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창으로 봄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주 앉은 남자는 친숙하면서도 낯설어 보였다. 폭설처럼 머리에 내린 백발 때문이었다. 웃을 때 얼굴에 밭고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주름들은 영락없는 배우 안성기(71)였다.
혈액암 투병 중인 그는 반년 전만 해도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민머리였다. 하지만 며칠 전 제4회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엔 백발로 참석했다. 서울대 문리대 총동창회가 수여하는 이 상을 영화 배우가 받기는 처음. 안성기는 “이제 건강을 거의 회복했다”며 “우리 사회의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는 일을 찾아 신명을 바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수상 소감으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지난 24일 서울 중구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온 그는 파란 재킷과 흰 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1957년 데뷔해 출연작이 170편에 이르는 배우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일상이 멈추고 나를 돌아보게 됐다”며 “아픈 사람들 틈에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뭔가에 간절해지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말을 더듬는 것만 빼면 신체적으로는 90%쯤 돌아온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는데 피 검사 등 모든 수치가 정상입니다. 이렇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연말까지는 회복이 될 테고, 내년 봄에는 어느 영화 촬영장에 있을 나를 상상하곤 해요(웃음).”
◇2년 동안 숨긴 혈액암
2020년 10월, 안성기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사우나에 들어가다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혈액암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소속사는 “과로로 입원했다가 퇴원해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며 소문을 진화했다.
–혈액암 판정을 받은 날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내 DNA에 암이 있다니, 라는 생각(웃음). 가족력에 없는 병을 만나 충격이 더 컸어요. 곧장 서울성모병원에서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잘 견디고 완치된 줄 알았는데 이듬해 재발했어요.”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전혀요. 나름대로 운동을 많이 하며 관리한다고 했는데... 현실을 받아들였어요.”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영화도 있나요.
“촬영 도중에 그만두진 않았어요. 감독, 제작자와의 약속인데 ‘내 사정이 이러니 배우를 교체해 달라’ 할 순 없지요. ‘카시오페아’ ‘한산: 용의 출현’ ‘탄생’ 등은 치료를 받으면서 촬영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면.
“작년 여름, 매우 강력한 항암 치료를 받았어요. 혼자 무균실에 있어야 했고 입맛도 다 잃었지요. 그 무렵 영화 ‘한산’이 개봉하는데 시사회에 갈 수 없었습니다. 주요 극장을 돌며 인사도 못 했고 홍보를 못 하니 마음까지 괴로웠어요.”
–지난해 9월까지 투병 사실을 2년이나 감췄는데.
“배창호 감독 데뷔 40주년 특별전이라 오랜만에 외출한 날이었어요. ‘꼬방동네 사람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 가장 많은 영화를 함께한 감독이라 빠질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민머리라 가발을 썼지요. 체중이 7kg이나 불고 부축을 받고 말까지 어눌하니까 현장에서 기자들과 관객들이 깜작 놀란 거예요.”
–이튿날 제 전화를 받고 마침내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내 모습 때문에 세상이 시끌시끌했어요. 소속사는 딱 잡아뗐는데 내 성격은 뭘 숨기는 걸 싫어해요. 그 순간에 그 말이 나와버린 거예요.”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던가요?
“더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때 박 기자가 문을 두드린 거라고 합시다. 원로 배우 신영균(95) 회장이 조선일보를 보고 전화해 ‘기운 내야 하고 정신이 제일 중요해. 마음 약해지면 병을 못 이겨요. 힘내요! 우리 안성기’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다 알게 됐지만 속이 시원하진 않았어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웃음).”
–작년 11월 영화 ‘탄생’이 개봉할 때도 칩거하셨는데 은둔하는 동안 무엇이 가장 그리웠나요.
“항암이 끝나가는 시기였어요. 집에서 휴대폰으로만 본 그 영화를 얼마 전에 극장 가서 봤어요. 큰 화면으로 보니 역시 시원하고 좋더군요. 가장 그리운 장소요? 영화 촬영장이죠. 감독부터 스태프, 배우들까지 모두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고민하고 몰입하니까. 그곳이 내 일터였어요.”
–병마와 싸울 때 가장 힘이 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 훌훌 털고 일어나시라는 말보다는 ‘저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가 제일 듣기 좋았어요. 저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지금도 힘이 솟는 것 같아요.”
