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공릉역 버스정류장 앞에서 사람들이 새벽 첫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언니, 오늘은 일찍 나왔네.”

오전 3시 50분, 새벽 어둠을 뚫고 첫차가 출발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을 출발해 강남구 신논현역까지 가는 8146번 버스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장년 여성들로 활기가 돌았다. 매일 마주치는 얼굴들이라 승객들은 누가 어디서 타고 내리는지 알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이 교통카드를 댈 때마다 ‘삐빅’ 소리와 함께 조조할인 요금 960원이 빠져나갔다.

수락산역, 도봉구청, 중계역을 지나자 발 디딜 틈 없이 8146 버스가 가득 찼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수락산역, 도봉구청, 중계역···. 이내 발 디딜 틈 없이 버스 안이 가득 찼다. 먹골역부터는 앞문과 뒷문으로 승객이 밀려 들어왔다. 8년간 이 노선을 운행했다는 버스 기사 윤종수(68)씨는 “강남 일대에서 청소 일을 하는 중년 여성이 대부분이고, 건설 현장 나가는 분들이나 경비원들도 많다”고 했다.

이 버스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새해 첫 출근 날 ‘새벽 만원 버스’에 탑승한 것을 계기로 신설됐다. 당시 146번 버스에 탔던 새벽 노동자들이 “4시 5분인 첫차 출발 시간을 15분만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고, 보름 만에 3시 50분발 8146번 버스가 등장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새벽 만원 버스는 서울 지역에만 179노선이 있다. <아무튼, 주말>이 남들보다 빨리 하루를 여는 사람들, 새벽 첫차를 타는 사람들을 따라가봤다.

◇ “내 힘으로 밥 벌어 먹는 게 복”

지난 6일 이옥자(79)씨가 수락산역에서 8146번 버스에 올랐다. 행선지는 강남구 삼성역 무역센터. 청소 일을 시작한 지 30년 됐다고 했다. 남편은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경남 합천에서 농사짓고 구멍가게 하며 삼남매를 키우다 막둥이가 대학 진학할 때 서울 올라와서 청소 일을 시작했어요.” 60대에 170만원 받았던 월급이 70대 들어 130만원으로 줄었지만, 그는 “이 일이 너무 좋다”고 했다. “열심히 하면 결과가 바로 보이니까. 이 나이에 움직여서 밥 벌어 먹고 사는 게 얼마나 복입니까.” 이씨는 첫차 시간이 앞당겨져서 금쪽 같은 15분을 벌었다며 “화장실 하나를 더 청소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라고 했다.

새벽 3시 50분에 출발하는 8146 버스에 승객이 타는 모습.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출발한 지 1시간 10분쯤 지났을까. 버스가 영동대교 북단에 접어들었다.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1분 1초가 아까운 듯 새벽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봉은사, 무역센터, 삼성역, 선릉을 거쳐 강남을 벗어나자 썰물이 빠져나간 듯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새벽 5시 15분이었다.

신희주 가톨릭대학교 사회학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서울에만 매일 오전 4~5시에 버스를 타는 사람이 최소 2만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연구팀이 서울 구로구와 개포동을 오가는 6411번 버스 첫차 승객을 분석한 결과, 60대 이상이 83%였고, 직업은 청소 업무가 85.1%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신 교수는 연구에서 “청소업은 다른 직종에 비해 고령화가 심하고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며 “평균 연령은 61.1세(전체 노동자 평균연령 45세)이고, 청소업 내에서도 고령으로 갈수록, 남성에 비해 여성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과 월평균 수입이 낮아진다”고 분석했다.

◇“고맙다 한마디에 피로 잊는다”

새벽 지하철 풍경은 어떨까. 다음 날 오전 5시 30분, 신도림역에서 강남 방향으로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 첫차를 탔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평일 6시 이전 승·하차 인원이 가장 많은 곳이다. 지난해 12월 31일 하루에만 683명이 신도림역에서 오전 6시 이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출발 시각이 5분 남았는데, 이미 대부분의 좌석이 찼다. 경기 시흥에서 새벽 버스 타고 왔다는 한동수(63)씨는 매일 여기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둔촌주공아파트 건설 현장에 간다. 출근 시간만 꼬박 2시간 15분이 걸린다. 그는 “3주 전까지만 해도 남구로 인력 시장을 전전했는데, 앞으로 1년간은 어디서 일할지 걱정 안 해도 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만원 버스 안, 두 승객이 하나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서초역 인근의 회사 구내식당에서 조리원으로 근무하는 김금란(63)씨는 5년째 서울대입구역에서 첫차를 타고 출근한다. 직원 50여 명이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 6시부터 쌀 안치고, 나물 무치고, 반찬 몇 가지를 하고 나면 금세 8시. 아침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점심 식사 준비에 돌입한다. “요즘엔 구내식당에서 외부인도 받기 시작했어요. 6500원에 든든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소식에 인근 직장인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더군요.” 그는 “고맙다며 ‘여사님 절대 어디 가지 말라’는 직원들 인사에 기운을 낸다”며 웃었다.

