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중에서도 가장 먼저 피는 홍매화는 열아홉 살 바람난 가시나 같지요. 2월에 추운 줄도 모르고 피여. 한껏 뽐내는 게 딱 철딱서니 없어 보이기도 하고예. 그래도 새벽 찬 공기에 제일 먼저 그 조그만 꽃봉오리를 터뜨린 걸 보면 반가운 마음도 들고, 애틋함에 눈물도 나뿌리고… 머슴처럼 일하다 매화 보며 한참 혼잣말 씨부렁거리다 보면 마음속 찌꺼기가 다 녹아 저기 저 섬진강 물 따라 씻겨 내려가는 것 같지요. 그래서 매화 꽃은 내 얘기 들어주는 딸 같고, 매실은 아들 같다 안 합니꺼~.”
스물넷에 경남 밀양에서 전남 광양으로 시집와 벌써 쉰여덟 번째 매화나무 아래에서 봄을 맞이한다는 청매실농원 주인 홍쌍리(81) 매실 명인은 2월 중순에 서둘러 핀 홍매화를 두고 말했다.
겨울과 봄 사이 계절의 변곡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광양의 매화나무일 게다. 입춘 지나 매화나무가 꽃을 피우고 나면 비로소 봄꽃들의 개화 릴레이가 숨 가쁘게 이어질 테니까. 더디 오는 듯한 봄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남쪽, 광양으로 봄 마중을 떠났다.
◇광양의 봄은 ‘소학정 백매화’부터
“날씨가 추웠다가 따숩다가 오락가락하니까, 아직 꽃망울이 몽글몽글한 게 활짝 피지는 않은 것 같던데!” “와? 소학정 백매는 얼마나 활짝 피었다꼬~” 다압면 식당 ‘섬진강 고향집’에 둘러앉은 주민들은 물론, 쌀쌀한 바람 속 온기가 느껴진다 싶은 이맘때면 광양은 어딜 가나 꽃 얘기다.
‘한반도의 봄은 섬진강에서 시작되고, 광양의 봄은 소학정에서 시작된다’는 말에 소학정 매화나무부터 만나기로 했다. 지난 겨울 섬진강이 꽁꽁 어는 혹독한 추위에서도 꽃을 피워 감동을 주었던 이 ‘설중매’는 광양 봄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을 만하다. 나무 앞쪽엔 ‘전국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다’라는 글자 안내판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다압의 매화나무 중 가장 먼저 개화를 하는 나무’로 알려졌다. 겨울에 선발대로 펴 얼었다가 피었다가를 반복하다 끝내 봄과 함께 만개하는 백매화는 가까이 있는 어느 집 마당의 홍매화와 어우러져 고매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기품이 느껴지는 수형에 팝콘처럼 촘촘하게 핀 초봄의 귀한 꽃을 지나칠 수 있는 이 없을 터. 보는 이마다 가던 길 멈추고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매화 축제’의 중심 ‘청매실농원’
소학정 섬진강 쉼터에서 차로 7~10분 정도 달리면 홍쌍리 명인의 청매실농원이 있다. 밤나무를 심어 키웠던 시아버지에 이어 경상도 며느리가 시집온 이듬해부터 “산에서 일하다 산비탈에 홀로 핀 흰 백합꽃처럼 외롭게 살기 싫어서 심기 시작했다”는 매화나무는 어느덧 일대 10만 그루의 군락을 이룬 ‘광양 매화 마을’의 중심이 됐다.
1997년 이후 매년 봄 매화 축제를 열어온 청매실농원 일대 다압면을 비롯해 광양 전역에선 오는 3월 10일부터 19일까지 ‘광양은 봄, 다시 만나는 매화’라는 주제로 ‘광양 매화 축제’를 연다. 4년 만에 다시 열리는 축제를 앞두고 농원은 오랜만에 ‘공식적으로’ 상춘객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청매실농원은 2월 중순부터 산 언덕에 진분홍 물감을 뿌린 듯 홍매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다가 3월에 들어서면 꽃받침이 연둣빛인 청매화와 하얀 백매화가 개화하며 꽃 대궐을 이룬다. ‘꽃은 한철’이라지만, 개화 시기에 맞춰 열리는 매화 축제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다. “축제를 열지 못한 코로나 사태 때도 봄이면 10만 명이 조용히 다녀갔다”고 했다.
지금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홍매화는 농원에서 팔각정 방향 돌담을 따라 드문드문 이어진다. 팔각정으로 가는 길 초입엔 섬진강을 배경 삼은 장독대가 반긴다. 청매실농원의 대표 포토존이다. 매실액과 장, 장아찌가 익어갈 때 찾으면 그 향까지 물드는 듯하다. 팔각정에 서면 섬진강과 강 건너 하동, 쪽비산 일대가 파노라마 전망으로 펼쳐진다. “축제 때 와서 매화 꽃도 보고, 지글지글 부쳐내는 파전에 잔치국수도 맛보고, 실컷 놀다 가이소~.” 홍쌍리 명인이 웃으며 말했다.
