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잎이 눈처럼 떨어지는 서울 성동구 송정동 뚝방길.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불리는 서울숲과 카페거리에서 살짝 떨어진 이곳에 ‘1유로 프로젝트’라고 적힌 4층짜리 낡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뚝방길을 따라 걷던 사람들은 이 건물에 들어와 커피나 차를 마시고, 필요한 세제와 비누를 구입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입주한 브랜드들이 조금 특이하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샴푸바 같은 제품을 만드는 ‘베러 얼스’, 달리기 애호가들을 위해 사물함을 제공하고 관련 제품들을 소개하는 ‘런더풀’ 등 흔히 볼 수 없던 브랜드들이다. 이들 17개 브랜드는 이 건물에 3년 간 각각 1유로(약 1435원)만 내고 입점했다.
1유로 프로젝트는 유럽에서 시작된 도시재생이다. 인구 감소로 방치된 집이나 건물을 정부가 민간에 1유로에 빌려주고, 그들은 건물을 자비로 개발해 수익을 갖는 프로젝트다. 정부 자금 없이 건물뿐 아니라 주변까지 개발할 수 있기에 성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꼽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국민 정서와 법리상 정부가 민간에 거의 무료로 건물을 내어준다는 게 불가능해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2월 송정동에 국내 최초로 ‘1유로 프로젝트’가 문을 열었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부터 이 꿈을 간직해온 최성욱(40) 오래된미래 공간연구소 대표와 건물을 1유로에 선뜻 내놓은 착한 건물주 정은미(57) 블룸앤코 대표 덕분이다. 1유로 프로젝트 앞에서 그들을 만났다.
◇1유로의 가치
-어떻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나?
정은미 : “3~4년 전, 송정동 뚝방길에 반해 이 건물을 상업용으로 구입했는데 코로나 등으로 뭘 할 수가 없어 비워 놓았다. 임대를 주기엔 주변에 상권이 없었고 내가 직접 무언가를 하기엔 목적성이 없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2021년 당시 송정동 도시재생센터장으로 있던 최성욱 대표를 만났다. 이 건물이 주변에서는 꽤 큰 건물이다. 위치도 뒤로는 문화복합센터가 들어오고, 옆으로는 재개발이 예정된 코끼리 빌라가 있어 도시 재생 측면에서는 중요한 곳이라고 했다. 그때 ‘1유로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다.”
최성욱 : “처음 이 건물을 봤을 땐 무서웠다. 낡고, 거미줄도 있었다. 그런데 도시 재생에는 탁월한 자리라고 봤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 정 대표에게 ‘건물을 3년간 1유로에 빌려달라’고 했다. 사실 어디 가서 잘못 이야기하면 빰 맞을 이야기다. 남의 멀쩡한 건물을 공짜로 빌려달라니. 그런데 정 대표는 너무 쉽게 ‘알았다’고 하더라. 보통 건물주를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든데, 그 과정이 제일 쉬웠다.”
-왜 금방 수락했나.
정 : “단기적으로는 손해가 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건물에 입주하는 사람들은 직접 매장 인테리어를 한다. 그들에겐 좋은 브랜드들을 알릴 수 있는 기회고, 나는 젊은 대표들과 손님들로부터 좋은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날 ‘착한 건물주’라고 부르지만, 난 ‘현명한 건물주’가 됐다고 생각했다.”
-입점 브랜드는 어떻게 선정했나.
최 :”처음에는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고 1유로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만 하고 서류를 받았다. 그랬더니 76개 브랜드가 신청을 했더라. 그다음엔 이 주소를 주고, 빈 공간을 투어시켜 준 후, 어떻게 공간을 실현시키고 싶은지에 대한 제안서를 받았다. 그 다음 대면 인터뷰를 통해 총 17개 회사를 선정했다. ‘서울가드닝클럽’의 ‘가드닝을 노동의 영역이 아닌 스포츠의 영역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 등이 인상적이었다.”
-입주 브랜드 중에는 화장품 ‘핑크 원더’처럼 17년간 온라인을 통해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브랜드들도 있다.
최: “여기 들어오는 브랜드들의 의무 사항은 사람이 상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재화만 주고받는 공간이 아니라,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공간이다. 그 제안은 사람의 에너지로 전달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대면 면접을 할 때 심사도 그 대표들이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느냐였다.”
◇최성욱 : 네덜란드에서 배운 도시 재생의 꿈
-원래 꿈이 건축가였나.
“고등학교 때 TV에서 ‘빌딩 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어떻게 설계하는지를 알려주는데, 전율을 느꼈다. 건축학과에 진학했고, 서촌에서 한옥을 설계하는 회사를 다녔다. 그때 서촌 주거공간연구회에서도 활동했다. 서촌 한옥 개발을 놓고, 누군가는 부수고 새로운 것을 짓자고 했고, 누군가는 보존하면서 불편한 걸 참고 살자고 했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개발 방법을 찾고 싶어 네덜란드로 유학을 결심했다.”
-1유로 프로젝트를 어떻게 알게 됐나.
