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는 매혹이다. “혀에서 느껴지는 찰기, 끊을 때 이에 전해지는 쾌감, 식도를 통과할 때의 상쾌함이 삼박자를 이루고 빨아들일 때 입술을 통과하는 최대의 감칠맛까지 준다.”(’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 빨고 스치고 깨무는 동안 시각과 청각, 미각과 후각은 물론 ‘제2의 성기’ 입술의 촉각까지 강렬하게 자극하는 공감각의 음식은 국수 말고는 없다.
한국 라멘의 역사는 길다. 19세기 말 중국과 가까운 국제항이었던 나가사키에서 탄생하고 일제 때 ‘짬뽕’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라멘이 시작이다. 외식 메뉴에 라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계기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었다. 2000년 전후로 홍대 거리를 중심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라멘은 금세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 긴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는 팬덤이 있는 유명 라멘집 중에서도 강남구 일대에서 ‘토리’ ‘니보시’ ‘카모’라는 이름으로 세 식당을 운영 중인 마이니치라멘은 각별하다.
이름처럼 토리(언주역)는 깔끔한 닭 육수를, 니보시(선정릉역)는 멸치와 조개 등으로 감칠맛을 낸 해산물 육수를, 카모(역삼역)는 구수한 오리 육수를 쓴다. 걸어서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이웃한 세 라멘집 사이에서 애호가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프랜차이즈 형태로 영업 중인 라멘집은 많지만, 라멘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끼리 상호를 공유하면서 제각각인 육수로 고유의 맛을 내는 라멘집은 찾기 어렵다. 1980~90년대 일본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 수입된 뒤로도 지금까지 라멘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돼지뼈(돈코쓰) 육수 대신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육수를 쓰는 점도 눈길을 끈다.
테헤란로에서 멀지 않은 상가 1층에 자리한 마이니치라멘 카모의 김민재는 20대 젊은 셰프다. 한정식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어깨너머로 음식을 배웠다. ‘매운 파이탄’의 비법 양념도 어머니가 일러줬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라멘을 연구했고, 토리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았다. 면발의 굵기와 강도는 절묘하다. 불을 조절하며 20시간 이상 고아낸 오리뼈 육수는 깊다. 특제 간장과 소금으로 조리한 돼지과 목살, 닭과 오리 가슴살 차슈, 반숙 계란, 미나리, 채 썬 파 같은 고명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마이니치(每日)라는 이름처럼 모든 재료는 매일 정해둔 양만 쓰고,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는다.
메뉴는 단출하다. 오리 육수와 고명이 어우러진 기본 메뉴 ‘마이니치라멘’, 기본 메뉴에 해장용 매운 소스를 더한 ‘매운 파이탄’, 센 불을 써서 진하게 끓여낸 ‘카모 파이탄’, 비빔 라멘 ‘아부라소바’, 직접 만든 혼합 소금으로 간을 입힌 ‘소금라멘’이 전부다. 가격은 1만원 언저리다. 다른 외식 메뉴에 비해 라멘 값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기원한 일본식 국수로 시작되고, 이제는 세계적인 패스트푸드로 발전한 라멘은 최대의 국수 문화권인 한·중·일을 공간적 배경으로, 근현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아 탄생한 퓨전 음식이다. 중국어 라몐(拉麵)에서 일본어 라멘(ラーメン)으로, 다시 한국어 라면으로 바뀐 이름의 역사에 라면의 역사가 겹친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의 ‘빕 구르망’에는 합리적 가격(4만5000원 이하)에 훌륭한 요리를 선보이는 57개 레스토랑이 수록되었는데, 이 가운데 40%가 국숫집이다. 곰탕까지 포함하면 이 리스트의 대부분은 국물 요리다. 이렇게나 뜨거운 국물이 곁들여진 국수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이 각별하니, 라멘의 성공 신화는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최장수 연재 기록을 남긴 ‘이규태 코너’의 고(故) 이규태 선생이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규명하는 일을 시작한 계기는 1960년에 방한한 펄 벅과의 만남이었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대상에 펄 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왜 우리 음식엔 물이 많은지, 왜 뜨거워야 하는지… 의문이 끝없이 일었다”고 이규태는 회고한 바 있다. 이렇게 어떤 외래 음식은 한국인의 위장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