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현대카드 건물 주변에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16. 큰길가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비밀스러운 빨간 문이 나왔다. 문 한가운데 적힌 글자는 재즈 클럽 ‘올 댓 재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왼쪽에는 테이블이, 오른쪽에는 바(bar)가, 그 앞에는 붉은 조명 아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피아니스트 김광민(63)이 자연스럽게 무대에 올라가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그가 2017년에 발표한 곡 ‘너와 나’. 익숙한 피아노 선율에 진낙원(66) 올 댓 재즈 사장이 와인 잔을 닦다 밖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죄송해요. 조금 바빴어요.”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은 이 공간을 40년 전으로 돌려놓는 듯했다.

1976년 문을 연 ‘올 댓 재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 클럽이다. 역경 많던 이태원처럼 이곳도 수많은 굴곡을 겪어야 했다. 이태원 초입에 뮤지컬 ‘시카고’의 메인 테마곡에서 이름을 따 클럽을 연 건 중국계 미국인 마명덕 사장이었다. 군수산업 로비스트이자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카지노 ‘사파리 포스트’를 운영하던 그는 1986년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한국을 떠나면서 단골이던 진낙원에게 클럽을 넘겨줬다.

최근 새롭게 부활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클럽 ‘올 댓 재즈’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올 댓 재즈’는 당대 재즈를 좀 안다는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김광민 역시 대학교 때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누가 연주하고 있으면, 관객들도 따라 올라가 잼(jam·즉흥 연주)을 하곤 했어요. 저도 몇 번 올라갔죠. 정성조 선생님이 연주한 ‘술과 장미의 나날들’이 기억에 남네요.”

1994년 드라마 ‘사랑은 그대 품 안에’ 촬영지로 떠오르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2011년 건물주가 바뀌면서 해밀톤호텔 뒤편으로 이전했다. 2021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폐업 신고를 했다. 지금 이 공간은 ‘올 댓 재즈’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단골들과 음악 저작권 플랫폼 회사 ‘뮤직카우’의 수혈로 다시 터전을 잡은 곳이다. “낮은 층고, 가운데 기둥, 오래된 바 느낌까지, 초기 올 댓 재즈와 분위기가 비슷하네요. 술맛 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했다. 새롭게 부활한 ‘올 댓 재즈’처럼, 지난해 거대한 아픔을 겪은 이태원도 조금씩 일어서고 있다. 따스한 봄처럼 사람들이 하나둘 마실을 나오기 시작한 이태원을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과 함께 걸었다.

리움미술관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연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전시.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신선한 충격의 ‘리움미술관’

“아직 밖이 추운데, 경비원에게 말해야 하나. 아, 작품이구나.”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55길 ‘리움미술관’. 지난 1월 말부터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 : WE’ 전시에 들어가던 김광민은 입구에서부터 깜짝 놀랐다. 미술관 입구에 먼지를 뒤집어쓴 노숙자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카텔란의 장치. 그는 현재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다. 바나나를 벽에 붙인 작품 ‘코미디언’은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 등장해 1억원 넘는 가격에 팔렸다.

“현대미술은 ‘얼마나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느냐’예요. 이는 음악도 마찬가지죠. 존 케이지가 1952년 발표한 ‘4분 33초’라는 음악이 가장 유명해요. 공연장에 등장한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뚜껑을 닫고 백지인 악보만 넘겨요. 그렇게 4분 33초가 지나면 퇴장하죠. 침묵도 음악임을 알린 곡이죠.”

로비로 들어오니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무표정한 소년 ‘찰리’는 카텔란의 분신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독학으로 작가가 됐다. 카텔란의 어머니는 그가 20대 때 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를 냉장고에 넣은 작품 ‘어머니’는 카텔란 나름의 추모다.

반면 김광민의 어머니는 피아노 전공자였다. 세 살 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피아노 학원에 데려간 것도 어머니였다. 선생님이 아이가 너무 어려 가르치기 어렵다고 하자, 어머니는 단 하루만 가르쳐 보라고 권한다. 그때부터 김광민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건 안 된다”고 반대했다. 부친을 설득한 사람은 조용필 등 당대 가수들. 그때부터 김광민은 미국 유학 등 정식으로 음악의 길을 걷게 된다.

