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느 날 내가 딱 한 시간만 마시고 깨끗이 헤어지자고 했다 한다. 운동을 마치고서 딱 한 시간만. 민망해서 웃음이 나왔다. ‘깨끗이’라는 형용사가 참으로 구차하고도 간절해서. 얼마나 술이 마시고 싶었으면, 그런데 얼마나 여유가 없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우리는 저녁마다 함께 요가를 하는 사이였고, 요가 스튜디오 옆에는 술맛 당기는 술집이 있었다. 술이 맛있거나, 안주가 괜찮거나, 분위기가 좋으면 술맛이 당기지 않나? 그 집에는 다 있었다. 생맥주도 뭔가 달랐고, 안주도 맛깔스러웠고, 눈웃음을 주고받는 부부 사장님의 팀워크가 정겨웠다.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그분들이 서로를 보며 웃고, 손님들을 보고 웃고 그러는 게 좋았다.
그러니 술맛이 좋을 수밖에. 이 술집을 떠올리면 나도 부부 사장님들처럼 잔잔하게 웃게 된다. 운동하고서 여기에서 한잔하는 게 우리의 간헐적 루틴이었다. ‘간헐적’이라는 말과 ‘루틴’이라는 말은 물과 기름 같지만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요가를 하고 옆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일관성 있지만 언제 마실지에는 규칙이 없었기에. 그런데 ‘딱 한 시간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마셨어요? 내가 물었다. 정말 열 시에서 시작해 열한 시에 끝냈다고 한다.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고 그녀가 말했다. 벌떡 일어난 내가 열한 시가 되기 일 분 전이라며 이제 가자고 했다고. 그러고는 술병에 남아 있던 술을 잔에 모두 따르고 선 채로 마셨다고 한다. 한 모금까지 아껴 마셨다고.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절도 있는 사람이 아닌데… 시킨 술을 다 마셔야 술집을 나설 수 있다는 주의도 아니고. 우리는 거기서 주로 생맥주를 마셨기에 술병에 남아 있던 술을 따르는 것도 정황상 맞지 않았다.
생맥주 아니고요? 라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도수가 좀 되는 달달한 술이었다고 했다. 그… 이름이 뭐였더라? 촌스럽게 생긴 병인데. 아! 그 술이 있었지.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 술이라면 마지막 방울까지 털어 마실 만하다. 한때 내 삶에는 그 술이 있었다. 처음 그 술을 마신 것도 그 집이었고, 동네에서 그 술을 파는 데도 그 집뿐이었다.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냐면, 그 술을 파는 술집을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요가 스튜디오 옆 술집에서 더 이상 그 술을 안 팔아서. 그 술을 찾다가 옆 동네에 있는 막걸리 전문점에 가게 됐고, 막걸리에 빠졌다. 전국에서 올라온 팔도 막걸리들이 모여 있는 그 집의 막걸리 큐레이션과 현란하고도 웃음이 나는 사장님의 막걸리 프리젠테이션에 꽂혀서 매주 막걸리집에 갔었다. 역시 술집은 주인의 지분이 절대적이다! 똘똘이 스머프를 닮은 막걸리집 사장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게 2016년의 일이다.
촌스럽게 생겼다는 그 술의 이름을 요가 메이트이자 술친구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안다. 당연하지 않나? 한 시절을 함께했는데. 고택찹쌀생주. 이게 그 술의 이름이다. 나를 옆 동네 막걸리집에 가게 했고, 그래서 당시 마실 수 있는 모든 막걸리를 마시게 했던 술. 내 인생의 술이라고까지는 못 하겠어도 그 시절의 술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그 술. 나는 이 술을 마셔야 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완주에 있는 술도가에 연락해서 택배로 받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박스를 사야 하는데, 열 병이다. 집에는 이 술 저 술이 가득하고, 밖에서도 자주 마시는데, 여기에 열 병을 더한다? 막걸리나 전통주를 살 때의 고질적인 문제다. 백화점이나 전통주 전문점에 가도 없어서 여러 번 허탕을 쳤다. 그러다 한 전통주 바틀샵에서 고택찹쌀생주를 취급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갔는데, 없었다. 결국엔 마셨다. 이 술을 파는 식당을 찾아서 한잔한 후 집으로 가져와서.
달고 쓰다. 콤콤하고 구수한 누룩의 냄새가 뇌의 자율신경을 활성화시킨다. 달기만 한 건 아니고 약간의 산미. 나는 이 달고 쓴 술을 도토리묵과 함께 먹었다. 꼬막이 이 술에 착 붙었었는데 지금은 꼬막 철이 아니고, 메밀묵과 먹었으면 했지만 집에는 도토리묵이 있었다. 참나물과 세발나물에 오미자청을 약간 넣고 무친 도토리묵이 어쩐지 어울릴 것 같았지만 나물도 없었다. 김치와 곱창김을 넣어 무친 도토리묵도 나쁘지 않았다. 술의 단맛에 김치의 신맛이 더해지고, 술의 쓴맛에 묵의 구수한 맛이 겹치고, 물속을 유영하는 해초처럼 입 안에서 풀어지는 곱창김까지. 사장님 내외의 미소와 웅웅대는 술집의 노이즈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아찔했다. 술병에 적힌 도수는 12도라는데 믿을 수 없다. 와인보다 도수가 낮다고? 체감 도수는 20도쯤 되는 느낌이라서. 마시는 즉시 술이 후욱 하고 오르는 기분이 드는 게 이 술이다. 체감 기온도 그렇지 않나? 5도라고 해도 영하로 느껴지는 날이 있는 것이다. 찹쌀이 많이 들어가 진해서 그런가? 상상 속의 고택이 이발소 그림 풍으로 그려진 라벨에는 찹쌀 34.06%라고 쓰여 있다. “순수 국산 찹쌀과 우리밀 누룩을 주재료로 15일간 숙성 과정을 거친, 효모균이 살이 있는 12%의 깔끔한 생주입니다.”라고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런 엉성한 그림과 정돈되지 않은 폰트의 배치 같은 게 아쉽다. 송명섭 막걸리만 해도 큰돈을 들이지 않은 듯하지만 얼마나 멋스럽나 싶고.
나는 이 맛있는 술을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전날 읽은 술에 대한 이야기도 떠올랐는데, 한 모금 남은 술을 ‘스왱크(swank)’라고 한단다. ‘허세’ ‘화려함’이라는 뜻을 가진 swank와는 다르게 이때의 swank는 방언이다. 양에 따라서 ‘리틀 스왱크(little swank)’와 라지 스왱크(large swank)’로도 부른다고. 비슷한 뜻으로 ‘수퍼내큘럼(supernaculum)’도 있다. ‘손톱 위’를 뜻하는 라틴어인데 영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부사로는 ‘최후의 한 방울까지’이고, 명사로는 ‘최상의 것(술)’.
최후의 한 방울까지 마신다면 그건 최상의 술이라고 말하는 단어가 supernaculum인 것이다. 고대 잉글랜드에서는 술이 훌륭하면 다 마신 뒤 잔을 뒤집어 마지막 방울을 손톱에 떨구는 관습이 있었다고. 이걸 ‘드링크 수퍼내큘럼(drink supernaculum)’이라고 부른다. 나는 손톱에 떨구지 않았을 뿐 최선을 다해 마지막 방울을 ‘드링크’했다. 그 순간 최상의 술이었을 이 술로 오늘 밤도 부드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