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나신으로 절벽을 올랐다던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기벽이 세상을 그나마 덜 지루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생각난 김에 기벽을 사전에서 찾았더니 재미있는 예문이 나왔다. “그에게서 매력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의 타고난 천진성과 기상천외의 기벽 때문이었다.” 기상천외까지는 아니지만, 최근에 들었던 기벽 중에 이런 게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블러디 메리를 마신다고 했다. 집에서도, 술집에서도, 비행기에서도.
비행기에서 마시는 블러디 메리가 제일이라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기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잘 안 마시는 걸 마신다는 우월감 비슷한 걸 거라고. 그런데, 최근에 ‘에어플레인 블러디 메리’라는 명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행기 공식 음료’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도. 개성 있는 몇 분이 추구하는 컬트적인 게 아니라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었다.
독일 항공사인 루프트한자는 통계 수치까지 갖고 있었다. 맥주가 59,000갤런 소비될 때 토마토 주스는 53,000갤런 소비되었다나? 거의 1:0.9의 비율이다. 맥주에 대한 크나큰 열정을 보이는 독일인들이 거의 맥주만큼 토마토를 택한 것이라며, 주목할 만한 결과라고 루프트한자의 임원은 말했다. 토마토 주스나 토마토 주스가 들어가는 블러디 메리에 대한 사랑이 맥주를 위협할 정도라면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루프트한자는 토마토가 비행기에서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리서치 회사에 의뢰한다. 리서치 회사는 3만 피트 하늘 위를 비행 중인 비행기의 압력, 온도와 습도, 흔들림, 엔진 소리 등을 재현해 피실험자에게 토마토 주스를 마시게 한다. 텁텁하다고, 신선하지 않게 느껴진다고 지상에서는 토마토 주스를 혹평한 이들은 비행기처럼 웅웅거리고 귀가 먹먹한 환경에서는 토마토 주스가 미네랄이 풍부하고 신선하다고 말한다.
이유는, 저기압과 엔진소리에 있었다. 해수면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기내의 압력이 낮아지면서 혈액에 흡수되는 산소의 양도 줄어드는데, 미각과 후각이 둔화된다고 한다. 또 엔진 소리도 영향을 미친다. 단맛이나 짠맛을 덜 느끼게 만든다고. 이런 환경에서 거의 유일하게 향상되는 미각의 능력이 있었으니, 감칠맛이다. 우마미라고도 하는 이 감칠맛이 활성화되는데, 이게 토마토 주스와 블러디 메리의 감칠맛을 극대화한다는 연구 결과였다. 오!
비행기에서 나는 뭐를 했더라. 잡지를 봤고, 기내품을 샀고, 기내식을 연구했다. 연구라고 해 봤자 비건식이나 과일식 같은 걸 시켜 먹어보거나 항공사의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탄단지의 비율을 살피는 정도지만. 기내식 연구에는 술 연구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어서 맥주나 와인을 함께 마셨다. 기벽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한심할 정도로 건전하고, 건강하다.
비행기에서 블러디 메리를 마셔본 적도 없다. 서빙되는지도 몰랐고, 그걸 달라고 하는 사람도 본 기억이 없다. 칵테일바에서도 시킨 적이 없다. 배가 부른 게 싫어 칵테일을 마시기로 한 건데, 블러디 메리는 뭔가 그득한 느낌이라서. 모양도 문제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콜린스 잔에 나온다는 것 말고는 좀 그렇다. 뭐랄까. 칵테일바에서 칵테일을 시킬 때는 맛도 맛이지만 색다른 조형미를 기대하게 되는데, 블러디 메리에는 기대할 만한 바가 없달까.
불투명한 붉은색이라서 그런가. 답답하고 둔탁해 보이는 액체. 여기에 대개 셀러리가 수북이 꽂히게 되는데, 이 또한 좀 그렇다. 섬유질도 풍부하고 몸에도 좋을 것 같긴 한데 너무 실용적인 느낌이라서. 웨스턴 부츠를 신고 저벅저벅 모래를 밟으며 코브라를 피하다가 끝내 코브라에게 물리지 않고 귀환한 것을 축하하며 마시는 술 같달까. 웨스턴 부츠도 없는 데다가 코브라를 본 적도 없는 내가 왜 이런 비유를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는 종종 마신다. 매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특색은 분명한 게 블러디 메리라서. 혼합 용액일지언정 토마토가 들어가고 셀러리도 함께 먹는 이 술은 출출할 때 당긴다. 본격적인 음식이 아닌 다른 뭔가로 배를 채우고 싶을 때. 블러디 메리 말고 이런 용도로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은 없지 않나 싶다. 불 샷(Bull Shot)이나 호크 샷(Hawk Shot)으로 불리는, 소고기 육수나 수프에 보드카를 넣어 먹는 이색 장르도 있다지만 실제로는 본 적이 없다.
블러디 메리의 특색은 소탈한 게 아닐까 싶다. 전혀 까다롭지 않다. 토마토 주스에 보드카를 타고, 레몬즙 약간에 우스터 소스와 타바스코소스를 더하면 완성되니까. 원하는 만큼 얼음도 넣고. 셀러리까지 꽂으면 꽤나 있어 보인다. 대단한 기술을 요구하지도 않고, 비율을 엄밀하게 따질 필요도 없다. 이렇게 만든 블러디 메리를 마시면 매우 편안해진다.
블러디 메리를 만들 때는 이거만 결정하면 된다. 토마토 주스와 보드카의 비율을 어떻게 할지. 보통 칵테일을 만들 때 기주가 1이라면 토닉워터나 진저에일은 3을 넣는 게 일반적인데, 블러디 메리는 그렇지 않다. 내가 가진 책들에는 토마토 주스를 2, 보드카를 1로 넣으라고 적혀 있다. 이런 분 또한 계셨다. 1대 1의 비율이어야 한다며, 심지어 토마토 주스 475ml에 보드카 475ml을 넣으라고 하신 분이. 넣으라는 라임즙 45ml까지 더하면 거의 1000ml에 육박하는 블러디 메리가 만들어진다.
헤밍웨이다. 세계 방방곡곡의 술집에 ‘나 여기 다녀갔음’이라는 표식을 남겨두시고, 온갖 술을 마시는 법에 대한 이야기 또한 많이도 남기신 그분께서는 블러디 메리도 잊지 않으셨다. 술에 대한 이야기를 좇다 보면 그분의 족적과 만나게 되고, 나는 이제 ‘헤밍웨이식’이 어떤 건지 좀 알겠다. 일단 라임은 필수다. 아주 많이. 술도 아주 많이. 단 거는 안 된다. 매우 드라이하고 매우 신맛이 나면서 매우 강할 것, 이게 헤밍웨이 스타일이다. 여기에 웃긴 말을 소금처럼 살짝 더하시는데, 이 무모한 블러디 메리를 만들 때는 주전자에 만들라고 하셨다. 적게 만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면서.
나는 아주 적게 만들었다. 토마토 주스와 보드카의 비율은 3대 1로 하고. 그래도 꽤나 강했다. 다음번에는 4대 1의 비율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블러디 메리를 마셨다. 대체 에어플레인 블러디 메리란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면서. 비행기에서 마신다는 상상을 하니 감칠맛이 올라간다고 느꼈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