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노인들이 큰 힘을 갖던 시대가 있었다. 오래 사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때, 다가올 재난을 예측하고, 위기가 닥쳤을 때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한 이들이 바로 노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사회에서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을 백과사전 한 권이 사라졌다고 얘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시나브로 쇠퇴했다. 태풍이 오는 것은 기상청이 말해주고, 전염병이 돌면 정부가 앞장서 방역 대책을 내놓는데, 노인들이 할 일이 줄어드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문학적 규모의 범죄를 저지른 이가 단죄를 받기는커녕, 국민 세금으로 만든 요새에 숨어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해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SF영화에서처럼 해당 범죄자의 뇌를 스캔해 그 안에 저장된 정보를 끄집어내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게 불가능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노인들의 지혜. 오랜 기간 정치를 해왔던 원로들이라면 그 범인을 어떻게 처리할지 해법을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일러스트=유현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을 닷새 앞둔 지난 2월 22일, 민주당이 상임고문단을 불러 의견을 물은 건 정치 원로들의 지혜를 빌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해결하려는 마음에서였으리라. 물론 원로라고 해서 다 옳은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해찬 전 대표로, 그는 아직도 공천에 욕심이 있나 의심이 갈 만큼 이렇게 말했다. “(검찰 수사가) 이재명 당대표를 잡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걸 계기로 당을 흔들어 당을 깨려고 하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 이런 시기에 이재명 대표님께서 당을 잘 이렇게 이끌어 주셔서 당이 큰 잡음 없이 잘 대응하고 있는 것 같다. (체포동의안이) 압도적 다수로 부결이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한 분도 있었다. 권노갑 상임고문은 “이번에는 우리가 뭉쳐서 의원총회 결정대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자”고 전제한 뒤, 하고픈 말을 했다. “다음번에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임해서 민주당의 역사를 잇는 당대표로서, 책임 있는 하나의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선당후사’의 정신을 발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체포동의안 뒤에 숨지 말고 판사 앞에 나가서 심판을 받으라는 얘기. 김대중 전 대통령 때부터 민주당 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법꾸라지 한 명 때문에 당 전체가 나락으로 빠지는 게 속상했던 모양이다.

쓴소리를 한 원로는 또 있다. 유인태 전 의원이 라디오에 나가 한 말을 들어보자. 그는 “검찰이 너무 무도하다”고 전제한 뒤 이 대표의 행보를 비판한다. “이재명 대표가 앞으로 정치를 하려면 좀 감동적인 모습이 있어야 되는데, 대선에서 지고 인천에 보궐선거 나가고 한 모양들이 좀 꾀죄죄해 보이잖아요.” “그동안 불체포 특권 내려놓겠다고 여러 번 공약도 했으면, (영장) 실질심사 한번 받지.” 이는 곧 국민의 뜻이기도 하다. 여론조사 결과 이재명의 구속 수사에 찬성하는 이가 49%로 반대(41%)보다 많았고, 불체포특권을 없애야 한다는 이는 57%로, 반대(27%)를 훨씬 능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본인이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체포동의안 부결 후 이재명 대표는 모 방송사 논설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단다. “추가 영장이 오더라도 나갈 생각이 없고, 사퇴할 의사도 1도 없다. 그리고 심지어 옥중 공천도 불사하겠다.” 물론 민주당은 이 대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그간의 행보를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더 안 좋은 것은 이런 위기의 순간에 천지 분간 못 하는 초선들이 주로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조국 수호에 앞장선 덕에 국회의원이 됐지만, 언제부터인가 이재명 수호를 하고 있는 김남국 의원을 보자. 그는 비명계 의원들이 이번 체포동의안 가결을 위해 “조직적으로 표를 만들었”고, 이는 “같이 싸우는 동지를 절벽에서 밀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비명계 의원이 이재명 앞에서 예수의 순교를 다룬 마태복음 27장을 읽은 행위를 “모욕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규정하는 김남국에게 위기 탈출 해법을 기대하는 것은 호주에서 이모 찾는 격이리라. 김남국의 라이벌이라 할 김용민 의원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배신”이라며 “체포동의안이 또 오면 민주당이 다 투표하지 않는 보이콧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수완박 같은 악법을 단독 통과시킬 때는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다 하나의 헌법기관이니 존중하라’던 이들이 내놓은 해법치곤 너무 졸렬한 것 아닌가.

소위 ‘개딸’들의 난동도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원인이다. 체포동의안 파문 직후 개딸들은 반란 표를 던진 이들을 색출한답시고 비명계 의원들에게 문자 테러를 했고, ‘살생부 명단’을 만들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윤석열 대통령을 검찰총장에 임명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그렇게 물고 빨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가짜 뉴스 생산자 김어준마저 배신자로 낙인찍더니, 급기야 대선 패배 후 미국에서 은둔 중인 이낙연 전 총리를 출당시키자는 청원을 내서 수만 명이 찬성한다. 경선 과정에서 대장동을 터뜨려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었다는 것. 하지만 도덕성 검증이 중요한 대선판에서 대장동 같은 범죄를 제보받고도 모른 체하는 건 도리가 아닌 데다, 당시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이 윤석열 게이트’라고 우기지 않았던가.

급기야 개딸들이 민주당사 앞에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의 상징이 된 수박 깨기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흐르고 있다. 당대표라는 분이 이 사태를 즐기는 듯 적극적인 만류를 하지 않는 이때, 친명계 중진이 쓴소리를 한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친명 중 하나인 5선 안민석 의원을 검색했다. 그가 내놓은 안은 이 대표의 거취를 전체 당원의 투표로 결정하자는 것. 책임 있는 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을 개딸들이 좌지우지하는 당원 투표에 의존한다? 그다음 날에는 “이재명 대표 한 분이 자제해 달라고 분노가 멈춰지면 공산당이지 않습니까?”라며 개딸들을 옹호한다. 이제 알겠다. 민주당 5선은 초선, 그리고 개딸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상황이 점점 ‘개판’이 돼 가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