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대로변에는 ‘정치를 새롭게, 국민을 이롭게’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진보당이 4월 전북 전주을 국회의원 재선거 당선을 자축하면서 내년 총선에서 더 많은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겠다는 뜻을 담아 내건 것이다. 근처를 지나던 한 행인은 “진보당이란 정당을 아느냐”고 묻자 “진보당? 정의당이 이름을 바꿨느냐”라고 되물었다.
진보당은 종북 논란이 일었던 통합진보당의 내란선동 사건 10년 만에 간판을 새로 갈고 국회에 입성했다. 2014년 12월 위헌정당해산심판 결정에 따라 강제 해산된 정당이 이름을 바꿔 다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인 것이다.
◇어떻게 당선 가능했나
진보당 당원의 조직력과 충성도는 거대 양당의 태극기, 개딸을 능가한다. 2022년 정당 후원금 규모를 보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는 진보당(16억2000만원)은 민주당(4억5000만원), 정의당(8억8000만원)을 뛰어넘어 2위에 올랐다. 국민의힘(17억6000만원)과는 1억원 남짓 차이가 났는데, 당원 규모 등을 따지면 진보당의 세력 규합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진보당은 이번 전주을 선거를 2~3주 앞두고 총동원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선거는 초반만 해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진보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무소속 후보를 따라잡고 소폭 앞서자, 전국 조직을 동원해 전주에 집결했다. 통진당 출신이자 호남에 정치 기반을 둔 김선동, 오병윤 전 의원이 앞장섰고 노조, 농민 등의 조직이 붙었다. 그 결과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39.07%를 얻어 무소속 임정엽 후보(32.11%)를 이겼다. 약 3000표 차이. 지역 정가에서 “1500명이 위장전입했다더라”는 소문도 나돈다.
정치권 주변에선 “진보당의 국회 입성은 결국 민주당 탓”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번 재선거가 민주당 이상직 전 의원의 구속으로 생긴 데다,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로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으면서 진보당에 제도권 정치 기회를 다시 열어줬다는 뜻이다. 특히 내년 총선을 1년 앞두고 이 지역에 출마하려는 민주당 인사들이 진보당 선전에 일부러 손놓고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야권 관계자는 “최근까지 민주당이었던 민주당 색을 띤 무소속 후보가 당선이 되면 복당할 수도 있고, 민주당 후보 입장에서는 피곤하지 않겠냐”며 “진보당 후보는 다음 총선에서도 쉽게 이긴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통진당 ‘그때 그 얼굴’이 핵심
국정원은 2013년 통진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석기 주도의 지하혁명 조직(RO)이 대한민국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남한 공산주의 혁명’을 도모했다며 내란음모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당시 국정원이 확보한 녹취록에는 이석기가 북한과의 전쟁 시 후방을 교란하는 방법 등을 논의한 내용이 담겼다. “전시 상황에 우리가 통신과 철도, 가스, 유류 같은 것을 차단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 “정치·군사적 전쟁을 준비하자” 등이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내란음모 행위를 인정해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2015년 이석기에 대해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동조한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을 확정했다.
진보당은 “우리는 통진당 후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통진당 핵심이던 이석기·이정희가 당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진보당의 얼굴을 보면 통진당과 다르지 않다. 당시 활동했던 인사들은 민중당을 지나 진보당에서도 함께하고 있다. 내란선동 사건 당시 통진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상규, 김재연 전 의원 등은 각각 서울 관악, 경기 의정부에서 진보당 이름으로 출마를 준비 중이다. 경기 성남이 근거지인 김미희 전 의원은 출마 계획이 없지만 당 활동은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다. 진보당 관계자는 “내년 총선에서 최대한 많이 당선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통진당 주류 인사들도 강성희 의원 보좌진으로 속속 여의도에 모이고 있다. 대부분 경기동부연합 주사파로 민노당, 통진당, 민중당의 핵심이던 인물이다. 이석기·이정희·김재연 전 의원의 보좌진을 지내기도 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다. 야권에선 이석기·이정희가 언제 또 등장할지 모른다는 말도 나온다. 강성희 의원도 국회 입성 일성이 “이 전 의원의 명예회복과 복권”이었다. 문재인 정부 말 이석기는 전자발찌를 부착하고 가석방됐다. 올해 5월 가석방 기간이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된다. 작년 말, 올해 초 이석기는 여의도 인근에서 여러 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이정희는 진보당이 민중당이던 시절인 2020년엔 반백의 모습으로 선거운동 지원에 나서기도 했지만 최근엔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 관계자는 “헌재가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정당이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니 아이러니”라고 했다.
◇민주당은 또 침묵
민주당은 2012년 총선 전 통진당과 정책 합의는 말할 것도 없고 69개 선거구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까지 했다. 통진당이 힘을 키운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통진당은 당시 총선에서 13석을 얻었다. 통진당 강령에 국보법 폐지, 한미 동맹 파괴 등이 명시돼 있었지만, 민주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내란선동 사건이 터지자 민주당 배후론, 책임론이 거론됐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우리가 종북 세력을 키웠다” “야권 단일화는 선거 공학적 선택”이라는 자성이 나왔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번 진보당의 국회 입성에 공식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표가 강성희 의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인사를 건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통진당은 반국가단체”라면서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 연루 의혹, 국회 보좌진 간첩 의혹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안보에 구멍이 뚫린 상황이며 국회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