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전 7시 40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카페 런던베이글뮤지엄. 어림잡아 100명은 돼 보이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담요를 두르거나 캠핑 의자에 앉은 사람도 보였다. 서둘러 무리에 뛰어들었다. 뒷사람들의 말이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 되는 거야?” “오픈런 안 하면 3~4시간은 기다려야 된대.”
10분 뒤 대기 번호표를 받을 수 있는 기계가 켜졌고, 8시 정각에 가게 문이 열렸다. 첫 손님은 6시 30분쯤 도착했다는 28세 여성. 10여 분 만에 15만원어치 베이글을 사서 가게를 나선 그는 “워낙 유명해서 ‘한번 먹어봐야지’ 싶어 왔다. 생각보다 (기다리는 게) 할 만했다”고 했다.
8시 54분에 입장한 가게 안은 역시나 북적였다. 사람들에게 떠밀리며 베이글을 몇 개 집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니 9시 10분이었다. 카페 앞은 여전히 북새통이었다.
비슷한 시각 50m가량 떨어진 곳에서도 50명가량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와 패션 브랜드 메종마르지엘라가 협업한 제품을 파는 팝업스토어였다. 오전 11시에 문을 여는데 8시쯤 도착한 김모(30)씨는 70번대 번호표를 받았다고 했다. “인기 모델은 금방 품절됩니다. 오픈런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인기의 척도가 된 ‘오픈런’
‘오픈런’은 가게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리다 영업이 시작되자마자 달려가 물건을 사는 행위를 의미한다. 2019년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겨난 이 신조어가 요즘엔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다. 1500원짜리 편의점 빵부터 수천만원짜리 명품 가방까지 대중의 관심이 몰리는 곳에는 항상 오픈런이 존재한다. 오픈런이 곧 인기의 척도인 셈이다.
오픈런 현상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부터 두드러졌다. 2020년 5월 명품 브랜드 샤넬이 가격 인상을 예고하자, 샤넬 매장이 입점한 백화점에는 개장 전부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715만원짜리 클래식 미디엄 백이 곧 820만원으로 오른다고 하니, 가격 인상 전에 구매하면 105만원 이득이라는 논리였다. 새벽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리고, 백화점 셔터가 채 다 올라가기도 전에 질주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비슷한 시기에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를 얻기 위해서도 오픈런이 필수였다.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폭발한 것. 한 대형마트가 게임기 45대를 선착순으로 팔기로 하자, 1000여 명이 몰리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코로나 장기화로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폭발하고, 부품 조달이 어려워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는 원인 분석이 나왔다. 당시 대신 줄을 서주는 오픈런 대행 아르바이트가 성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몇 인기 상품에 국한됐던 오픈런 현상이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를 중심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MZ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인스타그램에는 ‘오픈런’이란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8만 건 넘게 올라와 있다. 명품뿐만 아니라 인기 캐릭터 스티커가 들어 있는 빵, 유명 연예인이 출시한 소주, 금리가 높은 예·적금 등 다양한 상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오픈런, 오픈런, 오픈런을 하고 있다.
시장조사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2022년)에 따르면, 응답자의 47.4%가 “오픈런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과 2030세대, 평소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할수록 오픈런 경험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식당·음식점(22.7%), 놀이공원·테마파크(21.7%), 카페·베이커리(15.7%)에서 오픈런을 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복수 응답 가능). 같은 해 롯데멤버스가 리서치 플랫폼 라임을 통해 전국 20~40대 2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2.2%가 “오픈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성취감’ ‘특별한 경험’이 매력
오픈런 현상의 이유는 뭘까. 먼저 기업의 마케팅적 측면이 크다. 물량이나 판매 기간, 장소를 한정하는 방식으로 상품의 희소성을 높여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이른바 ‘헝거 마케팅’이 오픈런 현상을 이끄는 것이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경영학)는 “소비자들은 헝거 마케팅으로 인한 오픈런 행렬을 보고 ‘이 상품이 저렇게 줄을 서서 살 정도로 인기가 많구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며 “그 결과 밴드왜건(유행에 동조해 상품을 구매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오픈런 줄은 더 길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스타벅스는 매년 증정품을 주는 행사를 할 때 오픈런 대란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고객 편의를 위해 오픈런을 없애고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도입하자, 행사에 대한 관심과 화제성이 뚝 떨어졌다.
소비자는 왜 오래 기다리는 고생을 자처할까. 트렌드모니터 조사에서 가장 많은 응답은 ‘남들보다 먼저 구매했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서’(45.6%)였다. ‘더 비싼 가격으로 되팔 수 있기 때문에’(43.8%),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구하기 힘든 희소성 때문에’(40.5%) 등이 뒤를 이었다. 롯데멤버스 조사에서는 오픈런 경험 여부에 따라 이유가 갈렸다. 경험자들은 ‘오픈런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31.4%),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워서’(30.9%)라고, 비경험자들은 ‘더 비싼 가격으로 되팔 수 있어서’(43.6%), ‘SNS에 인증하기 좋아서’(28.1%)라고 답했다.
실제 오픈런 현장에서 만나본 이들 중 다수는 “오픈런은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 베이글 카페 앞에서 만난 대학생 이모(23)씨는 카페를 배경으로 친구들과 연신 셀피(자기 사진)를 찍었다. 그는 “기다리면서 친구들과 수다 떨고 사진 찍는 게 재밌다”며 “나중에도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오픈런을 하는 것을 보고 왔다는 모녀도 ‘기다리는 게 힘들진 않느냐’는 질문에 “이게 다 추억”이라고 했다. 선글라스 매장 앞에서 만난 박모(25)씨는 “어느 매장에 어떤 제품이 풀리는지 등 정보력과 일찍 와서 줄을 서는 부지런함 등 나의 노력으로 인기 상품을 ‘득템’ 했을 때 기분이 짜릿하다”고 했다.
이은희 인하대 교수(소비자학)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어떤 유행이 생기면 굉장히 빨리 추종하는 특징이 있다는 점, 치열한 경쟁을 뚫고 특별하게 얻은 제품에 대해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점 등이 오픈런 현상을 심화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특히 오픈런 현상을 MZ세대가 주도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오픈런은 돈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MZ세대에게 더 잘 어울린다. 시간과 정성만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들에겐 매력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픈런 정보 교환부터 구매한 제품 사진의 SNS 전송까지 오픈런 자체가 MZ세대에겐 하나의 놀이 문화가 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