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아나운서 외길을 어떻게 걸었느냐 묻는 이에게 김동건(85)은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답한다. 러시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솔제니친의 출세작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온 지 8년이 된 이반이 새벽 5시에 기상해 취침할 때까지의 하루를 시시콜콜 묘사한 소설이다. “이반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온도계가 영하 40도 아래로 내려갔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40도 아래로 떨어지면 그날 작업이 취소되니까요. 그렇게 저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60년 산 것뿐이에요. 그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내가 무릎을 쳤다니까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이반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날 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매일 그렇게 살았다.”
솔제니친처럼 인생 대부분을 전쟁터와 수용소에서 보낸 건 아니지만, 김동건의 팔십 평생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이다. 불과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전쟁때 납북돼 이모와 이모부를 어머니·아버지로 부르며 자랐다. 유일한 피붙이였던 형과 전쟁통에 헤어져 고아가 될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도 있었다. ‘국보 아나운서’로 불릴 만큼 온 국민 사랑을 받았지만 정치권력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20년 가까이 진행한 ‘가요무대’에서 하차했다.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 건 시청자들이다. 유행 지난 양복 두 벌을 번갈아 입으며 그저 반듯하고 예의 바르게 진행하는 이 고지식한 아나운서를 시청자들은 신뢰하고 사랑했다.
평양남북예술단공연, 이산가족 찾기, 파독 30주년, 중동 근로자 위문 공연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에 언제나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지만 여든다섯의 그는, “나의 60년은 그저 열 마디로 설명될 만큼 단순했다”고 우겼다. “절해의 고도에 갇혀 일하는 등대지기가 몇 백 배 훌륭하지요. 양식을 실어다주는 배가 와야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유일한 낙이라고는 라디오 듣는 게 전부이나, 그가 매일 밤 밝히는 등대를 보고 수많은 배들이 뱃길을 찾아다니지 않았겠어요? 박수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런 분들이지요.”
지난 1일로 방송 인생 60주년을 맞은 김동건 아나운서를 만났다. 그의 가족이 월남해 처음 정착했던 명동의 어느 밥집에서다.
◇“아나운서 하다 정치인 된 게 축하할 일인가”
-김동건의 60년 아나운서 인생은 돈과 권력을 좇지 않아 가능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60년 동안 날 봐준 시청자들 덕분이지요. ‘저 사람 왜 또 나와?’ 하면 방송에 나갈 수 있겠어요? 국민 없는 정부가 없듯이 시청자 없는 방송이 없지요.”
-정계 진출 제안도 많이 받으셨지요?
“내가 아나운서 클럽 회장을 할 때 사무국장이 와서 돈 쓸 일이 생겼다고 해요. 아나운서 하다가 국회의원 된 사람이 8명인데 축하패를 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국회의원 하다 아나운서가 됐으면 준다, 그러나 아나운서 하다가 국회의원 된 것이 축하할 일이냐 했지요.”
-아나운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영국의 표준어는 BBC 아나운서들이 구사하는 언어예요. 일본의 표준어는 NHK 아나운서의 말이고요. 그런데 한국의 표준어는 사전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일원에서 3대를 살았고 교양이 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점잖은 사람이 쓰는 말. 그런데 그런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그래서 내가 밤낮 주장하는 게 KBS 아나운서의 말이 표준어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나운서들이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국민도 표준어를 익히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2000년을 유랑하면서도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고맙습니다’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지켜낸 우리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맙습니다’는 하대하는 표현이고, ‘감사합니다’가 점잖은 말이라고 오해들 하더군요. 그런데 ‘감사합니다’는 중국 ‘셰셰(㴬㴬)에서 온 말이고 ‘고맙습니다’가 우리말이에요. 모든 프로그램에서 내가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를 했더니 처음엔 시청자를 하대한다고 항의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백화점 직원들까지 ‘고맙습니다’란 말을 많이 쓰더군요. 그거 하나는 보람으로 느끼고 있어요.”
-아나운서가 스스로 주연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프로그램은 망한다고 했더군요.
“만년 소총수죠. 있는 듯 없는 듯 시청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걸 대신 물어주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 대통령의 말, 정치인의 말, 아나운서의 말은 신뢰와 겸손이 생명이에요.”
