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월 1일 정부는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200만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 유효한 관광 여권을 발급했다.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을 최초로 자유화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40년, 해외여행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유적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만 하지 않는다. 여행 트렌드 첫째는 ‘체험형’이다.
(1) 시드니 하버 브리지 등반
‘하나 둘, 하나 둘~’
속으로 숫자를 세며, 바닥을 보고 걷는다. 괜찮다 다짐해도, 철판 밑으로 보이는 아찔한 풍경에 종아리부터 명치까지 경직된다. 허리에 찬 고리 하나에 의지해 호주 시드니 하버 브리지를 걸어 오르는 길. 1923년 이 다리를 건설한 노동자들의 하루가 이러했을까. 거의 수직으로 기어 계단을 오를 땐 ‘내가 뭘 잘못했나’ 천형을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세계에서 넷째로 긴 아치 부분에 발을 디뎠을 때, 이 행위는 고통에서 쾌락으로 바뀐다. 시원하게 부는 바닷바람에 땀과 긴장을 씻는다. 오른 만큼 작아지는 오페라하우스, 물살을 가르는 요트와 유람선, 아름답게 내리쬐는 햇살이 수면에 반짝거린다. 이제야 실감한다. 시드니는 이탈리아 나폴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美港)이다.
하버 브리지 등정은 시드니만의 남북을 잇는 길이 1149m 다리를 높이 130m 아치 꼭대기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체험이다. 사고가 나도 책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음주 측정을 거친 후, 1시간 동안 연습하고, 다리를 오른다. 등정이 끝나면 인증 사진 한 장과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
(2) 달링 하버에서 유람선
이번에는 다리를 올려다볼 차례다. 시작은 이름부터 달콤한 ‘달링 하버’. 이 도시의 시작은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영국은 늘어나는 죄수들을 식민지로 보낼 계획을 세웠고, 호주를 유배지로 확정한 당시 영국 장관의 이름이 바로 시드니였다.
그러나 나는 달콤하게, 달링 하버에서 유람선에 탑승했다. 선상에는 맥주와 와인, 과일이 준비돼 있다. 아무 정보 없이 타도, 하얀 조개껍데기 같은 구조물이 나올 때면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다. 오페라하우스다.
1973년 문을 연 오페라하우스는 덴마크 건축가 예른 웃손이 굴 껍데기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 외벽을 장식한 타일 105만개는 스웨덴에서 공수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공사비도 늘어나자, 웃손은 쫓기듯 시드니를 떠나야 했다. 지금 오페라하우스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만 같다.
(3) 시드니 헬리콥터 투어
시드니 외곽 동부 해안은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숨 막히는 해안선과 힘차게 솟아오르는 파도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가장 쉽게 보는 방법? 그래, 헬리콥터다.
비디오로 구명 재킷 사용법을 익히고, 몸무게를 재서 3~4명으로 나눠 헬기에 오른 후, 안전벨트만 차면 이륙 준비가 끝난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깎아지른 절벽 위엔 주택들이, 시드니만 곳곳에는 요트가 그림처럼 정박해 있다. 그때쯤 코발트빛 바닷물이 해안 절벽과 해수욕장에 하얗게 부서진다. 시드니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해변 ‘본다이 비치’다. 본다이는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라는 뜻의 원주민어.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서핑을 즐긴다. 대자연과 인간이 빚은 보석 같은 도시, 이것이 시드니의 매력이다.
(4) 동물원에서 캥거루 밥 주기
호주의 상징은 코알라일까, 캥거루일까. 답하기 전에 일단 보러 가자.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심비오 와일드 파크’다. 들어가자마자 반기는 건 코알라. 직원 품에 새침하게 안겨 있는 모습이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안긴 아기 같다. 나도 조심스레 안아본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진다.
