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한 장면.

“뚱뚱하다는 단어를 작품에서 지운다고 우리 아이들이 그 단어를 모르고 자랄까요?”

초등학생 딸을 둔 엄마 심희재(45)씨는 요즘 영국발 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세기의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영국 동화작가 로알드 달(1916~1990)의 작품에서 ‘모욕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표현들을 출판사가 삭제하거나 고쳐서 재출간했다는 것이다. ‘뚱뚱한(fat)’이란 단어를 ‘거대한(enormous)’으로 고치고, 인종차별을 떠올리는 색상이라며 ‘검은(black)’ ‘하얀(white)’ 등의 수식어를 지우는 식이다. 심씨는 “로알드 달을 좋아해서 아이에게도 읽히고 있는데 작품을 함부로 바꿔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며 “작가가 선택한 단어 하나까지 포함해 모두 그의 작품이고 시대를 반영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으로 유명한 로알드 달은 전 세계 독자의 사랑을 받은 아동문학 작가다. 1990년 사망하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2억5000만부 이상 팔렸다. 영화, 뮤지컬로도 다수 제작돼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반유대주의와 여성 혐오, 인종차별 등 문제로 비난을 받아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아동문학 전문출판사 퍼핀(Puffin)과 저작권 관리 업체인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는 우리 시대 독자들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 눈높이에 맞게 그의 작품에서 신체 묘사, 정신 건강, 젠더, 인종 등과 관련한 수백가지 표현을 수정했다.

‘마틸다’에서는 악역 트런치불 선생을 표현하는 ‘가장 무서운 여성(female)’을 생물학적 여성을 뜻하는 ‘피메일’ 대신 ‘우먼(woman)’으로 대체했다. 주인공 마틸다가 즐겨 읽는 책은 남성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에서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로 바뀌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소인족 움파룸파를 수식하는 형용사가 ‘아주 작은(tiny)’에서 ‘작은(small)’으로, 성별도 ‘남자(men)’에서 중성적 표현인 ‘사람(people)’으로 바뀌었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에선 주인공 미스터 폭스의 아들들을 딸들로 바꿨다. ‘이중 턱(double chin)’처럼 신체를 묘사하는 단어, 작가가 즐겨 사용한 ‘미친(crazy·mad)’이란 수식어는 삭제됐다. 원작에 없던 문장이 추가되기도 했다. ‘더 위치스’에선 “마녀들이 가발을 쓰는 이유는 대머리이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여자들이 가발을 쓰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고,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라는 설명이 붙었다.

각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설 ‘악마의 시’ 작가 살만 루슈디는 “로알드 달이 천사는 아니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검열”이라며 “출판사와 저작권 관리 업체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펜 아메리카’의 수잔 노셀 대표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표현을 지우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힘을 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했다. 총리까지 나섰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실 대변인은 “픽션(허구) 작업은 보존돼야 하며 에어브러시로 지워버려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놨다. 수정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애슐리 에스퀘다는 트위터에 “시간과 함께 진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다른 이들이 함께 갇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지겹다”고 썼다. 논란이 계속되자 출판사는 개정판과 함께 원본도 계속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출판계에선 “이제 시작일 뿐 문제작들을 수정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1908~1964)의 소설 ‘007 시리즈’도 올해 봄 개정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저작권을 가진 이언 플레밍 출판사가 007 시리즈 첫 작품인 ‘카지노 로열’ 출간 70주년을 맞아 인종차별적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시리즈 전 작품의 개정판을 4월 발간한다고 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작가가 직접 개정판을 낸다면 모르겠지만, 과거에 생산된 콘텐츠를 지금의 잣대에서 올바르지 않다고 수정하는 건 역사를 바꿔버리는 행위”라며 “문제가 있다면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비판하면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