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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 22일 빙하를 타고 서울 우이천(川)에 떠내려온 공룡 한 마리. 대한민국 만화사(史)에서 가장 유명한 어린이 만화 주인공 ‘둘리’가 오늘로 정확히 탄생 40주년을 맞는다. 정신 연령 7세의 이 초록색 케라토사우루스는 만화 잡지 ‘보물섬’ 연재를 시작으로 TV 만화영화·극장용 애니메이션·뮤지컬·게임 등으로 변주됐고, 1995년에는 국내 만화로는 처음 우표로도 발행됐다. 캐릭터 상품만 2000종에 달하는 명실상부 국가대표 캐릭터. 미국에 미키마우스, 일본에 도라에몽이 있다면 한국에는 둘리가 있는 것이다.
올해 40주년을 맞아 극장판 영화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이 다음 달 재개봉한다. 1996년 첫 상영 당시 전국을 휩쓴 추억의 작품을 4K급 화질로 손질해 선보인다. 서울 둘리뮤지엄에서는 40주년 특별전 ‘둘리가 고길동 나이가 되었을 때’를 하반기 개최할 예정이다. “둘리의 역사와 어린 시절 둘리를 보며 자란 세대의 삶을 함께 돌아보고자 한다”며 “둘리의 탄생 연도와 같은 나이의 일반인을 가상의 화자로 설정해 연대기를 함께 걷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둘리는 여전히 살아있으며, 자라나고 있다.
◇둘리는 원래 까칠했다
둘리는 그리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반항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도둑을 쫓는 장면에서도 ‘도둑놈 잡아라!’라고 대사를 쓸 수 없던 시절, 함부로 반말하면 안 되던 그 시절, 심의가 둘리를 불러냈다. 만화가 김수정(73)씨는 “애들은 원래 천진하고 불손하기도 한 법인데 나라가 용납을 안 하더라”며 “동물을 의인화하면 심의가 완화되니까 독특한 동물을 찾다가 공룡을 골랐다”고 말했다. 게다가 공룡은 1억년 전 존재이기에, 조금 버릇없이 굴어도 나이로 트집 잡힐 일은 없었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둘리는 다소 까칠한 인상이었다. 포악한 육식공룡을 모델로 삼았으니까. 둘리 엄마는 초식공룡(브라키오사우루스)인데 왜 둘리는 육식이냐는 문제 제기와는 별개로, 공룡을 모델로 삼은 이상 나름 과학 상식에 부합해야 했다. 실제로 둘리가 남극에서 냉동 상태로 갇혀 있던 빙하가 한강까지 떠내려오는 게 가능한지 과학자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가 운영하던 콜센터에서 돌아온 답은 “모르겠다”였다. “남극 바닷물이 한강까지 올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바꿨다. “물이니까… 가능하겠죠.” 그렇게 둘리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길동 아저씨… 이제야 이해합니다
40년, 어느덧 불혹(不惑)이다. 둘리의 장난에 어깨 들썩이던 코흘리개들은 이제 고길동의 내려앉은 어깨를 이해한다. “가장 평범한 소시민 가장”의 표본, 1951년생 고길동은 자식들이 하천에서 주워온 둘리 덕에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외계인 도우너, 타조 또치 등 피 한 방울 안 섞인 종자들이 날마다 벌이는 재물 손괴를 모두 수습한다. “둘리가 불쌍하다고? 나이 먹고 다시 봐라. 누가 불쌍한지.” 잡지 ‘보물섬’ 독자 참여 코너에 적힌 ‘고길동의 편지’처럼,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둘리는 시간이 갈수록 인상이 푸근해지지만 고길동은 사나워진다”고 작가는 말했다.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해 광화문 인근 회사에 다니지만, 만년 과장에 재산이라곤 쌍문동 집 한 채가 전부. 주택융자 5000만원, 사채빚 2000만원까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 울부짖는 아버지 고길동의 재발견은 ‘둘리’를 단순 아동 만화에 머물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2019년에는 에세이 ‘고길동, 힘들었을 오늘도’가 출간돼 큰 인기를 끌었고, 지난해에는 게임 ‘바람의 나라: 연’에 특별 캐릭터로 합류했다. 고길동 이름을 딴 맥주 ‘고길동 에일’도 출시됐다. “힘든 일과를 마친 ‘어른이’들을 위해 열대과일 향을 첨가하고 일반적인 에일보다 씁쓸한 맛을 낮춰 퇴근 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설명이다. 캬.
