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영화 위기설’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방증처럼 마동석표 코미디 ‘압꾸정(2022)’이 흥행에 참패하고 OTT로 빠졌다. 2007년, 내실은 없지만 사업 아이디어와 언변만은 확실한 압구정 토박이 대국(마동석)이 성형외과 의사 지우(정경호)를 만난다. 술기가 빼어나지만 모함으로 면허 정지를 당한 지우는 대리 수술로 근근이 번 돈을 사채업자에게 뺏기는 신세로 권토중래의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린다. 이런 지우의 잠재력을 알아차린 대국은 압구정 토박이의 인맥을 총동원해 대규모 사업을 도모한다. 압구정동 ‘인싸’ 미정(오나라)의 영업력, 조폭 출신 사업가 태천(최병모)과 중국 왕 회장의 자본, 그리고 어둠의 성형 사업 운영자 규옥(오연서)의 연줄을 한데 아울러 종합 서비스가 가능한 성형외과를 기획한다.
“야, 이게 되게 유명한 와인이래. 이거는 포도로 만든 거래.” 대국이 자신의 사무실 겸 주거지에서 대박의 염원을 다지며 와인을 나눠 마시는 초반의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사실 그냥 지나가는, 전개와 별 상관없는 장면이지만 코미디치고 영화가 워낙 웃기지 않다 보니 뜬금없어서라도 두드러진다.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동석의 넉살이 적재적소에 슬그머니 밀고 들어온달까? ‘이것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대사도 어이가 없지만 그런 와인을 커다란 맥주잔에 따라 마시는 설정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렇다. 와인은 포도로 빚은 술이고 잔을 잘 골라서 마셔야 한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잔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에서처럼 맥주잔에 따라 마셨다가는 안 마시느니 못한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향이 와인에서 중요한 요소이므로 잔은 항아리처럼 가운데가 볼록하고 개구부, 즉 입이 닿는 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공기의 흐름을 극대화해 와인을 마시려고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을 때 함께 움직이는 코로 향이 최대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설계이다.
와인잔의 대표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리델(Riedel)의 홈페이지에 의하면, 오늘날 널리 쓰이는 와인잔의 디자인은 15세기 베네치아에서 나왔으리라 추정된다.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디자인이지만 사실 중세시대에 등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 대국과 지우는 600년가량의 역사를 무시하고 와인을 맥주잔에 따라 마신 만행 혹은 야만을 저지른 셈이다. 이렇게 역사를 들먹이기 시작하면 한없이 복잡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많은 이들이 의식하는 만큼 와인잔을 갖추기가 까다롭지는 않다.
와인 매장 등에서는 레드와 화이트의 이분법을 넘어 각각의 품종에 맞춤 제작되었다는 잔까지 진열하며 소비자의 기를 죽이지만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집에서 적당히 여건을 갖추며 즐기는 수준이라면 범용인 레드 와인잔 정도만 갖춰도 화이트나 스파클링 와인까지 두루 즐기기에 큰 무리가 없다. 다만 너무 두꺼운 잔도 입에 닿는 감촉이 떨어져 바람직하지 않지만 종잇장처럼 얇은 제품도 잘 깨져 집에서 편하게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것만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와인잔을 고를 때 스템(stem), 즉 다리의 유무를 놓고 한번 고민해보자. ‘다리가 있는 잔이라야 와인 마실 맛이 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고 존중한다. 하지만 다리가 달린 잔을 한국 특유의 좁고 낮은 찬장에 간신히 집어넣느라 고생하다 보면 속 편하게 다리 없는 제품을 자꾸 찾게 된다. 다리를 잡아야 체온으로 와인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만큼 잔에 손을 많이 대는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리 있는 잔도 갖추고는 있지만 대체로 다리가 없는, 리델의 ‘오’ 시리즈 와인잔을 즐겨 쓴다. 한 점에 2만5000원 안팎이다.
대국은 실체가 없는 인물이지만 압구정 토박이로서의 연륜, 그리고 넘쳐나는 넉살로 주변을 정리하고 졸지에 초대형 성형외과의 사무장 자리를 꿰찬다. 그리고 사업의 확장을 꿈꾸지만 내부의 적에게 견제를 받고 위기에 휩싸인다. 최근 개봉작이라 줄거리를 공개하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마동석의 존재가 힘을 못 쓸 정도로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