코알라는 호주에만 사는 멸종 위기종이다. 유칼립투스를 먹고 자라는데, 이것이 기상이변으로 말라 죽어가기 때문이다. 현재 5만마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오면 뛰어다니는 아기 캥거루 떼를 볼 수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배가 고프면 내게 먹이를 받으러 온다. 자유분방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꼭 캥거루 키즈카페에 놀러온 것 같다. 그 외에도 웜뱃, 여우원숭이, 미어캣, 레드 판다를 볼 수 있다.
(5) 저비스 베이에서 카약 타기
시드니는 뉴사우스웨일스주(NSW)의 주도다. NSW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세계에서 가장 하얀 모래로 유명한 ‘저비스 베이’다. 햇빛이 부서지는 순백 해변, 물에서 자라는 원시림 같은 맹그로브 숲, 야생동물이 뛰어다니는 산림까지 모든 절경을 만날 수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방법은 ‘카약’이다. 동력 없이 내 힘으로 두 개의 노를 저어가며 이동하는 것. 출발지는 허스키슨 비치다. 간단하게 카약에 타는 법과 노 젓는 법을 배우고 탑승한다. 늪지대를 지나, 숲이 우거진 곳에 정박했다. 여기서부턴 걸어서 간다. 숲길을 지나니,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이것이 진짜 ‘하얀’ 모래사장이구나. 다시 카약을 타고 이번에는 맹그로브 숲으로 이동했다. 노를 몇 분 저었을 뿐인데, 풍경은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간 것 같다. 이 땅에 처음 살던 원주민들의 이동이 이러했을까. 팔이 저릿하게 아파올 때쯤 카약 투어가 끝났다.
(6) 돌고래와 수영하기
저비스 베이는 생명력이 넘쳐나는 곳이다. 물개부터 페어리 펭귄, 돌고래까지 수많은 해양 동물을 만날 수 있다.
카약을 타고 대양으로 모험을 떠나도 되지만, 체력과 실력에 자신이 없을 때 대안은 ‘돌고래 크루즈’다. 가장 잘 보인다는 뱃머리에 섰다.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한 아이가 “돌핀!”이라고 외쳤다. 아이의 손가락 방향을 보니 정말로 돌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돌고래의 선한 눈, 장난스러운 입꼬리, 유연한 몸놀림. 영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선미로 이동하니 그물로 된 수영장이 설치돼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시작된 돌고래와의 수영! 영화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았지만, 같은 바다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법 같았다.
놀고 나니 배가 고팠다. 가이드를 따라 밥을 먹으러 간 곳은 ‘하암스 해변’. 설탕 같은 모래를 밟으며 ‘여기에 식당이 어디 있지?’라고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눈앞에 피크닉 한 상이 펼쳐진다. 곳곳에 놓인 연보라 쿠션과 돗자리, 탁자 위에 놓인 주황색 꽃까지. 오늘 아침에 만들었다는 샌드위치도 바닷가에서 먹기엔 딱 좋았다. 수정처럼 맑은 바다에서 수영하다, 해변에서 몸을 말리며 샌드위치 한 입 먹고, 다시 물기가 마를 때쯤 바다로 뛰어들기를 반복했다.
(7) 해변 와이너리
NSW 남부 해변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드넓은 초록 물결이 나타난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네 몰리무크에 자리한 ‘큐피트 와이너리’다. 이곳은 해변의 삶과 땅의 향을 그리워한 큐피트 가족이 2007년 문을 열었다. 작은 농장을 구입해 포도나무를 심고, 맥주 양조장을 만들고, 블랙 앵거스 소 무리를 방목하며 대지를 가꿨다.
숙박용으로 지은 오두막에 앉아 풀 뜯는 소와 포도나무,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식당에서는 라이브 음악을 연주하고, 와인과 맥주에 취한 이들은 흥얼거린다. 그때 큐피트 여사가 손수 만들었다며 치즈를 건넸다. 입안 가득 녹진하게 스며드는 쿰쿰한 블루치즈에 상큼한 소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 한 잔. 낙원이 따로 없었다.
취재 협조: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