-아나운서 위상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예능 프로는 유재석·강호동 같은 이들이 더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아나운서가 예능 프로에 가서 사회를 볼 순 있어도 개그맨이 뉴스나 교양 프로에 나와 사회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TBS ‘뉴스공장’을 진행했던 김어준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엘리트 진행자들의 문법을 파괴한 주역으로 광적인 팬들을 확보했었죠.
“나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 없어서 뭐라 할 말은 없어요. 다만 광적인 팬이 있다고 했는데, 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많은 것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적어야 오래할 수 있어요.”
◇“새로 온 사장이 MC 하나 못 자르나”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아버지의 전축이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걸고 혼자서 라디오를 들었다. 학교에선 도시락을 쌌던 신문지를 펼쳐들고 아나운서인 양 뉴스를 낭독했다. 빙 둘러선 아이들이 “와, 똑같다”며 감탄했다. 라디오 공개방송이 있는 날엔 운동장에서 종일 공을 차다 정동에 있는 방송사로 갔다. “경비 아저씨가 ‘너 또 왔구나’ 할 정도였죠. 자리가 없으니 계단에 책가방을 깔고 앉아서 구경했어요. 장기범 아나운서의 스무고개를 정신 놓고 봤어요.”
1963년 3월 1일, 마침내 아나운서가 된 소년은 ‘우리들 세계’ ‘11시에 만납시다’ ‘한국, 한국인’ 등 수많은 프로그램에서 마이크를 쥐었다. 그중 KBS ‘가요무대’는 김동건과 동의어가 됐다. 1985년 11월 18일 첫 사회를 본 뒤 무려 30년을 진행했다. MBC ‘조선왕조500년’을 비롯해 지상파 드라마들이 ‘가요무대’ 때문에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작고한 고운봉 선생을 비롯해 이미자, 조용필 등 지금은 전설이 된 가수들이 총출동했더군요.
“우리 가요의 명맥을 되살려놓은 프로그램이었죠. ‘눈물 젖은 두만강’ ‘신라의 달밤’ ‘전선야곡’ 같은 명곡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어요. 1940년에 만든 ‘나그네 설움’ 같은 노래는 일제 말엽 강제징용을 피해서 만주 벌판을 헤매던 남편, 아들들의 애환과 역사가 담긴 노래예요. 그 곡들을 ‘가요무대’가 다시 살려낸 겁니다.”
-당대의 ‘미스터 트롯’ 같은 프로였군요.
“그럼요. 타 방송에서 드라마 만드는 PD들이 ‘가요무대’ 시청률 따라잡는 게 목표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가요무대’ 진행하며 들은 곡만 9만 곡이라던데, 귀명창이 됐겠습니다.
“첫 소절만 들으면 ‘아, 이놈은 됐다, 아니다’ 하는 생각은 들어요(웃음). ‘나훈아가 노래를 잘 부른다’ 하는 건, 노래를 하지 않고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말에다 음악을 입힌 거죠.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은 음악에다 말을 넣어요. 음악을 따라가느라 말이 죽지요.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은 노랫말만 들어도 감동하게 돼 있어요. 근데 요즘 가수들은 그걸 막 꺾고 뒤집기만 해요. 현란할지는 모르나 감동은 없지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정연주 사장이 부임하면서 ‘가요무대’를 하차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화를 내는 대신 ‘사장이 새로 와서 MC 하나 못 바꾸냐’ 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진행자는 언제든지 (교체될)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그래도 속이 상해서 부산으로 내려가 이틀간 술만 먹고 지냈는데 방송국에서 나를 찾고 난리가 났대요. 노무현과 코드가 안 맞아서 내가 잘렸다는 보도가 나가니 정연주가 곤란해져서 ‘가요무대’에 나와 감사패를 받아달라는 거죠. 예능국장이 백번도 넘게 조르니 후배 하나 살려주자 하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올라가긴 했어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KBS의 중립성이 논란이 됩니다.