◇전남도립미술관·광양예술창고 그리고 인서리공원
광양에 매화만 있는 게 아니다. 차로 30여 분 거리 광양읍엔 ‘예술 꽃’ 핀 공간들이 기다린다. 전남도립미술관·광양예술창고·인서리공원 등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어 부지런히 움직이면 반나절 문화·예술 테마 여행이 가능하다.
코로나 한창이던 2021년 3월 옛 광양역 자리에 조용히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지역 미술관이면서도 ‘리움미술관’ 순회전 등 굵직한 거장들의 작품을 선보여 온 곳. 미술에 조예가 깊다고 알려진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다녀가 화제를 모았고, 김황식 전 총리가 “찾아가는 수고가 아깝지 않은 곳”이라 평한 미술관이기도 하다.
요즘은 작가 24명의 설치, 조각, 뉴미디어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신소장품’전(~3월 26일)이 열린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권세진 작가의 ‘물의 표면’이 눈에 들어온다. “언뜻 윤슬(물비늘)이 반짝이는 바다 사진 같지만, 캔버스 위에 한지와 수묵으로 그려낸 48점의 그림을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연우 학예연구사가 설명했다. 복숭아 씨앗과 와이어를 활용한 김동석의 설치 작품 ‘석과불식-숲을 꿈꾸다’와 엄마의 집 베란다를 보는 듯한 윤선홍 작가의 ‘안녕하세요’도 눈길을 끈다.
전남도립미술관 앞 옛 광양역 폐창고를 활용한 복합 문화 공간 광양예술창고는 북 카페, ‘여행자의 쉼터’와 미디어영상실 등을 갖췄다. 다녀간 이들 사이에 ‘광양의 빛의 벙커’ ‘광양의 아르떼뮤지엄’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미디어영상실은 ‘터치’, ‘VR’로 만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콘텐츠를 추가해 즐길 거리가 늘었다. 스크린 속 떨어지는 매화 꽃봉오리를 건드리면 보물이 나오는 ‘광양의 보물 매실 찾기’ 등 실감형 콘텐츠는 어린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지난해 12월 문 연 복합 문화 공간 인서리공원은 도립미술관·광양예술창고와 함께 광양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중. 원도심의 낡고 방치돼 있던 창고와 한옥, 차고 등 열네 채의 공간이 전시공간 ‘반창고’, 아트프린트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는 ‘아트앤에디션’, 카페 ‘Aat(에이에이티)’, 숙소 ‘다경당’ 등으로 새 옷을 갈아입으며 나들이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젊은층뿐 아니라 중장년 여성들도 많이 찾는다. 도시 재생 사업의 하나로 탄생한 공간은 바른손카드 창업자인 박영춘 회장의 딸 박소연 아트앤에디션 대표가 전시를 포함한 마을 기획 전반에 참여하며 다양한 콘텐츠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주택가 골목에 있어 동네의 다양한 표정을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재미있다.
전시장은 김경화 작가의 ‘온기를 전하는 풍경’이 채우고 있다. 광양 매화 축제 시작과 함께 3월 10일부터는 황란 작가의 ‘매화전’을 마련한다. 작품을 감상한 뒤 오래된 한옥의 지붕과 골조를 살린 카페 툇마루에 앉아 매실에이드를 맛보고, 마당이 내다보이는 신식 한옥 ‘라이브러리’에 앉아 실컷 책을 읽으면 겨우내 움츠러든 몸과 마음이 따사로운 기운으로 채워지는 듯하다.
설치·도예 작가 고명신의 단독 전시 공간인 ‘갑빠오의 집’도 재미있다. 사전 방문 신청 후 도슨트와 함께 인서리공원에서 5분 정도 친구네 집 찾아가듯 걸어가 낡은 집 대문을 열면 커다란 시골집 개를 연상시키는 작품부터 “옛날 광양제철소 직원이 세들어 살았다”는 문간방, 사랑방 곳곳에 위트 넘치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갑빠오의 집을 나서 다시 인서리공원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는 길, 낡은 페인트 가게와 미용실 간판이 있는 골목을 구경하다 길을 잘못 들면 시끌벅적한 광양 5일시장(1·6으로 끝나는 날) 길로 빠질지도 모른다.
◇마로산성서 일몰, 구봉산 전망대서 야경
인서리공원, 광양5일시장에서 차로 10분 거리, 용강리 마로산(해발 208.9m) 정상엔 마로산성이 있다. 서서히 해가 질 무렵, 산책 삼아 콧바람 쏘이며 등산 기분 느끼고 싶을 때 가볼 만하다. 주차장에서 넉넉히 5분이면 산성에 닿는다. 남과 북측이 길쭉한 사각형을 이루는 산성은 6세기 중엽을 전후한 백제시대에 축성해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되다 임진왜란 광양만 전투 때 관군과 의병이 성을 보수해 활용한 것이라 전해진다. 깃발 펄럭이는 산성 둘레를 따라 걷거나 벤치에 앉아 소나무 너머 떨어지는 해를 감상한 후엔 서둘러 하산해 야경을 보러 갈 차례다.