리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역대 최대 규모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 /리움미술관

카텔란 전시를 나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로 이동했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조선 백자 31점, 일본에 있는 수준급 백자 34점, 국내외 박물관·미술관 14곳의 백자 185점을 모은 역대 최대 규모 전시다. 외부 빛을 차단한 661㎡(약 200평) 공간에 백자 42점을 펼쳐 놓았다. 청화백자부터 철화, 동화백자 등 다양했지만 김광민의 발길이 머문 곳은 ‘달항아리’였다. “색깔 없이 하얀 게 좋더라고요. 녹차를 즐겨 마시는 잔도 티 하나 없는 흰색이에요.”

그래서 그럴까. 그의 음악은 백자처럼 담백하다. “곡을 쓸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뭔가요?” “글쎄요. 곡을 써야겠다 하고 집중해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다 보면 나와요. 피아노를 치다가 갑자기 나올 때도 있고. 길을 가다가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도자기는 빚는 것이 아니라, 흙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어느 도공의 말이 떠올랐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건축가 김종유가 설계한 조각 케이크 모양 건물의 서점 ‘그래픽’. /사진가 강민구

◇어른들을 위한 만화방 ‘그래픽’

김광민은 그림을 좋아한다. 세 살 때부터 그림을 배운 그는 5집 ‘시간여행’과 6집 ‘유 앤 아이’의 표지를 크레용으로 직접 그렸다. 어릴 때부터 박부성·박기정·강철수 등 국내 만화가뿐 아니라 요괴 인간,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등 일본 만화까지 섭렵한 만화광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발길을 끈 곳은 리움미술관 뒤편에 있는 서점 ‘그래픽’이다. 김종유가 설계한 조각 케이크 모양의 이 건물은 입장료 1만5000원만 내면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그림 소설)부터 유명 만화책, 아트북까지 실컷 볼 수 있다. 책을 사면 1만원 깎아주고, 추가금을 내면 술도 마실 수 있다. 리움에서보다 반짝이던 김광민의 눈이 닿은 건 의외로 이집트 예술 책이었다. “이집트 예술을 좋아해요. 기원전 5000년 전인데, 지금 봐도 현대 예술보다 더 현대적인 것 같아요.”

구하기 힘든 한정판 LP로 가득한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명반 가득한 ‘현대카드 건물’

학창 시절, 그에게 이태원은 LP판을 구하러 오는 곳이었다. 시중에서 팔지 않던 그룹 제네시스의 1976년 앨범 ‘어 트릭 오브 더 테일’, 킹 크림슨의 1974년 앨범 ‘스탈러스 앤드 바이블 블랙’ 등이 그가 이태원에서 구한 판이다. 이들은 대표적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지금 그의 음악과 사뭇 다른 듯하지만, 사실 그는 1980년 국내 최초 프로그레시브 밴드로 알려진 ‘동서남북’에서 키보드를 맡으며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81년에는 ‘시나브로’라는 3인조 그룹을 조직해 MBC 대학가요제에서 ‘안개’라는 곡으로 동상을 받았다.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건반 주자로 활동했고, 김민기·양희은·조동진 등의 곡에 연주자로 참여했다.

“일반 음반 가게에서 판이 300원 할 때, 이태원에서는 500원 했어요. 고등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요. 차비와 점심 값 모아 하나씩 사곤 했죠. 이태원에 없으면 동두천에도 가고. 청계천 8가에도 가보고. 구하기 힘든 앨범을 서울 곳곳을 뒤져 찾았을 때는 정말 가슴이 뛰죠.”

그렇게 40여 년간 모은 앨범은 지금도 그의 집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태원로 246에 있는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와 비슷하다. 1960년대부터 전 세계를 호령했던 앨범들이 이름과 시대 순으로 나열돼 있다. 마음에 드는 앨범을 골라 직접 들어볼 수 있다.

