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식 화장실주의자다. 결혼 후 지금까지 화장실 바닥에 러그를 깔고 욕조에는 샤워커튼을 달아 욕조 외엔 물이 튀지 않게 쓴다. 안방에 붙은 화장실엔 유리문이 완전히 닫히는 샤워 부스가 있으니 역시 다른 곳에 물이 튈 일이 없다.
화장실을 건식으로 쓰는 서양식이 맘에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물에 젖은 슬리퍼를 신어야 하는 습식 화장실이 싫기 때문이다. 슬리퍼 바닥에 시커멓게 곰팡이가 슬고 화장실 바닥 타일 곳곳에도 곰팡이가 끼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건식 화장실은 미끄러질 일이 없어 안전하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아직도 화장실을 습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화장실은 거실보다 조금 낮게 단차를 둔다. 화장실 바닥엔 난방 파이프도 깔려있지 않다.
우리 어머니 세대는 화장실에서 손빨래를 자주 하셨기 때문에 애초 건식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모님댁 화장실엔 플라스틱 의자와 대야, 빨래판이 늘 있었다. 요즘 세대는 화장실에서 손빨래를 하지 않을 것 같은데도 여전히 습식을 선호한다. 샤워기로 물을 뿌려 변기와 세면대를 청소하는 습관 때문인 것 같다.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도 처음엔 화장실 물청소를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미국으로 효도관광 간 노인이 호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빨래했다가 낭패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화장실을 건식으로 쓰면 물도 덜 튀게끔 쓰게 된다. 회사 후배 몇 명이 집에 놀러 왔다 간 뒤에 보니 화장실 바닥이 마치 머리라도 감은 것처럼 흥건히 젖어있었다. 집에서 화장실 쓰듯이 손을 씻고 세면대 밖에서 턴 모양이었다. 어떤 후배는 “화장실이 너무 깨끗해서 쓰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좀 미안했다.
샤워를 한 뒤 욕조나 샤워 부스 안에서 물기를 닦고 나오는 게 처음엔 불편하지만 금세 익숙해진다. 축구하고 난 뒤 운동장 수돗가에서 하는 ‘상남자 세수’를 꼭 해야 하거나 여름에 등목을 안 하면 두드러기 나는 사람들은 예외다.
변기를 락스로 닦고 물 뿌려 청소해야 개운하다는데, 변기는 안이 더럽지 밖은 딱히 더러울 게 없다. 걸레나 소독 티슈로 닦으면 그만이다. 배수관 모양이 밖으로 드러난 구형 변기는 아무래도 먼지가 쉽게 끼는데 요즘 나오는 이른바 치마형 변기는 도자기처럼 둥글어 청소하기도 쉽다.
나중에 집을 지을 기회가 있으면 화장실 단차를 없애고 마루를 깔아 바닥 난방을 할 생각이다. 노인 낙상 사고 63%가 집안에서 일어난다는데, 늘그막에 화장실에서 미끄러지거나 문턱에 걸려 넘어져 병원 신세를 지면 그거야말로 상남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