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을 들을 필요가 없겠다. 왜냐하면 전에 들은 내용일 게 확실하니까.” 트럼프 미 대통령과 치를 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2018년 5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문 대통령은 (북미) 중재자 역할을 강조했는데 지금 국면에서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나.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취임 초부터 문통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주장했다. 한국이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갖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 하지만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국제사회에서 대북 강경론이 우세해짐에 따라 문통의 말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됐다. 기자의 질문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통은 뭐라고 답변했을까.
“저의 역할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중재를 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서, 또 그것이 한반도와 대한민국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미국과 함께 긴밀하게 공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중재자는 무슨 중재자냐, 그냥 미국의 활약을 지켜보겠다는 뜻. 근데 이렇게 끝내면 너무 없어 보이니 ‘긴밀하게 공조한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 “통역할 필요 없다”고 한 트럼프의 말은, 물론 우리나라 대통령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하는 트럼프의 인성에도 문제가 있지만,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문통에게 남은 일은 트럼프에게 당한 수모를 잘 포장하는 것, 이런 데는 천재적인 능력을 과시했던 청와대는 트럼프의 발언을 “통역이 필요 없겠다. 왜냐하면 좋은 말일 것이니까”라고 번역함으로써 ‘외교 참사’ 논란을 잠재웠다.
사실 북한의 핵실험이 아니더라도 한반도 운전자론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문통의 한결같은 짝사랑에도 북한은 그를 대화 파트너로 생각지 않았으니 말이다. 2018년 4월 1일부터 2019년 8월 5일까지 김정은과 트럼프 간에 오간 친서 27통을 분석해 보면, 김정은은 지속적으로 문통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고, 심지어 배제해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예컨대 2018년 9월 21일 김정은이 보낸 편지를 보자. “앞으로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남조선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하는 게 아닌, 각하와 제가 직접 논의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들에 문 대통령이 보이는 과도한 관심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어이없는 건 김정은이 이 편지를 보낸 날짜다. 불과 사흘 전, 문통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고, ‘한반도 비핵화’를 골자로 한 합의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김정은이 문통을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더 황당한 것은 트럼프마저 여기에 동조해 문통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벌어진 소위 ‘트럼프의 문단속’은 여기서 기인한 결과다. 기억나는가? 자유의집에서 트럼프가 나온 뒤 경호원이 문을 닫는데, 닫히는 순간 문통이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던 장면을. 문통이 자유의집에서 대기하는 동안, 트럼프는 북쪽에서 걸어온 김정은과 “마이 프렌드”라며 악수를 나눴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같이 북쪽으로 간 뒤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시 언론이 최근 윤석열 대통령에게 들이댄 기준을 적용했다면 ‘외교 참사’ 논란이 온 나라를 뒤덮었겠지만, 민노총 언론노조에 장악당한 언론은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극성 지지자는 다음과 같은 댓글로 정신 승리를 했다.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중 한 명이라도 없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때부터 1년 뒤 출간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는 여기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이 근처에 없기를 바랐지만, 문 대통령은 완강하게 참석하려 했고 가능하면 3자 회담으로 만들려고 했다. 회동 당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은 문 대통령의 참여를 수차례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일단 판문점 내 관측 초소까지 같이 가서 결정하자’며 동행을 요구해 결국 관철했다.”
아무리 진한 짝사랑이라 해도 상대방이 계속 거절하면, 대부분은 그 사랑을 포기한다. 극히 일부에선 지속적으로 스토킹한다든지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세상은 이를 이렇게 부른다. ‘잘못된 사랑’. 문통의 북한 사랑이 그랬다. 나이도 한참 어린 김정은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고, ‘삶은 소 대가리’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북한에 대한 문통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랑하면 선물을 해주고 싶어지는 법, 북한에 가장 큰 선물은 종전 선언이었다. 그게 이루어져야 ‘미군 철수’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고, 그 경우 한반도 적화 꿈도 이룰 수 있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선물은 문통의 힘으론 얻을 수 없었기에, 문통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정상들에게 종전 선언을 읍소해야 했다. 유엔 총회에 갔을 때, 호주와 프랑스를 갔을 때 등등 문통은 해외에 나갈 때마다 종전 선언을 부탁했다. 여기엔 김정숙 여사도 동참했다. 이탈리아 총리 부인을 만났을 때 “교황에게 방북과 함께 종전 선언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찬에서 뵙게 될 (남편) 드라기 총리에게도 특별히 부탁을 드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걸핏하면 김건희 여사를 겨냥해 ‘누가 대통령이냐’를 외치는 좌파는, 당시 이 발언에 기이한 침묵을 지켰다.
부부가 총동원된 이 짝사랑은 미국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윤 대통령이 북한 핵을 막기 위해 워싱턴 선언을 발표한 지난 4월 27일, 문통은 다음과 같은 성명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더 늦기 전에 남과 북, 국제사회가 대화 복원, 긴장 해소, 평화의 길로 나서길 바란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경쟁하듯 서로를 자극하고 적대시하며 불신과 반목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통님, 지금 한반도가 불안하다고요? 그렇다면 그건 전적으로 북핵 때문이고, 여기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는다’며 전 세계를 상대로 구라를 친 당신 탓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