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창궐하던 2년 전, 서울 청량리역과 경북 안동역을 잇는 KTX이음이 개통하면서 ‘뜻밖의 핫플’로 떠오른 도시는 소도시 영주다. 단체 관광이 부담스럽던 시기에 부석사·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 등 주요 명소를 편히 오가는 관광 택시까지 더해지며 당일치기 여행지로 급부상했다. 올봄엔 관광 택시 50% 요금 할인, 6시간 코스 신설 소식까지 더해졌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놓고 영주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다.
◇반값 할인 ‘영주 관광 택시’ 직접 타보니
영주로 가는 KTX이음은 서울 청량리역에서 평일 하루 일곱 차례, 주말 여덟 차례 출발한다. 오전 9시 안동행 열차에 오르면 1시간 40여 분 만인 오전 10시 42분쯤 영주역에 도착한다. 낯선 도시일수록 길 헤매기 쉬운 법. 지역 빠꼼이들이 운전하는 관광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최소 5일 전 영주시 홈페이지(http://www.yeongju.go.kr)에서 관광 택시 탑승을 신청한 후 접수가 완료되면 여행 당일 영주시에서 4시간(8만원), 6시간(12만원) 코스에 대한 요금을 50% 할인해준다. 할인을 적용할 경우 이용자 부담금은 각각 4만원, 6만원. 관광 택시 ‘6시간 코스’를 사전 신청하니 여행 전날 영주시로부터 관광 택시 기사 배정 안내 문자가 왔다.
역사(驛舍)를 나와 바로 앞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관광 택시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데, 관광 택시 한번 탈란껴?” 택시 기사 이정태(60)씨가 경상도 사투리로 인사를 건넸다. 부석면 출신 토박이이자 32년 경력 운전사인 이씨에게 원하는 코스를 얘기하니 “영주 시내에서도 비교적 거리가 있는 부석사부터 다녀오는 게 좋겠다”며 시동을 걸었다.
영주에서 부석사 방면으로 향하는 931번 지방도 주변은 아직 초봄이라 볼거리는 적지만, 이동하는 동안 이씨는 차창 너머 풍경에 대해 ‘깨알 해설’을 곁들였다. “저그 저, ‘백로도래지전망대’는 특히 해 질 녘에 보면 하얀 백로들이 나무에 내려앉아 나무가 아주 뽀오~얗게 보이기도 해요. 저 나무는 사시사철 말라 있는데 백로 배설물 때문에 나무가 통 못 자란다카데요.” ‘여우 로드킬 주의’ 안내판을 보고는 “영주엔 토종 여우인 붉은 여우가 서식하는데 영주 사람들은 ‘불여시’라 부른다”며 웃었다. 부석사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됐다.
◇영주 여행의 시작 ‘부석사’
영주의 북쪽 부석면 봉황산(822m) 기슭에 자리한 천년 고찰 부석사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이름을 올린 영주 대표 사찰이다. 혜곡 최순우 선생의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 이미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초행이라면 부석사 한 곳만 제대로 돌아봐도 여행의 절반은 성공한 셈. 봄 햇살을 만끽하며 500m 정도 걸어 올라가면 사천왕상을 거쳐 2층 누각부터 만난다.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는 ‘부석사(浮石寺)’ 현판 아래 ‘안양문(安養門)’을 지나면 두 국보를 만난다.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과 통일신라 시대 석공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석등이다. 부석사의 중심 법당인 무량수(無量壽)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무량수전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현종 7년에 고쳐 지었으며 공민왕 7년 외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서 우왕 2년에 다시 짓고 조선 광해군 3년에 수리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해체해 다시 수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무량수전 안에는 또 다른 국보 소조여래좌상이 있다. 2.78m 높이 거대 좌상이다.
이제 부석(浮石)을 만날 차례. 무량수전 왼편 산 절벽 아래 있는 너럭바위를 자세히 보면 한자로 ‘浮石’이 새겨져 있다. 당나라 유학 시절 의상을 흠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이 되어 의상을 방해했던 태백산의 무리를 물리치고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전설이 담긴 돌이다. 무량수전 오른편 또 다른 보물인 삼층석탑에 서면 무량수전의 처마와 안양루, 산의 능선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삼층석탑 뒤편 고려시대 지어진 국보 조사당까지 둘러보고 내려오면 1~2시간이 훌쩍 지난다.