“KBS가 중립을 지키려면 정부로부터 자립을 해야 해요. 정부에서 추경을 따서 직원들 월급 주는 회사가 어떻게 정부 눈치를 안 봅니까. 영국민의 자부심이 된 BBC처럼 되려면 1981년 5공 초기에 정해진 시청료 2500원을 현실적 수준으로 올려야 해요. 국민 저항이 크겠지요. 그래서 내 생각은 KBS는 정부 예산을 받거나 광고를 일절 하지 말고 수신료로만 운영하게 하는 거예요. KBS 2TV는 민간에 팔고 대신 교육방송을 가져오고요.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KBS가 한국민의 자랑스러움이 되려면 그 길밖엔 없습니다.”
◇유서 쓰고 떠난 평양 공연
-1983년 전국을 울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도 진행하셨죠?
“황해도 사리원 정방산 밑에 어머니 묘지가 있고 전쟁 때 납치된 아버지는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다면 무덤은 있는지 알 길이 없는데, 내 앞에서 울고 불고 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가족을 만났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딸을 확인한 어머니가 실신해 아수라장이 된 스튜디오에서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 했던 장면은 지금도 회자됩니다.
“그 어머니는 자나 깨나 잃어버린 딸 생각만 하면서 살았을 거 아니에요. 어디에서 식모살이는 하지 않나, 밥은 굶지 않나. ‘이게 무슨 비극인가’라는 탄식밖엔 나오지 않더군요.”
-1985년 남쪽 예술단을 이끌고 평양에 갈 때 유서를 써놓고 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내가 이북서 피란 온 사람이고, 아나운서 하면서 김일성 욕을 많이 했기 때문에 평양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버텼어요. 그랬더니 장세동 안기부장이 찾아와서는 ‘김 동지, 이건 나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지엄한 나라의 명령입니다’ 그래요. 어머니가 알면 까무러치실 테니 TV부터 고장 났다고 치워놓고, 내가 제일 믿는 후배에게 유언을 하고 갔지요. 내가 만일 못 돌아오면 우리 색시를 너희 아내처럼 똑같이 돌봐주고 우리 애들도 너희 애들처럼 똑같이 키워달라고.”
-그런데 방송을 보니 첫인사부터 아주 여유만만하시던데요?
“급한 상황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능력이 생겨요(웃음). 막이 오르길 기다리면서 초조해하는데 평양대극장 지배인이 다가와서 물어요. ‘김 선생, 전투 준비는 끝났소?’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합니다’ 했더니, 이번엔 ‘지령장을 볼 수 없습네까?’ 해요. 지령장이 뭔가 했더니 큐시트야. 음향실은 ‘소리 초소’고요. 순간 ‘아, 내가 방송하는 걸 전쟁한다고 말하는 나라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더군요. 돌연 마음이 편해졌어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는 독일과 근로자들 많은 리비아에도 가셨지요?
“파독 30년 되던 1993년에 서부 독일에 갔는데 오륙천명이 모였어요. 간호사들든 죄다 한복을 입고 왔고요. 현지에서 고용한 독일 오디오맨과 카메라맨들이 나더러 ‘대체 이게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물어요. 내가 한마디 하고, 가수가 한 곡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우니까. 공연이 다 끝났는데도 안 가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니까. 베를린에서 8시간 자동차를 운전해서 왔다는 한 남자는 공연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울어서 나도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 같이 울었어요.”
-김동건 아나운서도 웁니까.
“‘한국, 한국인’이란 프로에 소년소녀 가장 셋이 나왔어요. 대본을 미리 보니 할머니와 둘이 사는 6학년 아이가 학교까지 30리를 걸어서 다닌대요. 그래서 내가 저 아이에게 꼭 자전거를 사주리라 마음먹었지요. 그러고 방송이 시작됐는데, 내가 아이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으냐 물으니 아이가 글쎄, ‘어머니’라는 거예요. 아이고, 그때부터 내가 눈물이 나오는데 멈추질 않아서 방송이 1시간 이상 중단됐어요.”
-세 살 때 헤어진 어머니가 떠올랐을까요.
“길러주신 어머님(이모)이 팔순이 넘은 어느 날 나를 불러서 사진 석 장을 주세요. 이젠 너도 결혼해 자식을 낳았으니 알아도 되겠다. 이게 너의 친어머니다. 나는 너의 큰 이모고…. 그날 밤 20대의 어머니 사진을 펼쳐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미스코리아대회도 무려 30년을 진행했더군요. 대한민국 남자들이 김동건을 가장 부러워했다지요.
