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히 옷을 입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흰 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뒷모습만으로는 소년인지 어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왜 그런 자세로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앞쪽으로 나아가 몸을 돌려 쳐다보니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뜻밖의 만남에 순간 멈칫하며 놀랍니다. 히틀러와 눈이 마주칩니다. 크게 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위치를 옮기자 시선이 저를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은 약간 위쪽을 바라본 채 고정되어 있습니다. 얼굴은 분노를 감추고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못을 회개하며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리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38점으로 구성된 기획전 “WE”에 출품된 ‘그’(2001)라는 작품입니다.

미술관 입구와 안쪽 로비에 실제 사람처럼 보이는 두 노숙자가 누워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잠들어 있습니다. 작품 ‘동훈과 준호’(2023)입니다. 전시관 내 높고 낮은 곳곳에 수많은 비둘기가 자리하고 있는 ‘유령’, 교황 바오로 2세가 운석에 맞아 쓰러진 ‘아홉 번째 시간’,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 놓은 ‘코미디언’, 한 사내가 전시장 바닥을 뚫고 머리를 디밀고 나와 두리번거리는 ‘무제’(2001), 쌍둥이처럼 보이는 두 사내가 검은 양복을 입고 하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우리’(2010) 등 하나같이 알 듯 모를 듯한 작품들입니다.

일러스트=김영석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 소년이 높은 곳에 걸터앉아 가끔 북을 두드립니다. 독일의 노벨 문학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나오는 소년 오스카를 끌어온 것 같습니다. 오스카는 전쟁과 대립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반항으로 성장을 멈추고 양철북을 두드리며 광대처럼 살아가는 인물인데, 카텔란도 같은 관점에서 양철북 치는 소년을 등장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 관객들은 깜짝 놀라 소리 나는 위쪽을 바라보며 정체를 확인하고서 재미있어합니다.

카텔란은 이처럼 상징적 인물이나 일상적 소재를 활용하고 이를 익살스럽게 또는 발칙하게 비틀어 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기존 가치체계를 살짝 흔들어 보고, 사람들의 궁금증을 야기하기도 하고, 즐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카텔란 본인은 정작 작품의 의도를 밝히는 것을 자제합니다. 심지어 많은 작품명을 ‘무제’로 해놓은 것도 그런 뜻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카텔란의 작품들은 난해하지 않아 관객들이 각자 작품의 주인이 되어 나름대로 해석해 볼 수 있고, 이를 다른 사람과 활발하게 토의해보면 서로 공감하는 대목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미술에서 종래의 예술 관념을 벗어나 완성된 작품 자체보다는 제작의 아이디어나 과정이 바로 예술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지만, 너무 난해하여 작가의 제작 의도를 듣고도 이해·공감되지 않거나 심지어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까지 있어 이를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래전 한 전시회에서의 경험입니다. 시체를 화장하여 생긴 뼛가루로 분필 모양의 기둥을 만들어 놓고 소멸·죽음·흔적을 나타내는 것, 핵폐기장 설치 반대 집회 참가자들의 옷·신발 등을 모아 진열해 놓고 방사능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 웨딩드레스를 소금물에 담아 절여 놓고 퇴색해가는 결혼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작품들을 보고 공감은커녕 억지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문외한인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번 전시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축소하여 만들고 그 내부에 최후의 심판 등 천장화와 벽화를 그대로 그려 놓고 들어가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작가의 배려심이 엿보이는 예술적 아이디어입니다. 또 하나는 찰리군입니다. 찰리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나타나 전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관객들이 신기해하며 즐거워합니다. 입구 밖의 노숙자로 시작하여 곳곳의 비둘기, 북 치는 소년, 찰리군까지, 모든 것이 한데 어울린 하나의 작품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존재’임을 확인해주는 전시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