◇어쩌랴, 지지고 볶아도 한식구인 것을…
고길동을 폭삭 늙게 한 둘리는 앞서 기술했듯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2019년 둘리뮤지엄에서 열린 ‘안녕 고길동’ 전시에 소개된 둘리의 만행만 해도 100가지가 넘는다. “물과 기름 같은 존재지만 서로 필요한 존재”라는 작가의 설명처럼 그러나 이들은 ‘식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웬수 같아도 한솥밥 먹는 사이인 것이다. 정치권에서 ‘둘리 정신’이 곧잘 언급되는 이유다. 2021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홍준표 의원은 페이스북에 “희동이와 둘리는 앙숙처럼 싸워도 케미(팀워크)가 맞았다”며 “심술첨지가 방해해도 단일화는 성사돼야 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같은 진영 오세훈·안철수 후보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결국 단일화가 성사됐고 오 시장이 당선됐다.
오랜 역병 이후 경기 침체까지 덮치며 세상은 각박해지고 있다. 방송인 겸 작가 허지웅씨는 지난해 신간 홍보를 위한 간담회에서 이른바 ‘고길동 정신’을 언급했다. “고길동은 이웃에 대한 인류애가 있다. 둘리를 내쫓지 않고 품는다. 고길동은 둘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이웃이다.” 지금은 희박해진 정(情)이라는 오랜 가치가 사라지는 날 우리 사회는 너무도 쉽게 허물어질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
옛 만화가 동시대적 생명력을 지니려면 팬들의 자발적 패러디가 양산돼야 한다. 온라인상에서 너도나도 공유하는 문화 유전자 ‘밈’(meme)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 가장 최근의 사례가 바로 만화가 엉덩국이 둘리를 밥버러지 악당으로 묘사해 큰 인기를 끈 ‘애기 공룡 둘리’다. 조카 희동이를 둘리에게 볼모로 잡혀 착취당하는 우리의 고길동. 만화 속에서 둘리는 고길동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의 패악질을 행사한다. “경찰에 신고하면 희동이 호로자식 되는 거야. 알지? 처신 잘하라고.” 더는 참지 못한 고길동은 감추고 있던 검성(剣聖)의 힘을 폭발시켜 둘리를 뭉텅뭉텅 몇 덩이의 고깃덩이로 만든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악질 검사로 나오는 류승범의 명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는 갑질에 지친 직장인들에 의해 이렇게 변화했다.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알아요.” 만만해 보이면 바로 호구로 낙인 찍히는 세상. 그러나 악당들이여 잊지마시길. 둘리는 열받으면 “호이!”라는 외침과 함께 초능력을 쓴다는 사실을.
◇뉴진스의 아버지가 찾아 헤맨 ‘둘리 가수’
목소리는 늙지 않는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알 수 없는~ 둘리 둘리~♪” 또 있다. “쏘옥쏙쏙~ 방울 빙글빙글~♪” CM송 가수로 활동하던 오승원(59)씨가 특유의 미성으로 불러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주제곡 ‘아기 공룡 둘리’와 ‘비누방울’이다. 최근 이 노래가 다시 화제를 모았는데, 최정상 인기 걸그룹 뉴진스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뉴진스의 히트곡을 잇따라 작곡해 ‘뉴진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곡가 이오공(250) 때문이었다. 지난달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그의 앨범 ‘뽕’ 마지막 수록곡 ‘휘날레’가 바로 오승원이 부른 노래였던 것.
“오승원을 찾기 위해 3년간 수소문했다”고 이오공은 밝혔다. 한 인터뷰에서는 “목소리만으로 갑자기 나를 어느 순간으로 돌려버리는 느낌이 있었다”고도 했다. 맑고 잔잔하지만 어딘가 애잔한 음성. “이제는 너를 볼 수 없는데, 그 추억들은 기다리고 있었나 봐, 우리가 눈 맞추던 자리, 그곳에 자꾸만 너를 데려와….” 유튜브에는 “행복했던 학창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같은 댓글이 한가득이다. 오승원은 “옛 기억을 건드릴 수 있도록 둘리 노래처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이 노래로 걱정 없던 한때를 떠올릴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둘리의 모험은 계속됩니다
‘둘리’는 계속된다. 후속작도 곧 만화책으로 출간될 예정.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준비하다 좌초된 ‘방부제 소녀들의 지구 대침공’이다. ‘얼음별 대모험’의 후속편 격으로, ‘얼음별 대모험’이 엄마를 찾아 우주로 떠난 둘리가 그곳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내용이라면, 이번엔 반대로 우주에서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을 처치하는 에피소드가 될 전망이다. 김수정 작가는 “하나로 똘똘 뭉친다기보다는 어찌저찌 하다보니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내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의기투합 같은 건 없다, 얼떨결에 한편이 되는 거지.” 그게 동심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