◇데뷔부터 ‘국민 배우’까지
1957년 ‘황혼열차’(감독 김기영)로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그는 다섯 살 꼬마였다. 66년간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안 해본 배역이 없다. 안성기는 “젊은 세대에게 나는 3·1운동 때 유관순 누나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부친(안화영)이 영화 기획자였지요.
“아버지가 김기영 감독과 친구였어요. ‘황혼열차’ 찍을 때 급하게 아역 배우가 필요해 나를 데려다 쓴 거죠. 그게 잘됐는지 소문이 났지만 다섯 살이 연기를 하면 얼마나 했겠어요? 동시에 두세 편 찍던 시절이라 무슨 영화를 했는지 기억이 아득해요. 내가 초저녁에 잠이 많았대요. ‘레디, 고!’ 하면 연기를 하기는커녕 고개가 푹 떨어지는 거예요. 하하.”
–웃는 표정이 좋아 개구쟁이 이미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는 건 잘 못했어요. 울음이 나오질 않으니까 살짝 때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젊을 때 10년 가까이 연기를 접었는데.
“아역 배우 안성기는 작고 귀여웠어요. 중학교 때까지만요.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얼굴이 길어지고 키도 갑자기 컸어요. 사춘기에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기와 멀어졌습니다. ‘평범하게 살아야지’ 생각해 대학도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들어갔고요. 베트남 가려고 ROTC를 했는데 파병금지안이 통과돼 기회를 잃었지만. 졸업 후 ‘업자(실업자)’로 지낸 2년을 포함해 내 인생에서 참 소중한 구간이었어요.”
–무슨 뜻인가요?
“그 10년 동안 대중이 나를 잊게 만들었으니까요. 아역 배우 이미지가 계속 남아 있으면 성인 배우로 성공할 확률이 낮아져요. 공백 없이 특수한 환경에서만 살았다면 감성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도 좁아졌을 거예요. 취직이 안 돼 영화판으로 돌아왔는데, 평범한 삶을 경험한 뒤라 연기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안성기를 다시 알렸지요.
“1970년대 말까지 한국 영화는 암울했어요.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였는데, 어리숙한 중국집 배달부 덕배는 그 시대 청년의 상징이었어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 등을 거치며 나도 성장했고,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진한 베드신이 없는 ‘무(無)혼외정사 배우’로도 유명한데.
“더 절제하는 선배가 있었다면 나는 거꾸로 튀어 보이려고 난리 쳤을 거예요. 좋은 영화, 의미 있는 배역, 감동 주는 이야기로 대중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바른 생활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배우가 ‘딴따라’가 아니라 존경받는 직업이길 바랐으니까요.”
–혹시 부부 싸움 해보셨나요.
“아주 옛날에요. 어지간하면 참을 뿐, 평범한 남자입니다. 운전할 때 누가 위험하게 끼어들면 저도 욕이 나와요(웃음).”
–1980~90년대에는 안성기가 곧 한국 영화였습니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시나리오가 절대적이었어요. 90년대 말부터 조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0여 년 전부터는 작품 수도 줄었지요. 장단점이 있어요. 주연을 하면 ‘손해를 끼치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이 큽니다. 조연은 흥행 부담이 없는 대신 새롭거나 도전적인 인물이 아니라 연기 욕구가 떨어지는 게 문제고요.”
–마음속에 번뇌가 있진 않았나요?
“나이는 들어도 계속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투적인 모습만 보여준다면 배우로서 진짜 괴로운 일이에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연기 욕심이 나는 조연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는 드물어요.”
◇기다림은 내 숙명
안성기는 2001년 청룡상에서 영화 ‘무사’로 첫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다시 말하는데 주연상이 아니었다. 그날 밤 안성기는 유명한 배우들의 술값을 다 계산하면서 “신인상, 주연상, 조연상까지 받았으니 이제 공로상만 남았다”며 웃었다.
–그런데 맙소사, 4·19 민주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상상도 못 한 일이었어요. 배우 인생으로 4·19 민주평화상을 받은 건 아닙니다. 지난 30년 동안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한 구호·봉사 활동을 평가해 주셨어요.”
–한국도 6·25전쟁 후 도움 받던 나라에서 도움 주는 나라로 성장했지요.
“1952년생으로 그 모든 과정을 겪은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유니세프 활동을 한 거예요.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만나러 갔고 돌아와서 모금을 했지요. 안주하며 살다 거기 가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암담했어요. 한국에서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느낌. 갈 때마다 정신 차리고 돌아오곤 했어요.”