볕이 좋으니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코스에 추가할 만한 ‘여우생태관찰원’ 선비체험마을인 ‘선비세상’ 등이 차창 밖으로 지나갔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면 조선 선조 때 심었다는 낙락장송 ‘학자수(學者樹)’가 먼저 나와 반긴다. 학자수림을 품은 둘레길은 피톤치드 마시며 산책하기 그만이다.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경렴정’에 서면 죽계천 물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는 사당으로 세웠다가 유생들을 교육하며 ‘백운동 서원’이라 불렸다. 명종 때 풍기 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서원이라 사액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된 곳으로 역사상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 기관이다. 내부엔 강학당과 함께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장서각, 학구재와 지락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강학당 안에는 명종이 친필로 하사했다는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이 볼거리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걷기
소수서원을 나서 순흥면에서 가장 오래된 묵집이라는 ‘순흥 전통 묵집’에 들러 요기를 한 뒤 문수면 무섬마을로 향했다. 이씨는 “과거 여행객들은 영주역에서 택시를 타면 대부분 ‘부석사부터 가자’ 했지만, 요즘은 무섬마을을 찾는 이들이 못지않게 많다”고 했다.
무섬마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물돌이 마을’ 중 하나로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만나 마을을 휘감아 도는 형상이 마치 ‘물 위의 섬’ 같다고 해서 ‘무섬’이라 불린다.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는 여러 차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을 만큼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한다. 한 사람이 걸을 만한 좁은 폭의 외나무다리 아래로는 내성천이 흐른다. 날이 가문 요즘 같은 땐 물이 없어 강의 하얀 모래톱이 드넓게 펼쳐진다. 권순옥(59) 문화관광해설사는 “여름 장마철에 비가 와서 천의 수위가 50~60㎝쯤 올라오면 물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하게 외나무다리를 건널 수 있는데, 실제로 빠지는 사람도 허다하다”며 “그나마 봄에는 모래사장이라서 남녀노소 부담 없이 건넌다”고 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400년 전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배산임수 명당으로 꼽히는 무섬마을 안쪽엔 입향조인 반남 박씨 박수가 병자호란 후 은둔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자 1666년 건립했다는 ‘만죽재’가 있고, 100년 후 그의 증손서인 선성 김씨 김대가 자리 잡았다는 터 등이 남아 있다. 추운 지방에 많이 분포돼 있는 ‘까치구멍집’과 지역 항일의 중심이었던 ‘아도서숙’ 등도 살펴볼 만하다. 권 해설사는 “무섬마을은 전국 단일 마을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라며 “항일 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5명이고, 서훈을 신청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무섬마을을 빠져나오니 어느덧 오후 3시. 마을에서 영주 시내까지는 차로 20여 분 거리다. 가는 방향엔 식물원 카페 사느레정원이 있다. 카페와 이어진 열대우림 같은 1000㎡(300여 평) 규모의 식물원 곳곳에 ‘숲 속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잔 하며 숨 고르기 좋은 곳이다. “’사느레’란 이름은 카페가 위치한 사내(沙川) 마을에서 따온 것”이라는 게 김준년(63) 대표의 말. 여름 귤인 ‘하귤’부터 바나나, 파파야 등 ‘관상용 열매’를 보고 나들이객 김이설(24)씨는 “별안간 여름나라에 온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근대역사문화거리, 관사골 벽화마을
영주시내 구도심과 신도시 사이엔 서천이 흐른다. 서천가를 따라 이어진 벚나무는 아직 별 기별이 없지만, 이씨는 “벚꽃 필 땐 일부러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영주제일교회’ ‘풍국정미소’ ‘영광이발관’ 등 근대 등록문화재들이 모여 있는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는 구도심의 북쪽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광복로와 관사골이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그중 영광이발관은 ‘살아있는 문화재’로 불리는 이종수(79)씨가 지키는 곳이다. 전신인 1930년대 ‘국제이발관’부터 따지면 주인이 고작 세 번 바뀌었을 뿐 90년 역사를 자랑한다. 반세기 넘게 이발사로 사는 이종수씨의 이발관 내부는 시간이 멈춘 듯하다. 이씨는 “이제 이런 옛날 이발관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지만, 이발관이라는 곳은 상투를 잘라야만 했던 근대의 시작점이라는 것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용업의 생활사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해 늘 문을 열어두고 있다”고 했다. 빛바랜 이발사 면허증 아래 거울엔 ‘청력이 좋지 않아서 실수하더라도 이해 바랍니다’라는 이씨의 손 글씨가 붙어 있었다.
