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이 1934년에 그렸다는 ‘수촌(水村)’이라는 그림을 보는데, 아티초크가 있었다. 그림의 오른쪽 부분에 있는 주먹을 쥔 것처럼 이색적으로 솟은 암석은 아무래도 아티초크처럼 생겼다. 아티초크를 직접 손질해보면 안다. 거대해 보여도 먹을 부분은 얼마 안 된다는 걸. 두툼한 껍질을 벗겨내고 안에 있는 ‘하트’라는 부분을 먹는데 어찌나 허무하던지.

멕시코 식물인 아가베의 속살로 만든 증류주 ‘메스칼’. /플리커

그림을 본 날 넷플릭스 다큐에서 아가베의 하트도 보았다. 아가베의 하트는 ‘피냐’라고 불렀다. 파인애플도, 파인애플류의 속도 ‘피냐’라고 한다고 한다. 화면 속의 남자들은 아가베를 마체테라는 손도끼로 잘라 피냐를 추출한 뒤 그걸 불구덩이로 던졌다. 잘린 단면이 불구덩이 쪽을 향해야 한다며. 이렇게 태운 아가베의 피냐로 메스칼을 증류한다고 했다. 오! 메스칼에서 나던 스모키함의 정체가 이거였다. 불과 연기.

불에 원료를 직접 태워서 만드는 술이 또 있나? 숯불로 굽는 요리가 발달한 나라다웠다. 불에 구운 요리에 불에 구운 술이라니 이건 뭐. 멕시코에서 불어오는 냄새가 비강에 달라붙는 기분을 느꼈다. 불에 구운 피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나귀였다. 구워진 피냐를 아래에 깐 후 둥글넓적하고 거대한 돌을 세로로 세우고, 그 돌에 묶인 당나귀가 빙빙 돌았다. 하루에 두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쉬는 행복한 당나귀라고 했던가? 저 도구, 뭐지? 뭘까? 하며 중얼거리다 결국 생각해냈다. 당나귀와 함께 돌던 그것은 연자방아였다. 이름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연자방아를 떠올리고 꽤나 기뻤다.

내가 본 영상은 미국 남자가 멕시코 오악사카주에 가서 식도락 탐방을 하는 것인데, 아가베로 메스칼을 만드는 장면도 나왔던 것이다. 멕시코 하면 메스칼이고 메스칼의 고향은 오악사카라서, 나올 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만드는 줄은 몰랐다. 손도끼와 불과 당나귀라니. 참으로 진귀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술꽂이에 꽂혀 있던 메스칼을 꺼내왔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메스칼이 몬테알반이었다. 오악사카에 있던 고대 도시 몬테알반이 술의 상표가 된 것이다. 병목에는 ‘메스칼의 신비’라는 제목을 붙인 미니어처 팸플릿이 달려 있다. 다소 과장 섞인 호들갑과 귀여운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어서 웃음이 터졌다.

이 술은 멕시코의 석양 같아서 부드럽고 그윽한(smooth and mellow) 맛을 느끼실 텐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겉으로는 부드럽겠지만 안에는 강인한 스페인 전사가 있거든요. 수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신비로움이랍니다. 저만 웃기나요? 코웃음을 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럴듯한 면이 있었다. 멕시코가 적도에 가까운 나라이니 석양에 특별한 요소가 있을 것 같았고, 테킬라 선라이즈라는 이름의 칵테일도 그래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었기에.

스페인 전사가 나오는 이유는 이렇다. 16세기 중반 멕시코에 들어온 스페인 사람들이 럼을 다 마시고 대체할 걸 찾다가 만들게 된 술이 메스칼이라서. 멕시코 사람들은 아가베를 발효해 풀케를 만들었는데 풀케는 잘 상했다. 풀케보다 센 거를 찾으려고 실험해 메스칼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을 ‘스페인 전사의 강인함’이라는 말로 표현한 거다.

무엇보다 웃긴 점은 이 술에 든 벌레가 진짜 메스칼이라는 징표라고 말한다는 거다. 그렇다. 이 술에는 벌레가 들어 있다. 영어로는 ‘아가베 웜’이라고 하고, 스페인어로는 ‘구사노(gusano)’라고 하는. 몬테알반이라는 상표 다음으로 크게 쓰인 게 ‘MEZCAL CON GUSANO’인데 ‘with worm’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벌레가 든 메스칼. 팸플릿은 이 벌레가 열쇠라고 한다. 어디의 열쇠냐면,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란다. 그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면(그러니까 아가베 웜을 먹으면) 영혼을 풀어놓게 한다나?

유머인 걸까 기믹(gimmick·눈속임)인 걸까. 몬테알반 병을 따를 때마다 3.5cm 정도 되는 아가베 웜도 함께 출렁거리긴 하지만 먹고 싶진 않다. 음주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이 이 아가베 웜을 먹는다는 도시 전설 같은 걸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나와는 먼 세계의 일 같고. 누가 이걸 자발적으로 먹겠나 싶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집에서 담은 전갈주 같은 것도 있고, 그걸 영혼의 메신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메스칼을 그냥 먹기는 그래서 칵테일을 만들기로 했다. 내가 가진 다수의 칵테일 책에는 메스칼로 만드는 레시피는 전혀 없어서 유튜브로 찾았다. 그렇게 만들기로 한 게 ‘팔로마(Paloma)’였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에 나오는 음악 ‘쿠쿠루쿠쿠 팔로마’의 그 팔로마다. 스페인어로 비둘기라는 뜻인데, 왜 칵테일 이름이 팔로마인지는 알 수 없다. 팔로마는 테킬라에 자몽과 라임즙을 넣는 롱드링크 스타일의 칵테일이다. 하나는 테킬라로, 하나는 메스칼로 만들기로 했다. 테킬라 팔로마와 메스칼 팔로마를 한 모금씩 마시는데… 게임이 안 됐다. 메스칼의 매캐한 맛이 훅 치고 올라오면서 자몽의 비터스윗한 맛과 라임의 산미와 섞이는데, 이것이죠. 메스칼의 완승이었다.

자몽즙 3, 테킬라(거나 메스칼)을 1.5, 라임즙 1, 아가베 시럽 0.5의 비율로 탄 뒤 얼음을 넣고 뒤섞었다. 마르가리타처럼 잔에 소금을 묻히는 것도 차용해 잔에 미리 소금을 묻혀 두었다. 라임즙을 바른 잔 테두리에 칠리 라임 소금을 묻히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테킬라 팔로마와 메스칼 팔로마를 한 모금씩 마시는데… 게임이 안 됐다. 메스칼의 매캐한 맛이 훅 치고 올라오면서 자몽의 비터스윗한 맛과 라임의 산미와 섞이는데, 이것이죠. 메스칼의 완승이었다.

아, 다시 아가베 웜 기믹으로 돌아와서. ‘아가베 웜 열쇠설’을 주창하신 스토리텔러님께서 적으신 하이라이트 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이 열쇠는 다양한 사람을 위한 다양한 열쇠라고 했다. (혹시… 마스터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이러하였다. 이 열쇠가 어떤 문을 열지 알려면 일단 (아가베 웜을) 먹어봐야 할걸요?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겐 팔로마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