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인생이 뭔지 모르겠네, 날아갈 기러기가 눈밭을 거니는 것 같아/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지만, 날아가고 나면 기러기 행방을 모르네/ 노승께서 죽고 나면 새로운 탑이 서지만, 낡은 벽에서 옛 글씨 볼 길 없네/ 어려웠던 지난날을 기억하는가, 길은 멀고 사람은 지쳤는데 나귀는 절뚝이며 울어댔지(人生到處知何似,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還記否,路長人困蹇驢嘶).” –소식 ‘화자유면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면지의 옛일에 대한 자유의 시에 대한 화답)’
한 작품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할까? 물론 이 질문에 일정한 답은 없다. 작가에 따라, 작품에 따라, 독자에 따라 중요한 문장은 따로 있다. 그러나 한 작품의 마지막 문장만큼은 그 어떤 경우에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마지막 문장은 그 작품이 독자와 이별하는 방식이며, 그러기에 그 문장은 독자의 향후 기억을 좌우할 것이다. 처음 만나는 순간만큼이나 이별의 순간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뿐이랴. 마지막 문장은 작품 전체의 흐름과 의미를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맨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는 거다. “지금까지 내용은 다 제 꿈 이야기였어요.” 이 마지막 문장으로 말미암아 앞 내용의 의미가 확 바뀐다.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은 22세기에 일어난 것입니다”와 같은 마지막 문장은 어떤가. 이 문장으로 말미암아 앞의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이 된다.
인생도 그렇지 않던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이 중요하다. 온갖 악행을 거듭하던 사람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반성하면, 그는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개한 사람으로 기억되곤 한다. 온갖 선행을 거듭하던 사람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악행을 하면, 그는 많은 선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점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곤 한다. 인생이 어려운 것은, 나이가 들며 총기가 흐려진 끝에 결국 완고한 노인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잘 장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인생의 말년에 정신 집중이 필요하듯이, 작품의 마지막에도 정신 집중이 필요하다.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의 시도 마찬가지다. ‘화자유면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면지의 옛일에 대한 자유의 시에 대한 화답)라는 시는 인생이 도대체 뭔지 잘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한다. “가는 곳마다 인생이 뭔지 모르겠네.” ‘곳마다’라는 표현에서 인생이 이곳저곳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인생은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로 흘러간단 말인가. 지향점을 모르는 인생은 눈밭을 거니는 기러기에 비유된다. 기러기는 결국 떠나게 되어 있는 철새인데, 정확히 어디로 떠나는지는 분명치 않다. “날아가고 나면 기러기 행방을 모르네.”
결국 떠나버릴 기러기도 머문 곳에 흔적을 남기기는 한다. 눈밭에 기러기 발자국이 낭자하다. 그러나 그 발자국이 기러기의 행방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기웃대는 곳마다 흔적은 남았지만, 도대체 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이란 말인가. 떠난 기러기는 말이 없고, 남은 것은 눈밭의 발자국뿐. 눈이 녹으면 그곳은 진흙 천지. 산다는 것은 진흙탕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마저도 조만간 흩어지리니, 시인은 흔적이 남아 있을 때 노래해야 한다.
기러기와 진흙탕의 비유는 노승에게 이어진다. 기러기가 떠나듯이, 도를 추구하는 승려도 결국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떠난 노승을 기억하기 위해 사리탑이 서지만, 세월이 지나면 낡은 벽 허물어져 그가 남긴 글씨조차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 결국 사라져 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여기까지는 인생이 오리무중이라는 것, 그런 가운데 사람은 무엇인가 추구하고 흔적을 남긴다는 것, 그 흔적마저도 결국 시간의 풍화를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읽는 독자의 마음은 허무로 물들어 간다. 마지막 문장마저도 가차 없다. 지친 나귀와 고단한 사람의 이미지로 끝을 맺는다. “나귀는 절뚝이며 울어댔지.” 이렇게 독해를 마무리한다면, ‘화자유면지회구’는 인생의 덧없음과 고단함을 노래한 하고많은 작품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 담긴 뜻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려웠던 지난날을 기억하는가”로 시작하는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뜻밖의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아쉽게도 모든 것이 시간의 풍화 속으로 사라진다고 독자를 유도해 놓고서, 아쉬워하는 그 과거는 사실 고단한 시간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몽롱한 회상 속에서 과거의 나날은 장밋빛으로 채색될지 모르지만, 실제는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다들 젊은이를 부러워하고,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지나간 호시절을 추억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녕 그 시절이 좋기만 했나. 돌이켜보면 미숙함과 고단함이 점철된 시절이 아니었던가. “어려웠던 지난날을 기억하는가.” 지나가 버린 것이 어려웠던 나날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것이다. 시간의 풍화라고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인생에 정해진 지향점은 없다. 기러기가 날아가듯 사람이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눈 위의 발자국이 남듯 죽은 이의 자취는 남겠지만, 그 자취마저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어제 내린 눈도 결국 녹고, 그 눈 위의 발자국도 사라지고, 용맹정진하던 고승도 죽고, 아름다운 글씨로 장식되었던 벽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그러나 지난날을 미화할 일은 아니다. 과거는 가끔 아름다웠으나 대체로 힘들었다. 그러니 다 사라져간다는 사실이 꼭 슬프고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인생의 덧없음이 갖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껴안는 아이러니가 바로 ‘화자유면지회구’의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다. 이 최후의 아이러니를 그냥 지나치면, ‘화자유면지회구’는 그저 비관적 한탄을 담은 범용한 시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