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학생들은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학교 교수들을 가리켜 ‘알파벳 교수’라 부른다. 학생에 대한 갑질, 논문 표절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영어 알파벳으로 익명 보도되는 교수들이 크게 늘어난 데 대한 자조 섞인 표현이다. 지난달 서울대 학위수여식에서는 한 인문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생이 ‘자연대 K교수, 음대 B교수와 C교수… 학내 성폭력 전수조사 하라’고 적힌 피켓을 든 채 1인 시위를 했다. 서울대 교수들의 성범죄가 수년간 반복되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졸업생은 얼굴에 피눈물을 흘리는 분장을 했다. 이 학생은 “서울대에서 교수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은 이제 새로운 뉴스도 아니다. 학교는 미온적 대응만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서울대가 위기다. 내부 비리 문제가 끊이지 않으면서 세계 톱10 진입은커녕 한국 최고 지성 자리조차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서울대 자체 설문에서 교수·직원·학생 절반 이상이 ‘10년 후 서울대의 위상은 지금보다 하락할 것’이라고 답했다. 교수·교직원 666명의 연구비 횡령·논문 조작 사실이 알려진 지난해 교육부 감사 결과는 서울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잘못을 저지른 교수가 너무 많아 표기할 알파벳도 모자란다”는 말이 나올 정도.
최근 학교 폭력 의혹이 있는 정순신 변호사 아들이 서울대에 재학 중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서울대는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학폭 가해자가 서울대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공정성 문제가 없었는지를 두고 잡음이 끊기지 않고 있는데도 총장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전면에 나서 해명하지 않고 있다. 서울대 입학본부장이 국회에서 정 변호사 아들의 입학 여부를 묻는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하자 “최고 명문 서울대가 전 국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발뺌하기에만 급급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성추행·횡령... ‘부실 백화점’ 된 서울대
교육계에선 각종 비리 문제가 터지고 있는 서울대를 두고 ‘주인 없는 기업’의 모습과 같다는 말이 나온다. 2011년 법인화 이후 정부에서 독립하면서 방만하게 운영된 영향이 크다는 것. 서울대 교수들은 최근 4~5년 전부터 비리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었다.
한 교수는 조교 3명에게 지급해야 할 인건비 1억6000여만원을 관리하면서 2000만원을 학생에게 사용처를 알리지 않고 임의로 썼다가 지난해 교육부 감사에 적발됐다. 연구계획서에 없는 950만원 상당 노트북을 연구비 카드로 결제해 개인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서울대에서 최근 3년간 논문 조작 등 연구부정으로 판단한 사건만 28건에 달한다. 지난해 서울대 국정감사에선 교수 자신이나 동료 교수의 자녀를 논문 공저자로 올려주는 연구부정 행위가 22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대학가를 강타한 가짜 학회 사태 당시 정부 예산을 받아 부실학회 행사에 참가한 국내 대학·기관 연구자 중 서울대 교수(88명)가 가장 많았다. 한 지방 국립대 교수는 “서울대가 과거 국립대이던 시절엔 교수가 연구비를 유용한 사실이 밝혀지면 사임했는데 요즘엔 그런 일이 잦아서인지 교수들조차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며 “한국 최고 대학으로서의 경쟁력뿐 아니라 위신까지 포기한 모습”이라고 했다.
비리를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사후 처벌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계속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국회 서동용 의원실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0년 8월까지 음주운전으로 징계받은 국립대 교수·직원 36명 가운데 서울대 교수가 13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원 모두 감봉·견책·경고 등 가벼운 징계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잘못을 저지른 교수에 대한 늑장 대처도 문제다. 서울대는 학내에서 성(性) 관련 비위가 발생하면 30일 이내에 징계를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지난 5년간 이를 지킨 사례는 1건도 없었다. 서울대는 2019년 산학협력단으로부터 연구비 부당 사용이 드러난 서울대 수의대 이병천 교수에 대한 징계 처분 요구를 받았지만 지난해 9월이 돼서야 겨우 파면 처분을 내렸다.
이런 논란으로 시끄러운 사이 서울대의 글로벌 경쟁력은 하락하고 있다. 영국 대학평가기관 THE(타임스고등교육)가 선정한 2023년 세계 대학 순위에서 서울대는 전년보다 2단계 떨어진 56위를 기록했다. 해외 대학과 연구 협력 등 국제화 지수는 연세대, 카이스트, 성균관대보다 낮았다. 인력 유출도 심각해지고 있다. 서울대는 학부 자퇴생이 2012년 105명에서 2021년 330명으로 늘었다. 서울대 대신 지방 의전원을 택하는 상위권 이공계 학생이 늘었기 때문이다.
◇법인화 10년... 교수 파워만 강해졌다
최근 서울대에서 비리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배경에는 의사결정 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 총장, 보직교수를 중심으로 한 특정 교수 단체에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팔이 안으로 굽고 있는 것. 다른 국립대들은 교육공무원법·고등교육법 등에 따라 학교의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심의 기구에 교수뿐 아니라 교직원과 학생도 포함시켜야 하는데 서울대의 경우 이 의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서울대는 2011년 법인화를 추진하면서 신설한 이른바 ‘서울대법’에서 학내 주요 심의 기구에 한해 기존 법 규정을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해 결정하는 대학평의원회의 경우 재학생은 1명도 없다. 서울대는 투명성을 높이겠다며 이사회의 절반 이상을 기재부·교육부 차관 등 외부 인사로 채웠다. 하지만 정부 부처 인사들은 주요 결정이 내려지는 회의에 대부분 불참했다. 형식적으로는 외부 인사를 늘렸지만 사실상 서울대 주요 보직 교수들이 모여 학교 행정을 주무른 것. 한 대학 교수는 “외부 간섭 없는 자율성을 강조하며 추진한 법인화가 특정 교수들의 권력을 강화한 셈”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소속 한 교수는 “서울대는 내부 구성원들의 기득권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법인화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보냈다”고 지적했다.
◇미래 먹거리도 못 찾아
서울대는 법인화를 추진하며 목표로 한 재정 자립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난 10년 동안 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은 더 심해졌다. 2021년 서울대 전체 수입에서 정부지원금(5584억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55.8%로 법인 출범 첫해인 2012년(3353억원·51.9%)보다 오히려 늘었다. 정부 지원이 늘면서 예산 규모는 커졌지만 기부금 모금이나 발전기금 투자 수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재정 자립으로 대학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당초 법인화 취지는 무색해진 상황이다. 반면 교육 투자에서는 국내 대학들에 밀리고 있다. 서울대의 학생 1인당 교육 투자비는 포스텍이나 대구경북과학기술원의 절반 수준이다.
미래 산업을 발굴하는 역할에서도 뒤처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서울대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4차 산업혁명 기술 분야 순위에서 중국, 일본 주요 대학과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윤성로 교수는 지난해 세계 최대 공학 학술단체인 IEEE(국제전기전자공학자학회)에 논문을 발표했다가 표절 사실이 드러나 논문 게재 철회 조치를 당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한 이공계 학자는 “일본 도쿄대는 2004년 법인화 이후 대학 내 창업 투자를 늘려 연간 30~40개 벤처를 배출하는 등 ‘대학=교육·연구기관’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서울대도 세계 무대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대학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혁신을 단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