영주시내에선 관광 택시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부담 없다. 영광이발관에서 관사골까지는 걸어서 10분, 후생시장까지는 걸어서 5분, 영주역까지는 대중교통으로 20여 분 안팎이다. 든든히 저녁을 먹고 서울로 향할 계획이면 후생시장이나 영주숯불구이거리로, 노을을 감상하며 달콤한 디저트에 차를 곁들이고 싶다면 관사골로 향한다. 후생시장 부근 영주 사람들 사이에서 ‘오백빵집’이라고 불리는 선비골 오백빵집도 지나칠 수 없다. 고물가 시대 단돈 500원짜리 빵이 존재한다.
고청산을 따라 이어진 관사골은 1935년 일제 강점기 철도직원들의 관사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후 1973년 영주역 이전으로 쇠락했다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달동네의 감성을 간직한 골목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추억의 만화 ‘은하철도 999′ 등 벽화로 장식한 관사골벽화마을의 골목을 따라 고청산 ‘부용공원’으로 올라가면 영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부용대가 기다린다. 조선 명종 때 풍기군수였던 이황도 반했다는 영주 최고 전망대다. 부용대 가까이 노을과 야경 전망 명소로 손꼽히는 복합문화공간 ‘녹스고지’와 카페 ‘브리즈’가 있다. 녹스고지에서 영주역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택시 기사 이정태씨가 귀띔한 ‘영주 로또 명당집’엔 들르지 못하고 오후 7시 21분에 출발하는 KTX에 올랐다.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켰다.
[ 부석태 청국장을 아십니까? 기지떡도 있습니다! ]
택시기사들이 꼽는 영주 맛집
영주시 관광 택시를 타면 맛집 탐방도 수월하다. 구석구석 ‘가성비’ 맛집을 꿰뚫고 있는 ‘기사 추천 식당’ 정보는 물론 어딜 가든 주차 걱정 없이 식사할 수 있다.
부석사 아래엔 ‘자미가’ ‘부석사식당’ ‘종점식당’ 등이 모여 있다. 청국장, 생선구이를 비롯해 산채비빔밥 등 부담 없는 메뉴를 내놓는다. 택시 기사 이정태씨는 “종점식당은 이 구역 가장 오래된 집, 자미가는 청국장이 맛있는 집, 부석사식당은 메뉴 선택 폭이 넓어 (자신이) 즐겨 찾는 집”이라고 귀띔했다. 그중 자미가는 영주 지역에서 재배해온 토종 콩인 부석태로 띄운 청국장을 맛볼 수 있다. 기존 청국장 콩보다 굵은 것이 특징이다.
조암동의 너른마당도 부석태 청국장으로 유명하다. 한국문화예술명인협회로부터 부석태·청국장 조리 명인으로 인정받은 주인 김정희씨가 개발한 청국장과 청국장 샐러드 등을 맛볼 수 있다. 나물과 도토리묵, 생선 등을 한상 가득 곁들여내는 청국장정식(9000원)은 점심 땐 예약 없이 식사가 가능하지만, 저녁엔 예약 후 방문해야 한다.
50년 전통의 순흥전통묵집도 빼놓을 수 없다. 관광 택시를 이용할 경우 조리 시간이 빨라 후루룩 먹고 나올 수 있다. 메뉴는 전통묵밥(9000원) 하나다. 차림표엔 ‘죄송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매일 전통 방식 그대로 묵을 만들어 쓴다. 두부처럼 연한 식감으로 곁들여내는 김치, 황태무침과 잘 어울린다.
영주시내는 요즘 젊은층의 ‘먹방 투어’가 유행이다. 매운 떡볶이집 영주랜떡을 비롯해 쫄면 맛집 나드리 분식, 중앙분식 등이 포진해 있다. 콩고물 대신 부드러운 카스텔라를 묻혀내는 태극당의 ‘카스텔라 인절미’는 줄 서서 사야 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부근에 있는 선비골 오백빵집은 찹쌀 도넛을 비롯해 소보로, 크림빵 등이 500원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많이 찾아 가격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주인장 말이다. 영주 사과가 아삭아삭 씹히는 영주사과빵(2000원), 영주 인삼을 넣은 영주인삼빵(2000)도 기념 선물로 인기다. 가까이 순흥기지떡은 전국 택배 맛집이다. 지역에 따라 ‘증편’ ‘기정떡’ ‘술떡’으로 불리는 떡인데 영주에선 ‘기지떡’이라 부른다. 술향 강하지 않고 폭신하면서도 쫄깃해 씹는 맛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