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가족과 함께 보고 싶던 영화가 몇 개 있다. 1861년부터 4년간 계속된 남북전쟁으로 인해 없어진 노예 제도와 함께 사라져버린 미국 남부의 삶을 그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직도 다 같이 보지 못했다. 거의 4시간이나 되는 이 영화는 너무 길어서 같이 안 보겠다고들 했다. 또 자신이 산타클로스라고 주장하는 할아버지가 뉴욕시에 있는 메이시 백화점의 산타클로스가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34번가의 기적’도 같이 못 봤다. 너무 뻔한 해피 엔딩을 나 외에 다들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데믹을 같이 견뎌내면서 생긴 관대함이었을까? 2020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이 내가 원하는 영화를 하나 같이 봐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인 ‘멋진 인생’을 선택했다.
지미 스튜어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이 영화는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는 멋진 건축가를 꿈꿨지만 자신이 태어난 작은 마을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조지 베일리의 이야기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했던 ‘베일리 은행(Bailey’s Building and Loan)’을 물려받게 된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대학 입학과 함께 마을을 떠나려 했던 그의 발을 묶고 원하지 않았던 은행 일까지 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그를 사랑했던 메리와 결혼한 날, 조지는 잠시만이라도 마을을 떠나려 한다. 2000달러(현재 액수로 계산하면 3만달러가 넘는 돈)를 갖고 신혼여행 길에 오른 조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은행 앞에 줄 서 있는 많은 사람을 보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신혼여행에 쓰려고 모아뒀던 돈으로 자신의 돈을 인출하려는 예금주들에게 나눠준다. 즉, 은행을 하루아침에 망하게 할 수 있는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을 자신의 돈으로 막은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지난달, 세상은 뱅크런을 이렇게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영화 속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를 살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뜯지 않은 병에 담긴 생수의 청결함. 아스피린 라벨이 붙은 병 속에 있는 알약이 하나하나 다 아스피린이라는 것. 거스름돈으로 받은 5달러짜리가 위조지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내가 은행에 예금해 놓은 돈을 언제나 내가 원할 때 찾을 수 있다는 것 등등. 그러나 아주 많은 예금주가 한꺼번에 그들의 돈을 다 인출하겠다고 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은행은 세상에 없다. 고객들이 예금한 돈의 대부분을 그대로 금고에 보관해 놓는 은행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의 현찰을 준비해두고 나머지는 융자나 채권 등에 투자하면서 예금주들에게 지불하는 이자보다 투자로 취득하는 이자가 더 많게 하는 것이 은행 일이니까.
캘리포니아에 본사가 있는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지난달 8일에 추가 주식 발행을 통해 22억5000달러를 조달하겠다고 발표했다. 갑자기 증가한 예금주들의 인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멋진 인생’에서 조지가 예금주들을 안심시켰던 것처럼 SVB 경영진은 예금이 안전하다는 말을 많은 고객들에게 전했지만, 인출은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3월 9일 단 하루 만에 은행의 자산 20% 정도인 420억달러가 인출되면서, SVB의 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더구나 직접 은행에 가서 돈을 요구했던 옛날과는 달리 온라인 인출과 송금 등이 가능해진 오늘의 금융 환경은 상황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 캘리포니아주 금융 감독 기관은 그다음 날, 3월 10일에 SVB의 문을 닫고, 연방 예금 보험 공사에 SVB 관리를 요청했다. 이틀 후, 12일에는 뉴욕주 금융 감독 기관이 시그니처 은행도 같은 이유로 문을 닫게 했다. 2023년 은행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믿는다는 것은 과연 뭘까? 오래전 만났던 한 대학원생 B의 말이 떠오른다. 이과를 전공한 그는 자신의 눈으로 관찰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때 빛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인 내가 뭐라고 답을 할 수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아무리 시력이 완벽한 사람이라도, 확인에 재확인을 고집하는 과학자들이라도, 모든 것에 B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거래하는 은행의 안정성을 개인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경영진의 주장을 믿든지 은행을 감독하는 정부 기관의 보고서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예금주들은 어느 정도의 액수까지(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25만달러까지) 보험 혜택을 받지만, 주주나 채권주들은 그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결국 본인의 분석에 따라 혹은 믿음이 가는 애널리스트의 추천에 따라 투자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금이나 투자와 같이 인간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지속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상이나 표정 그리고 눈초리 같은 것들이 어느 정도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리라. 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친구와의 관계나 부부 관계 등은 오랫동안 같이하면서 쌓게 되는 상호 존경, 신뢰, 신임 등으로 더 탄탄해진다고 본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B의 주장은 확실히 틀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믿음과 신뢰만이 의심 없이 음식을 먹는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배우자를 믿는 것 같은 참으로 소중한 것들까지 가능케 해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이는 27년 넘게 함께해온 아내 그레이스다. 그러나 그녀를 내가 믿는 이유 중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랜 세월을 같이하면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전적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결국 관찰과 확인할 수 있는 팩트가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