새벽 6시 15분. 열차가 강변역에 도착할 즈음 허름한 등산 가방에 모자를 눌러 쓴 중년 남성 서너명이 문 앞에 섰다. “무슨 일 하시냐”고 묻자, 한 사람이 “현장”이라고 짧게 답했다. 문이 열리자 이들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유일한 낙인 소주 한 잔도 버거워져”

지난달 10일 새벽 5시 11분 경기도 수원역. 서울 못지않게 붐볐다. 수원시에서만 하루 평균 2330명이 매일 오전 4~5시에 지하철을 탄다. 1호선 첫차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는 건설노동자 강모(60)씨를 만났다. 요즘 그는 서소문의 한 빌딩 철거 작업을 하고 있다. 각종 관과 전기선 등을 뜯어내고, 고철을 일일이 철거하는 작업이다. 고된 노동 후 유일한 낙은 뼈다귀 해장국과 함께 마시는 소주 한 잔. 그는 “국밥도 소주도 가격이 너무 올라버렸다”며 “유일한 하루의 낙을 즐기기도 벅차다”고 푸념했다.

신도림발 지하철 2호선 첫차가 신대방역을 지나자, 승객이 가득 찼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새벽 첫차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이들도 첫차에 몸을 싣는다. 조모(65)씨는 매일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빌딩에서 경비 업무를 한다. “첫차가 움직일 때까지 1시간 동안 눈 붙였다가 군포에 있는 집으로 퇴근한다”고 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서울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 그는 “모든 게 온라인으로 바뀌는 세상이라 종이가 필요없어졌다”며 “나이가 드니 이런 일 말고 별수 있느냐”고 했다.

8146번 버스부터 지하철 2호선에 이어 1호선까지, 새벽 첫차에서 기자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었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평균 3배에 해당하는 43.4%.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지금 노인 세대의 경우, 연금제도도 미비했던 데다가 본인의 노후 준비보다는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했기 때문에 빈곤율이 높게 나타난다”며 “대학 진학률도 높지 않았던 세대라 결국 몸을 쓰는 일용직 일자리로 유입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전 5시 30분, 대림역에서 강남 방향으로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습.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6시, 생업을 시작하는 사람들

새벽 6시. 첫차를 타고 내린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각이다. 8일 회현역 5번 출구에서 남대문시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황모(54)씨를 만났다. 2평짜리 매장에서 커피와 매실차를 파는 그는 20년째 창동역에서 새벽 첫차를 타고 이곳으로 출근한다.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나지 못하면 10년 넘게 열차에서 얼굴 본 사람이 회현역이니 내리라고 깨워준다”며, “말은 안 걸어도 누군지는 서로 안다. 꼭 동료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남대문에서 옷장사를 했던 황씨는 결혼 후 일을 그만뒀다. 두 아들 키우며 생계가 어려워지자 결국 익숙한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부지런히 커피 팔아서 아들 하나는 명문대에 보냈고, 다른 아들은 육군 중위가 됐다. 그는 “새벽부터 열심히 사는 엄마를 보면서 둘 다 번듯하게 자란 것 같다”며 웃었다. 요즘 그의 고민은 난방비. “고작 2평짜리 가게에 월 7만원이 더 붙어서 나온다니까요. 나야 작아서 그렇다치지만, 다른 가게들은 워쩔란지….”

맞은편의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골목에서는 누군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정육점 즐비한 골목에서 40년 넘게 장사했다는 박모(81)씨. 경기도 고양시 원흥역에서 3호선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그는 6시 15분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묵은지 반찬에 아침밥을 해결한다. 인근 중국집 사장이 국거리 고기를 주문하자,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그가 일어났다. “묵은 김치 하나 먹어도 이리 잘 넘어가요.” 박씨가 능숙한 솜씨로 목심을 손질하며 말했다. “아침에 눈뜨면 항상 기도해요. 우리 가정 잘 풀리게 해달라고. 저 멀리 튀르키예 지진 피해 입은 이들도 잘 돌봐주시고, 매일 싸우는 우리 국민들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