–일방적으로 주고 온 게 아니군요.
“지원을 한다고 갔는데 첫 수혜자가 나였다는 뜻입니다. 건강할 땐 모르지만 병원 가보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잖아요. 유니세프를 후원해 주는 우리 국민도 비슷한 마음일 거예요.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알게 모르게 연기에 도움이 됐습니다.”
–2021년 말 서울성모병원에 1억원을 기부하셨지요?
“그곳에서 위기를 넘기고 보니 주변 환자들이 친구처럼 다가왔습니다. 치료비를 걱정하는 환자들에게 써주기를 바라며 작은 정성을 보태고 싶었어요.”
–혈액암과의 싸움은 삶에 대한 관점이나 배우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어려움을 겪어 봐야 어려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암을 이겨낸다면 이 시련도 자산이 되겠지요. 시선부터 연기까지 과거의 안성기와는 달라질 거예요. 배우는 나쁜 경험도 금은보화로 바꿀 수 있어요.”
–배우가 가진 유일한 악기는 자기 자신뿐인데.
“가진 건 몸뿐이라는 말, 동의해요. 투병 후 외모가 달라질 때마다 좀 놀라긴 했어도 실망하지는 않았어요. 치료 잘 받고 잘 먹고 잘 자고 좋은 생각 하면서 빨리 원위치로 돌아가야겠다는 각오를 더 다졌습니다.”
–배우에게는 기다림이 숙명이지요?
“(끄덕이며) 투병 소식이 알려지자 감독들이 내 안부만 묻지 시나리오를 보내오진 않네요(웃음). 욕심나는 배역이 나타날 때까지 워낙 오래 기다려봤기 때문에 지치지는 않습니다. 투병이 시간 낭비는 아녜요.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밀린 숙제를 하듯이,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 그동안 못 본 명작들을 TV로 다 보고 있어요.”
–가장 애착을 가진 출연작은 ‘라디오스타’라고 들었습니다만.
“작은 영화였지만 찍을 때 행복했고 그 기운이 관객에게 전해졌어요. 자극적이지 않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복귀하면 우울한 캐릭터보다 그렇게 밝고 재미있는 영화를 하고 싶어요. 내 최고의 파트너는 박중훈이고요.”
–그 영화 속 박민수(안성기)의 대사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가 떠오르네요.
“국민 배우라는 수식은 과분하지만 저를 사랑하며 쾌유를 빌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회복해서 그 응원에 연기로 또 봉사 활동으로 보답해야죠. 이번 시상식 때 ‘우리 사회의 행복 지수를 높이겠다’고 한 말은 내가 해왔던 그 일들을 ‘계속’ 하겠다는 뜻입니다.”
–안성기에게 연기란 무엇인가요.
“다른 일은 해본 적 없으니 삶 자체지요. 내 꿈은 배우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연기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위로를 드리는 게 내 인생 아닐까요?”
배우 인생이 계절로 치면 어디쯤 와 있는지 물었다. “이제 겨울로 접어드는 것 같다”며 안성기는 미소를 지었다. “계절마다 다 좋았는데 겨울은 또 겨울대로 좋을 거예요.”
배우 안성기는?
1957년 다섯 살 때 영화 ‘황혼열차‘부터 아역으로 70편, 성인으로 약 100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배우 김지미도 같은 영화로 데뷔했다. 버디 무비의 대표작 ‘투캅스’, 역대 첫 천만 영화인 ‘실미도’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그대 안의 블루’ 등을 함께한 배우 강수연에 대해서는 “체구는 작지만 단단한 여걸이었다”고 했다.
인터뷰 직후 거리에서 안성기와 나란히 10분쯤 걸었는데 그를 알아보는 행인은 거의 없었다. 백발 때문이다. “처음에는 거울 보고 ‘당신 누구야?’ 그랬지만 이젠 편안해요(웃음). 현장으로 돌아간다면 염색도 하고 나이에 맞는 역할을 맡아야죠.”
가수 조용필과 서울 경동중학교 동창이다. 서로 친했고 기타는 안성기가 먼저 배웠다. 2013년에는 은관문화훈장도 함께 받았다. 얼마 전에도 안부 전화를 받았다고 해서 노래방 18번은 조용필 곡인지 물었다. “그건 아니고, 김수희의 ‘못 잊겠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