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 맨 오브 갓'에서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루크 커비)가 껌을 집어들고 있는 모습. /RLJE Films

고작 껌 한 점에 연쇄살인마가 입을 연다. 1985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행동과학부가 범죄 프로파일링을 시도한다. 연쇄살인범과 인터뷰가 필요한 가운데, 모든 요원들이 꺼리는 최악의 인물이 있다. 몇 명을 죽였는지조차 채 밝히지 않은 테드 번디(루크 커비)다. 머리가 좋은 데다가 연방수사국을 불신해 다루기 곤란한 번디는 결국 부서 신참인 빌 해그마이어(일라이저 우드)에게 넘어간다.

해그마이어는 매우 신중하게 번디에게 접근하니, 일단 서신 교환부터 시작한다. 직접적인 목적을 밝히기보다 자신과 관심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해그마이어의 편지를 읽고 번디는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되지만 바로 대화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두뇌 회전이 굉장히 빠른 번디는 여차하면 해그마이어를 기만할 생각을 가지고 그를 만난다. 하지만 해그마이어가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확신을 갖자 대화를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껌을 반입해 달라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포장지 때문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간수의 열쇠를 본뜨거나 자물쇠 구멍을 막을 수 있기에 교도소에서는 껌이 금지되어 있다. 해그마이어가 껌을 가져다주자 번디는 만족하고, 비로소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대체로 ‘그까짓 것’이지만 재소자에게는 귀한 껌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핀란드의 키리키(Kerikki)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의 타르로 만든 껌이 발견되었다. 이빨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5000년은 묵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야 및 아즈텍, 그리스인들도 각각 천연고무인 치클과 유향나무의 수지를 가공한 매스틱 검으로 오늘날 껌의 원형을 누렸다. 이처럼 각기 다른 인류 문명에서 다른 재료를 통해 비롯된 껌의 본격적인 현대화와 상업화는 미국에서 일어났다. 미국 원주민들이 씹은 가문비나무 수액의 수지를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인들이 본떠 껌을 제조한 것이다. 그리고 1848년, 존 B. 커티스가 ‘메인주의 깨끗한 가문비나무 껌’이라는 명칭으로 최초의 시판 제품을 개발했다. 1850년쯤에는 석유에서 추출한 파라핀을 쓴 껌이 개발돼 천연 재료를 쓴 것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심지어 단맛 보충을 위해 설탕 접시를 두고 계속 퍼먹으면서 껌을 씹는 문화도 있었다.

요즘 팔리는 껌이 개발된 것은 1860년대이다. 멕시코의 전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뉴욕의 토머스 애덤스에게 보낸 치클이 1871년 ‘애덤스 뉴욕 추잉검’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것이다. 이후 블랙잭(1884), 치클렛(1899), 그리고 해그마이어가 번디에게 반입해준 리글리스 스피어민트(1899)가 차례로 시장에 등장해 오늘날까지도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해태제과가 1956년 최초로 해태풍선껌을 출시했지만 주도권은 롯데에 넘어갔다. 1967년 한국 롯데를 설립해 쿨민트껌, 바브민트껌, 주시민트껌, 슈퍼맨풍선껌, 오렌지볼껌 등 6종의 제품을 출시했다. 이후 롯데껌의 대표 제품 3총사로 자리 잡은 쥬시후레쉬, 후레시민트, 스피아민트와 향기를 강조한 이브껌이 1972년에 출시되었다. 1980년대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기능성 껌은 1994년 해태의 덴티큐, 2000년 롯데의 자일리톨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롯데가 자일리톨을 통해 국내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껌 한 점으로 발을 내디딘 둘의 관계는 애매하게 막을 내린다. 번디의 사형 승인이 예상보다 아주 빠르게 나니, 그는 미결 사건에 대해 자백하겠노라며 시간을 끌려 한다. 하지만 번디가 어떤 시도를 하든 사형은 집행될 예정이었으니, 해그마이어는 그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는 의사를 밝혀 형 집행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번디는 친해진 해그마이어에게 자신이 저지른 온갖 살인의 세부 사항을 밝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는 1974~78년에 30건이 넘는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지만 이조차도 사실 확실하지 않은, 희대의 악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