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여행을 시작하기 전, 이 질문을 받고서 ‘알프스, 중립국, 시계’라고 답했다. 돌아와서 보니 이 세 단어는 스위스를 반의반도 설명하지 못하는 듯하다. 연방 의회에서도 통역 없이 3~4개 언어로 소통하는 나라. 그만큼 다양성과 개방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라. 자연 못지않게 건축과 미술 작품을 사랑하는 나라.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을 맞이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위스의 숨겨진 여행지들을 둘러보고 왔다.
◇르코르뷔지에가 부모 위해 지은 작은 집
“이 집의 1평짜리 화장실은 ‘세상에서 제일 넓은 화장실’로 불렸습니다. 넓은 공간을 누리기 위해 높은 건물이나 으리으리한 집이 필요 없다는 걸 보여주죠.”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초기 작품인 ‘빌라 르 락’. 지난달 15일 스위스 소도시 브베에 위치한 이 작은 집에서 만난 큐레이터 패트릭 모저씨가 욕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레만 호수와 알프스 설산의 풍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면적 64㎡. 19평 남짓한 작은 집이지만 길이 11m의 가로로 긴 창을 내 광활한 알프스를 집 안으로 들여놓은 듯했다.
빌라 르 락은 르코르뷔지에가 부모의 노후를 위해 지은 집.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위해 집 안의 모든 문을 없애고 세심하게 동선을 설계했다. 모저씨는 “빌라 르 락이 완공된 1923년 당시엔 주변에 세모난 지붕에 나무로 지은 집들뿐이었다”면서 “지붕 없는 네모 반듯한 모양에 전면을 콘크리트로 마감한 이 집은 미래에서 날아온 우주선 같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 세기가 흐른 뒤 이 작은 집은 ‘미니멀리즘 건축’의 시초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정받아 201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정원의 한쪽 귀퉁이엔 네모난 전망 창이 뚫린 돌담이 있다. 전망 창은 작은 액자가 되어 투명한 호수와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그림처럼 담아낸다. 전망 창 앞에는 테이블과 두 개의 벤치를 둬서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구석구석 동물들을 위한 르코르뷔지에의 작은 배려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다. 옆집과 떨어져 있는 좁은 공간엔 들고양이들이 올라가 호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작은 테라스를 설치했다. 도로와 마주한 집 담벼락엔 바깥을 보고 짖을 수 있도록 강아지를 위한 작은 창을 만들어놨다. 올해 빌라 르 락은 100주년을 맞이해 강아지와 함께 찾는 방문객들이 일명 ‘개구멍’ 앞에 서서 강아지 사진을 찍는 경연 대회를 열 예정이다.
이 밖에도 올해 빌라 르 락에서 다양한 1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빌라 르 락 홈페이지(http://www.villalelac.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 관람은 4월 1일부터 6월 25일까지 주말에만 가능하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4프랑(약 2만원)이다.
‘르 락’이 위치한 도시 브베는 찰리 채플린이 말년을 보낸 휴양지이기도 하다. 빌라 르 락에서 차를 타고 레만 호수를 따라가다 보면 비탈진 언덕에 계단식 포도밭이 펼쳐진다. 단일 포도밭으로는 스위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라보 지구의 와이너리들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중세 시대부터 와인을 재배해 온 이곳 포도밭에서 스위스 와인을 시음해볼 수도 있다. 청정한 자연에서 나온 스위스 와인은 대부분 수출하지 않고 자국에서 소비된다고 한다.
저녁 무렵, 브베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치즈 마을 그뤼에르로 향했다. 해발 810m에 인구 1800여 명이 사는 이 산골 마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뤼에르 치즈가 생산된다. 아직도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마을의 언덕 위에는 과거 그뤼에르 백작 가문이 살았던 고성(古城)이 남아있다. 13세기에 지어진 고성은 현재 약 800년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뤼에르의 퐁듀 아카데미에선 스위스 전통 복장을 입은 ‘치즈 장인’이 퐁듀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퐁듀 냄비에 화이트 와인을 붓고, 그뤼에르 치즈 200g과 바슈랭 치즈 200g을 넣는다. 치즈가 눌어붙지 않게 중불에서 잘 저어주는 것이 관건. 걸쭉한 퐁듀가 완성되면 조각 낸 빵이나 삶은 감자를 푹 찍어 먹는다. 1인당 59프랑(8만3000원). 메일(academy-fondue@gruyereshotels.ch)을 통해 예약 후 방문할 수 있다.
◇모두는 하나를,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스위스는 직접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린다. 국민투표에서 유급 휴가를 4주에서 6주로 늘리는 법안 등 포퓰리즘 법안이 번번이 부결됐을 정도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자랑한다. 스위스에서 만난 이들은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올린 민주주의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민주주의의 상징, 연방의회 의사당(분데스하우스)을 찾았다.
분데스하우스 곳곳에는 스위스 민주주의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32m 높이의 천장에는 스위스 연방을 이루는 26주(칸톤)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스위스는 미국처럼 26주로 분할돼 있으며, ‘칸톤’이라 불리는 각 지역은 독자적 입법·사법·행정권을 갖는다. 천장에는 라틴어로 스위스의 국가 슬로건인 라틴어 문구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가 적혀 있다.
그 앞을 지키는 네 개의 용병 동상은 스위스의 4개 국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망슈어)를 상징한다. 3개 국어는 기본인 스위스답게 연방 의회에서도 의원들은 각자 편한 언어로 말하는데, 통역이 따로 제공되지 않는다고 한다.
