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중 ‘마법사의 제자’의 한 장면. 마법에 걸린 빗자루가 집 안이 물바다가 될 때까지 물을 퍼 날라 미키마우스가 곤경에 처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마법사의 연구실. 제자는 스승님의 마법을 배우고 싶다. 하지만 마법사는 허드렛일만 시키고 있다. 제자는 오늘도 물동이 두 개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물을 긷는다. 뜻밖의 기회가 왔다. 마법사가 모자를 벗어놓고 자러 간 것이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마법사의 모자를 쓴 제자는 어설프게 아는 주문을 외워 빗자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두 팔을 만들어준다.

제자의 목적은 뻔하다. 우물물을 퍼서 집 안으로 나르는 지루하고 고된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빗자루는 그 일을 척척 해낸다. 그런데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문제가 생겼다. 빗자루가 도저히 멈추지 않는 것이다. 당황한 제자는 도끼를 들어 빗자루를 여러 조각으로 쪼개버리지만, 그러자 조각들이 모두 빗자루로 변하더니 더욱 열심히 물을 퍼 나르면서 마법사의 연구실은 물바다가 되어버리고 만다. 1940년 발표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에 수록된 ‘마법사의 제자’ 내용이다.

쩔쩔매는 미키 마우스의 귀여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왜 마법사의 제자는 곤경에 빠진 걸까? 마법사의 제자가 빗자루를 멈추는 주문을 까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마법으로 만든 빗자루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 일꾼이었다면 적당한 시점에 알아서 물을 그만 퍼 왔을 테니 말이다.

요컨대 빗자루는 ‘눈치껏’ ‘적당히’ 일할 줄 모르는 존재다. 명령만을 고집하고 다른 것은 무시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눈치 보기, 분위기 파악하기, 이 일 마무리하고 다른 일 하기 등을 할 줄 모른다. AI(인공지능)가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진 존재지만, 지팡이 역시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로봇에는 쉽다. 반면 사람에게 쉬운 일을 로봇이 잘하도록 만드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어렵다. 1980년대 중반, 컴퓨터 성능이 폭발적으로 좋아지면서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기대치가 커지던 무렵, 선구적인 로봇 공학자 한스 모라벡이 내놓은 역설적 통찰이었다. 그는 1988년 출간한 <마음의 아이들>을 통해 그 역설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능 검사나 서양 장기에서 어른 수준 성능을 발휘하는 컴퓨터를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지각이나 이동 능력 면에서 한 살짜리 아기만 한 능력을 갖춘 컴퓨터를 만드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떠올려 보자. 결과는 4대1로 컴퓨터의 승리였다. 하지만 알파고는 ‘직접’ 바둑돌을 놓을 수 없었다. 컴퓨터로 계산된 결과에 따라 사람이 대신 돌을 놓아주는 식으로 대국이 진행된 것이다. 이세돌 9단을 이길 정도로 굉장한 바둑 실력을 지닌 컴퓨터인데, 네 살 아이도 할 수 있는 바둑돌 놓기는 못해서 사람 손을 빌려야 했다. 2016년 3월, 우리는 컴퓨터와 딥 러닝의 승리뿐 아니라 모라벡의 역설도 실시간으로 목격한 셈이다.

모라벡의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능력의 범용성이다. 사람은 다양한 환경에서 수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다.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으로 운전사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있지만, 잘 생각해 보자. 운전은 자동차를 모는 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동차 와이퍼에 낀 낙엽을 떼어내고 타이어 틈에 끼인 돌을 빼내기도 해야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없이 간단하지만 저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로봇을 만들려면 50년은 더 필요하다. 차를 모는 행위는 컴퓨터가 대체할 수 있어도, ‘운전’에 포함되는 모든 노동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역설은 디지털 시대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18세기 산업혁명 시절부터 관찰된 바다.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기계가 사람 대신 솜에서 실을 뽑아내고, 직물을 짜며, 곡식의 낟알을 털어내고 있었다. 많은 이는 근심 섞인 비명을 질렀다. 기계가 사람 일자리를 모두 빼앗아 간다! 이제 우리는 모두 실업자가 될 것이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기계가 제대로 일하게 하려면 사람이 더 똑똑하게 많은 것을 신경 써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는 늘어났고 인류는 더욱 풍족해졌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일부를 기계가 잘하게 됨으로써 기계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졌다. 사람은 기계가 못하는 일, 혹은 기계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개척됐다.

챗GPT의 출현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학생들이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리포트를 쓰는 데 악용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이순신 장군의 라이트닝 볼트’ 같은 엉터리 질문을 하면 내놓는 이상한 답변을 즐기며 ‘뭐야, 별거 아니네’라고 치부해버리는 이도 종종 눈에 띈다. 하지만 챗GPT가 수많은 일자리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공포심만은 대부분의 반응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런 우려는 단기적으로 옳다. 산업혁명 당시 그랬듯 어떤 일자리는 빨리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옳지 않다.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 이행 과정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노동 개혁이 필수적이다. 출근 도장 찍고 연차만 쌓으면 생산성과 무관하게 월급이 올라가는 일자리는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것을 지키려는 투쟁은 산업혁명 당시 방적기를 부수며 저항하던 러다이트 운동과 다를 바 없다. 인공지능 충격은 유연 안정성 노동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의 제자’로 돌아가 보자. 빗자루가 할 줄 아는 일은 우물물을 퍼 오는 것뿐이다. 그 모습을 본 미키는 긴장을 풀고 잠이 들어 스승님 같은 대마법사가 된 꿈을 꾼다. 하지만 눈을 뜨니 현실은 물바다가 되어 있다. 빗자루를 시종으로 부리려면 빗자루가 해야 할 일을 지정하고, 필요한 만큼만 일을 시키고, 일이 끝나면 생명력을 빼앗아야 했던 것이다. 로봇에, AI에, 빗자루에 일을 시키는 것도 일이다. 결국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18세기 말 괴테가 쓴 시를 바탕으로 20세기 사람 월트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21세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