16일 낮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맛집 골목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쪽 벽면에는 희귀본들이 진열돼 있다. 표지가 백지라 ‘화이트’라는 별명이 있는 비틀스의 1968년 앨범을 보자 김광민이 말한다. “저거 우리 집에도 있는데! 롤링스톤스의 ‘스티키 핑거스’ 오리지널 앨범도 있어요. 이 앨범은 표지에 쇠로 된 지퍼가 달려 있고, 그걸 열면 팬티가 나와요. 정말 영국식 유머지.” 집에 있는 앨범 중 단 하나만 고르라고 하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답한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취향이다.

그는 아들 넷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에게 음악 세계를 열어준 사람이 어머니라면, 확장해준 것은 세 형이다. 형들이 하드록을 들을 때 그도 따라 하드록을 들었고, 형들이 기타를 치기 시작했을 때 그도 따라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형들이 대학교 축제에서 공연할 때, 중학생인 그를 무대에 올린 것도 형들이다. 그의 중학교 담임을 찾아가 “광민이가 없으면 안된다”고 설득해 가발을 씌우고 나팔바지를 입혀 데려갔다고 한다. 그렇게 음악이 흐르는 가정에서 그는 중학교 때 ‘학교 가는 길’, 고등학교 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등을 작곡했다.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1층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2층 청음실은 현대카드 소지자만 가능하다. 현대카드가 없다면 그 옆 건물 ‘바이닐 앤 플라스틱’으로 가보자. 앨범을 들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이 건물 지하에는 전시관 ‘스토리지’가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네덜란드 아티스트 듀오 ‘드리프트’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아시아 최초인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건 아이폰이나 신라면 등을 분해해서 재료와 소재 등의 구성 요소를 시각화한 ‘머티리얼리즘(Materialism)’ 연작이다. “수학을 미술로 표현하다니. 굉장히 현대적이고 특이하네요.”

서울 용산구 사운즈 한남 건물에 새롭게 문을 연 재즈 클럽 ‘코튼 클럽’ /코튼 클럽
국내 최초 와인숍 ‘더 젤’의 2층 레스토랑 전경. /더 젤 인스타그램

◇'블루스퀘어’와 ‘코튼클럽’, 그리고 ‘더 젤’

현대카드 빌딩 주변은 이태원에서 몹시 붐비는 골목 중 하나다. 한강진역 쪽으로 걸어가면 나오는 공연장 ‘블루스퀘어’는 이번 겨울 뮤지컬 예매 순위 1위를 기록한 ‘물랑루즈’가 성황리에 끝나고,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뮤지컬 ‘영웅’이 지난 17일부터 공연 중이다.

뒷골목으로 내려가면 핑크 나라에 온 듯한 분홍색 건물 ‘로얄멜팅클럽’ 등 예쁜 카페와 맛집이 즐비하다. 그 길 끝에 있는 ‘사운즈 한남’ 건물에는 신생 재즈 클럽인 ‘코튼 클럽’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비싼 스피커를 타고 나오는 라이브 연주를 듣고 있으니, 뉴욕 한복판에 온 듯하다.

1980년대 미국에서 공부한 김광민은 와인에도 일찍 눈떴다. 귀국한 그가 30대부터 방앗간처럼 드나들던 곳이 이태원동 241-2에 있는 남산 ‘더 젤’이다. 1992년 문을 연 더 젤은 타임지가 선정한 국내 최초 와인 숍이다.

그는 음반처럼 와인도 모은다. 가장 좋아하는 건 부르고뉴의 위대한 부인이라고 하는 ‘르루아’와 초고가 와인의 대명사인 ‘DRC’지만, 이 와인들을 마시며 얻게 된 것은 2만~3만원짜리 와인 중에서도 내 입맛에 맞는 걸 고를 수 있게 된 취향이라고 했다. “저렴한 와인도, 아파트 1층 호프집 생맥주도 좋아해요. 수요예술무대를 진행할 때는 뒤풀이로 마시는 하이네켄 맥주가 꿀맛이었죠. 술 종류보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사람과 음악이에요. 전 와인을 마실 때는 편안한 음악 듣기를 추천해요. 제 음악 중에는 ‘기지개를 켜다’가 좋겠네요. 제가 연주자로 참여한 김민기 선배님의 ‘아름다운 사람’도 잘 어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