1894년 짓기 시작해 1902년 완공된 의사당 건축에는 173곳의 회사, 33명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건물에 사용된 돌의 95%는 스위스산인데 이마저도 다양성을 위해 스위스 전역에서 돌들을 구해왔다고 한다. 의회 회기 중에는 의원들이 토론하거나 투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비회기에 온라인 예약을 통해 무료로 가이드 투어를 들을 수 있다.
◇스위스의 문화 수도, 바젤
베른을 떠나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바젤로 향했다. 바젤에는 약 40개의 미술관·박물관이 있어 ‘스위스의 문화 수도’로도 불린다. 스위스 출신으로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받은 페터 춤토르,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뫼롱(헤르조그 앤 드 뫼롱) 모두 바젤 출신이기도 하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등을 설계한 헤르조그와 드 뫼롱은 바젤에서 태어나고 자란 데다 바젤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도시 곳곳에 건축물을 남겼다. 헤르조그 앤 드 뫼롱 사무소의 건축가들과 함께 바젤 구시가를 한 바퀴 돌았다.
투어는 1019년부터 1500년까지 무려 500년에 걸쳐 지어진 바젤 대성당에서 시작됐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이자, 바젤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성당이 있는 언덕을 오르면 뒤편으로 라인강과 바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독일·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양국에서 국경을 넘어 바젤로 출퇴근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성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1589년 설립된 뮌스터플라츠 김나지움이 있다. 종교 개혁 시기 라틴어 학교부터 시작해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학교로 쓰였던 건물로 19세기 후반엔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대광장을 지나면 유럽 최고 수준의 음향 시설을 자랑하는 슈타트카지노홀이 보인다. 지금은 바젤 심포니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을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이 리모델링해 2년 전 재개관했다. 토마스 콥 슈타트 카지노홀 디렉터는 “이름은 카지노지만 도박과는 관계없다”면서 웃었다. “카지노는 ‘작은 집’이란 이탈리아어로 예전엔 곡을 연주하거나 책을 읽는 문화 공간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18세기 들어 카지노에 도박장들이 들어서면서 의미가 바뀌었다.”
슈타트카지노홀은 밖에서 보면 정부 기관 건물처럼 평범해 보인다. 내부는 샹들리에와 자줏빛 벨벳으로 장식돼 있지만, 그마저도 유럽의 다른 콘서트홀에 비해 단정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건축가 톨스텐 켐퍼는 “스위스는 프로테스탄트 문화권에 속했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전부 악마의 것으로 여겼다”면서 “스위스에 미니멀리즘 건축이 자리 잡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바젤 교외에 있는 바이엘러 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다. ‘아트 바젤’을 세계 최대 아트 페어로 키우며, 바젤을 국제적인 예술 도시로 끌어올린 스위스의 화상(畵商) 에른스트 바이엘러의 소장품을 모아놓았다.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이 박물관은 연못이 있는 작은 정원과 언덕 경사에 맞춰 낮게 깔린 건물이 어우러지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중 하나로도 꼽힌다. 5월 1일까지 피카소 사망 50주기를 기리기 위해 말년의 작품들을 전시한다. 연중무휴. 입장료는 성인 기준 25프랑(약 3만5000원)이다.
[“쓰레기로 만든 가방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요?”]
친환경 기업 ‘프라이탁’ 공장 투어
일주일간 스위스를 돌아다니면서 유일하게 한국인 여행객을 만난 곳이 있다. 취리히에 있는 ‘프라이탁’의 플래그십 스토어(단독 대형 매장)다. 스위스 친환경 기업의 대표 주자인 ‘프라이탁’은 5~8년간 쓰고 버려지는 화물 트럭의 방수천을 재활용한 가방으로 혁신을 일으켰다. ‘프라이탁’의 가방은 언뜻 보기에 낡고 투박해 보이지만,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 생산 제품이 아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디자인으로 한국 젊은 층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프라이탁은 매월 첫째 수요일 오후 2시에 공장 투어를 진행한다. 지난달 13일(현지 시각) 취리히에 있는 프라이탁 공장에 들어서자 트럭 방수천에서 나는 화학약품 냄새가 훅 끼쳤다. 공장 안에는 유럽 전역에서 공수한 형형색색의 방수천이 쌓여 있었다. 그 뒤에선 5~6명의 직원이 바쁘게 트럭 운송 업체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들은 메일·전화로 연간 약 350t의 방수포를 사들인다. 때로는 고속도로와 화물차 휴게소를 누비며 화려한 트럭 방수천을 탐색하기도 한다.
방수포가 도착하면 직원들이 평상 위에 더러워진 트럭 덮개를 펼쳐놓고 최대 60kg의 무거운 천과 씨름하며 금속이나 벨트, 각종 이물질을 제거한다. 엘리자베스 이세네거 프라이탁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쓰레기로 만든 가방이 왜 이렇게 비싸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트럭 방수천 한 장에 최대 200~300유로를 내는 데다, 트럭 방수천을 세탁하고 재단하는 대부분의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수천은 세탁기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재단돼 세탁실로 향한다. 매일 약 1만5000L의 물이 사용되는데 지하 저장소에 받아둔 빗물을 사용해 연간 400만L를 절약한다.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장 역시 자국에 짓되, 봉제 작업만 포르투갈·체코 등의 국가에 맡긴다.
프라이탁의 목표는 한번 재활용하고 버릴 제품이 아니라, 영원히 재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이세네거 프라이탁 CMO는 “스키 부츠로 휴대전화 케이스를 만들고, 재활용 불가능한 에어백으로 가방을 만드는 등 계속해서 새로운 소재를 찾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