“나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어요. 말만 한 여자들 70명이 수영복을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든 이뻐 보이려고만 노력하니 모든 게 자연스러울 리 없고. 인기는 많았지요. 길거리에 택시가 한 대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인들 손녀딸들이 (대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만뒀어요. 한 참가자가 나한테 와서 ‘아무개씨 아세요?’ 물어요. 우리 선배다 하니까 ‘그분이 저의 할아버지예요’ 하는 거예요. 아, 더 이상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하하!”
◇형님이고 스승이고 아버지였던 사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인생이고, 거기서 제일 중요한 건 신뢰라고 믿는 김동건은 방대한 인맥으로 소문났다. 아들이 어릴 때 “아빠, 나한테는 왜 이렇게 삼촌이 많아?” 물었을 정도다. 방송가에선 밥 잘 사주는 선배로 유명하다. “누가 그 돈을 다 어떻게 대냐고 물어요. 근데 후배들에게 밥 안 사주고 돈을 모았다고 해서 63빌딩이 내 것이 되겠어요?(웃음)”
산악인 박영석부터 LG 구본무 회장까지 스스럼없이 지냈던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인물은 연세대 김동길 박사다. 지난해 10월 김 박사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이도, 연세대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는 현장에 함께한 이도 김동건이었다. 김동길의 1977년 저서 ‘링컨의 일생’을 지금도 머리맡에 두고 읽는다는 그는 “김동길 박사는 내게 형님이고 스승이고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고 했다.
-왜 그렇게 김 박사를 따랐습니까.
“선생님처럼 되는 게 내 소원이었어요. 서슬 퍼런 유신과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그는 남자로 태어나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었죠.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따뜻하고. 집, 통장, 그리고 자신의 몸까지 세상에 다 내주고 빈손으로 떠나셨지요.”
-고향이 같은 이북이지요?
“김 박사와 냉면집에 갔는데 어느 손님이 ‘여기 당추가루(고추가루) 개져오라우’ 하는 거예요. 직원이 못 알아듣고 ‘뭐요? 뭐라고요?’ 묻는데 둘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날 길러주신 어머니도 북한 사투리를 무섭게 쓰셨어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씨름한다고 들끓으면 어머니가 뛰어나와서는 ‘야, 이거 뭐이 떴다 날아디게 고구기래’ 하시면서 혼을 냈지요. 그 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표준말 쓰는 아나운서가 나왔느냐 묻는 이들이 많았어요(웃음).”
-김 박사는 ‘연세대 출신으로 일반 대중이 다 아는 세 사람이 있는데, 윤동주 김동건 최인호다’ 했다지요.
“제자 기를 살려주려고 한 말씀인데 당치도 않아요. 내가 학창시절 말썽을 많이 피웠는데도 야단 한 번을 치지 않았어요. 한번은 언더우드 동상 밑에서 싸움이 나서 내가 타잔같이 이리 뛰고 저리 날면서 제압을 하지 않았겠어요? 근데 친구 한 놈이 김동길 교수님이 2층에서 너 싸우는 걸 다 봤다고 해요. 아이고야, 난 죽었구나 했지요. 그런데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그 얘길 한 번도 안 하셨어요. 밤낮 ‘너는 대체 못하는 게 뭐냐’만 물으시지. 분에 넘치지만 그런 양반을 닮아보려 했던 건데 안 되더라고요. 그릇이 달랐던 거예요.”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한 말씀 주시지요.
“억대의 연봉을 받는다, 출세를 했다, 그런데 나이가 팔십이다 그러면 난 그거 안 하겠어요.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젊음을 사지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저 청년들이 나는 제일 예뻐요. 젊다는 자부심이 있으니 당당하게 일하는 거예요.”
-인생은 무엇입니까.
“인생은 누구나 한 번밖에 초대받을 수 없는 자리라는 김남조 시인의 말을 좋아해요. 그런데 인생은 너무 짧지요. 아나운서 60년이 된 날 축하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그랬어요. 60년이 너무 짧더라, 내가 60년간 해온 일이 단 열 마디로 설명이 되더라.”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가겠습니까.
“아나운서 처음 시작하던 날. 다시 하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