 데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김민재는 지난해 7월 약 1900만유로(약 263억원)의 이적료로 나폴리에 입단했지만, 현재 김민재를 영입하려면 최소 1억 유로(약 1386억원)를 내야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만 김민재와 나폴리의 계약에는 오는 여름 김민재가 국외 구단에서 4500만유로(약 624억원) 이상의 이적료로 이적 제의를 받으면 나폴리가 김민재의 이적을 거부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현재로선 김민재가 어떤 빅클럽으로 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