“2013년부터 4년간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면서 다양한 성공 사례를 접했다. 로테르담의 슬럼가에 있던 오래된 아파트가 고급 주거단지가 되고, 암스테르담의 폐항구가 아티스트들의 공방이 됐다. 델포트공대에서 건축도시재생을 배웠고, 바코드 건축사무소에 실무를 익혔다. 한국에 적용시켜보고 싶어 귀국했다.”
-귀국해보니 어떻던가.
“원래는 고향인 대전에서 관련 사업을 준비 중이었는데, 서울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사업 자율성이 있는 자리라, 내가 하고 싶은 걸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수락했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한계를 많이 느꼈다. 관에서 하는 사업은 한정된 자본으로 하다 보니 간판 바꾸기 같은 수박 겉핥기식 사업이 많았다. 1유로 프로젝트도 그때부터 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관의 건물이 비었다고 민간에 1유로에 빌려주면 특혜 시비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다 송정동 도시재생센터 자리가 나고, 일단 이곳으로 옮겨 할 수 있는 게 없나 고민하던 중 정 대표를 만났다. 1유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센터장을 그만두고 오래된미래 공간연구소를 열었다.
◇정은미 : 아버지에게 배운 두 번째 기회
정 대표의 아버지는 정경진 종로학원 창업자다. 15년 간 전업주부로 지낸 그는 가업을 물려 받아 8년간 종로편입학원아카데미 원장을 지낸 후, 현재 꽃 오감 디자인 사업인 ‘블룸앤코’, 기획 이벤트 공간 ‘무드랩’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력이 특이하다.
“어릴 땐 선택권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로 불렸다. 15년 정도 지나고 아이들이 좀 크자 ‘나만의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편입학원이라는 블루오션이 보였다. 예전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종로학원은 학생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편입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찾는 사람으로서 학원을 운영하게 됐다.”
-해보니 어떻던가.
“공부는 습관이다. 공부를 안 하던 아이들은 책상에 5분 앉혀 놓기도 힘들다. 반대로 잘하는 학생들은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게 낫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딱 제공하면 알아서 잘한다. 이건 지금까지 내 경영 철학이 됐다.”
-학원은 왜 그만뒀나.
“학원을 운영하는 건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학원장이기 전에 수학 일타 강사였다. 학원은 아버지처럼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해본 사람이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을 보면서도 깨달은 게 많았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편입학원에 들어온 학생들이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찾았나?
“여행도 다니고, 전시회도 다니고, 잘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많이 배웠다. 그러다 내가 꽃과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꽃다발과 꽃바구니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후 제품과 공간 디자인으로 확대했고, 하남 스타필드의 조경, 더케이트윈타워 리모델링 등에 참여하게 됐다. 그러다 2016년 무드랩을 만들었다.”
-무드랩은 무엇인가.
“일종의 ‘살롱’이었다. 사업을 하며 조향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작가 등을 많이 만났는데, 정말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친구들이 많더라. 그래서 그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자리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말 크리에이티브한 친구들은 조직 내에서는 그 역량을 못 담아 낸다. 반면, 혼자 일하기에는 인맥과 장소가 부족하다. 내가 그런 플랫폼 역할을 대신하고 싶었다.”
-듣다 보니 1유로 프로젝트와 비슷하다.
“1유로 프로젝트는 무드랩의 확대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건물에는 17개 회사가 입점해 있지만, 3층 커뮤니티 공간은 비어 있다. 이곳이 소통의 공간이다. 무드랩을 통해 지금은 성수동 핫플레이스가 된 ‘맛차차’, 600억원대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라이트 브라더스’ 등이 탄생했다. 1유로도 이런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앞으로의 목표는?
최 : “먼저, 1유로 프로젝트를 제주도 등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고 싶다. 두 번째로 서울 서부역 쪽에 커뮤니티 호텔도 구상하고 있다. 낙후돼 비어 있는 공간들을 민박이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그 주변 카페나 헬스장들을 호텔의 인프라처럼 연결하는 작업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도시 재생 프로그램이다.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니 사용할 수 있는 객실이 1000개가 넘더라. 동네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 : “내가 가진 경험과 네트워크로 젊은 세대가 꿈을 펼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자문그룹을 더욱 조직적으로 만들고 싶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친구들이 1000만~2000만원 같은 시드 머니가 부족해 좌절하는 경우가 많더라. 그들이 싹을 틔울 수 있게 물과 바람과 공기가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오늘(8일) 1유로 프로젝트 앞에서는 ‘그린 하트 바자회’와 ‘무제한 플로깅 대회’가 열린다. 그린 하트 바자회는 송정동 주민인 가수 바다와 조권이 친구 유진과 함께 애장품을 판매하는 행사다. 수익금은 지진 피해를 본 튀르키예·시리아의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된다. ‘무제한 플로깅 대회’는 서울숲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플로깅(쓰레기를 주우면서 조깅하는) 클럽인 ‘SSJ 모닝클럽’이 그 무대를 송정동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꿈이 봄처럼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