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처음엔 나도 깜빡 속았다.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 약간 어눌하지만 일본말도 꽤 한다. 일본에서 온 호스트라는데, 행색이 십 수년 전 일본 스타일이다. 옛날 스타일을 좋아하는 일본인인가? “독도가 누구네 땅이야?”라는 질문에 “독도? 너네 땅”이라고 심드렁하게 답하는 데선 놀라기도 했지만, 일본인들 중에는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는 한국에 줘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나카상은 한국인이다. 개그맨 김경욱이 자신의 ‘부캐’(자신의 원래 정체성과 별개로 새로 만든 인물)로 만든 캐릭터이다. 그는 ‘부캐’의 논리에 충실하다. 다나카상의 상징인 염색 가발과 아르마니 셔츠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끝까지 자신은 일본인이라 주장한다.

그 ‘일본인’이 요즘 핫하다. 소셜미디어(SNS)에서 시작된 ‘다나카상’ 열풍은 이제 케이블과 공중파에까지 상륙했다. ‘다나카상’으로서 인터뷰를 하고, 음악 채널은 물론 공영방송에까지 나가 ‘다나카상’으로서 ‘와스레나이’(잊지 않겠어)라는 일본어 제목의 노래를 부른다.

과거에도 일본인을 흉내 내는 코미디언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다르다. 일본어 발음을 희화화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유행 가요들을 정확한 일본어 발음으로 부른다. 일본의 문화 코드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다나카를 보는 한국인들의 반응 역시 과거와 다르다. 예전 같았으면, 왜색 문화라며 손가락질이 쏟아졌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나카’에게 열광한다. 다나카의 콘서트장은 젊은 관객들로 가득하다. 다나카가 일본 노래를 부르면 객석에서는 합창으로 화답한다.

다나카상의 유튜브 채널은 대한민국 유명 연예인들의 집합소가 됐다. 줄줄이 다나카상이 일하는 호스트 클럽(유튜브 채널)을 찾아가 다나카를 ‘지명’한다. 상당수는 다나카상과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한다. 이들은 대개 일본 활동 경력이 있어 일본 문화에 친숙하다.

다나카는 급기야 일본 공중파TV에도 진출했다. ‘샤베쿠리007′이라는 일본 니혼TV의 간판 예능 프로에 나왔다. 일본인 흉내를 개그 소재로 삼으니 일본인들로서는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웬걸, 스튜디오는 폭소 연발이다. 한국의 개그맨이 일본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인 ‘다나카’를 캐릭터로 내걸고 일본어로 개그를 하니 오히려 친밀감을 느낀 것이다.

다나카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가 ‘마부장’이다. ‘마부장’은 마쓰다 부장을 줄인 말이다. 마쓰다 부장 역시 처음에는 깜빡 속았다. 한국인인 줄 알았다. 일본어 억양이 전혀 없는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하지만 그는 마쓰다 아키히로라는 이름의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오사카에서 부동산 업체 부장으로 근무 중인 일본인이다. 한일 커플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 한국에서 자라고 군 복무도 했지만 현재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아마도 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일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오사카 맛집들을 소개해주는 유튜브 채널이다. 맛집들을 경쾌한 영상미로 소개해주는 그의 채널은 마쓰다 부장의 ‘꽃중년’ 미모에 능통한 한국어까지 시너지를 일으키며 이제 구독자 100만을 바라본다.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이 오사카에 달려가 ‘마부장’과 함께 밥과 술을 즐긴다.

과거에 이렇게 유명한 일본인이 있었나? 더욱이 한일 혼혈은 웬만하면 자기 정체성을 숨기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학창 시절 ‘독도는 누구 땅이냐?’라든가 ‘일본은 왜 사과를 안 해?’ 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이지메’(괴롭힘)를 당한 아픈 기억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부장은 자기가 일본인이고 한일 혼혈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들 역시 마부장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아니, 마부장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그가 다루는 오사카 맛집이라는 소재 자체가 너무나 친숙해서 도무지 외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달 50만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하고 그중 절반은 오사카로 향한다. 이들의 이미지 속 오사카는 외국이라기보다는 한국 어디쯤 되는 건 아닐까?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협력 파트너라 선언하고, 3월 6일 정부가 징용 문제 해결책을 발표한 후 여야 간 정치적 갈등이 격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야 모두 한일이 이젠 미래로 나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일 관계의 미래 지향성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젊은 세대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들은 ‘이미’ 미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수백만의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문화에 익숙하다. 그러니 ‘다나카상’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마부장’의 오사카 음식 소개 채널을 100만명 가까이 구독하는 것 아닐까? 지난 8일 국내 영화 예매율 1위에서 3위가 모두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정부의 징용 배상안에 대해 전 국민의 53%는 반대라지만 20대의 51%는 ‘잘한 결정’이라 답했다(KBS-한국리서치, 3월 7~8일).

미래로 가야 할 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기성세대들이다. 과거의 아픈 기억에만 집착하며 일본의 말과 문화를 금기시해온 것이 누군가? 기성세대가 이제 더 이상 말로는 ‘미래’를 말하며 실제론 브레이크만 걸 것이 아니라, 이미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서 진지하게 한일 관계의 미래상을 배워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