마로산성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광양 제일의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구봉산 전망대가 있다. 아직은 쌀쌀하기에 두꺼운 옷으로 ‘무장’을 단단히 해야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특별한 야경이 기다리고 있다. 해발 473m 구봉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광양만, 순천, 여수, 하동, 남해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면 포스코 광양제철소, 광양항, 여수 국가산업단지 등이 불빛으로 반짝거린다. 금요일부터 일요일 일몰 후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 대교’ 야간 경관 조명까지 더해지면 더욱 황홀한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윤동주 유고 보존한 정병욱 가옥도
광양의 남쪽을 지날 때 550여 리를 달려온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망덕포구 부근이라면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지나칠 수 없다. 윤동주의 친우였던 국문학자 정병욱 선생과 그의 가족이 일제 말, 윤동주의 유고(遺稿)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존해 오다 광복 후 세상에 내어 빛을 보게 한 애틋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했던 구조의 옛 가옥은 세월이 흘러 여러 곳 보수를 거친 흔적이 역력하지만, 마룻바닥을 뜯어 유고를 숨겼던 항아리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윤동주 서거일(2월 16일) 다음 날인 17일 이곳을 찾은 김동원(44·전남 고흥)씨는 “매년 기일 맞춰 방문하는데 올해는 하루 늦었다”며 추모 후 가옥을 둘러봤다. 이향화 문화관광해설사는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내국인뿐 아니라 윤동주 시인의 생일이나 서거일에 맞춰 방문하는 일본인, 중국인들도 많았다”고 했다. 정병욱 가옥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망덕포구와 배알도를 잇는 ‘별 헤는 다리’도 걸을 수 있다. 배알도 해안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이 입안에 맴돌았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쑥향 은은한 도다리쑥국, 짭조름한 재첩 한상··· ]
광양의 봄 별미
‘광양 9미(味)’가 있다. 청동화로에 참숯을 피워 구워 먹는 ‘광양불고기’, 봄 건강 음료로 통하는 ‘백운산 고로쇠’, 짭조름한 맛의 ‘섬진강 재첩’, 석쇠에 구워 먹는 ‘닭숯불구이’와 ‘숯불장어구이’, 광양 매실로 담아낸 ‘매실차’와 ‘기정떡’ ‘망덕포구 가을 전어’ 등이다.
광양의 봄맛을 논할 땐 섬진강 재첩부터 떠올린다. ‘갱조개’라고도 불리는 재첩은 섬진강 하구에 서식하는 손톱만 한 작은 조개로 국물 요리부터 무침, 부침개 등에 다양하게 쓰인다. 다압면 광양 매화 마을과 가까운 섬진강 고향집에선 사시사철 재첩국·재첩무침·재첩 부침개 등을 맛볼 수 있다. 재첩정식(1인 1만8000원)을 주문하면 재첩 요리를 한 상 가득 차려낸다. 밥이 담긴 커다란 대접에 매콤새콤한 재첩 무침을 넣고 쓱쓱 비벼 먹으면 별안간 입맛이 돈다. 재첩은 4월부터 6월까지 채취하는데, 주인은 “아직은 철이 아니다 보니 요즘 쓰는 재첩은 작년 봄 것”이라고 했다. 관광객뿐 아니라 ‘동네 장부’가 있을 만큼 현지인 단골이 많다.
‘가을 전어’로 유명한 망덕포구라지만, 이맘때 망덕포구엔 ‘벚굴’과 도다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식당들이 많다. 그중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바로 옆 망덕남해횟집은 이곳 토박이이자 정병욱 선생 조카 박춘식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사시사철 물회가 대표 메뉴이나 쑥이 많이 나는 3월 이후엔 ‘도다리쑥국’을 선보인다. 쑥향 은은한 도다리쑥국은 국물 맛이 깊고 깔끔하다. 쑥이 나기 전엔 ‘도다리미역국’(1인분 2만원)이 대신한다.
‘쑥’ 하면 백운산 명물 옥룡면 옛날쑥붕어빵을 빼놓을 수 없다. 쑥을 넣어 반죽한 옛날붕어빵(3개 1000원)은 ‘겉바속쫄(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것이 특징이다. 붕어빵 외 핫도그와 어묵, 찐 달걀 등도 판다. 3월 중순이면 동백꽃 만발하는 옥룡사지와 가까이 있으니 오가는 길 주전부리 챙기기에 좋다.
인서리공원 카페 Aat(에이에이티)에선 소풍 나선 기분으로 맛볼 수 있는 ‘인서리01 도시락’(2만2000원)이 인기다. 구성 메뉴는 철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2단 도시락에 간편하게 먹을 만한 쌈밥이나 유부초밥, 디저트 등을 담아준다.
광양5일시장에선 시장국밥을 지나칠 수 없다. 시장 한쪽 아담한 식당 안에선 시장 상인, 여행객이 등허리를 맞대고 국밥 한 그릇 하고 간다. ‘장어탕’(1만원)이 ‘시장 보양식’으로 방송을 타며 유명해졌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선 ‘막창국밥’(9000원)이나 순대국밥(7000원) 등이 더 유명한 집이다. 건더기 푸짐하게 담아낸 뜨끈한 국밥 한 그릇에 갓 쪄 낸 순대(5000원)에 시장 인심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