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이 없더라도 가끔은 신문 여행 광고의 여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거기에는 일상을 벗어난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地圖)를 들여다보는 소년의 눈은 아름답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생각과 같은 마음입니다.
주말 집에서 빈둥거리다 책을 한 권 집어 들었습니다. ‘왜 교토인가 2′입니다. 교토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저자가 자신의 추억을 곁들여 교토의 이곳저곳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가볍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자신의 교토에 대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교토는 외국 도시 가운데 제가 가장 많이 방문했던 곳입니다. 대부분 대학에서 열리는 학술 행사나 이나모리 재단이 주관하는 교토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지만 7~8차례에 이릅니다.
여행할 때 만나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경관은 순간의 감동으로 끝나지만, 여행지와 관련한 흥미로운 역사적 이야기나 특별한 개인적인 경험은 오래 남습니다.
그러한 경우의 한 예를 교토에서 경험하였고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 택시 운전사의 친절하고 멋진 응대 때문입니다. 어느 해 교토상 시상식에 참석한 뒤 귀국 전에 교토 근처 히에이산(比叡山)에 있는 엔랴쿠지(延曆寺)라는 절을 찾아갔습니다. 일본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전국(戰國)시대인 16세기 군웅할거하는 무장(武將)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어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승병 세력을 제압하기 위하여 히에이산 엔랴쿠지 승방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승려 3000여 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종교적 전통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신불(神佛)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강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서양의 총포를 수입하고 대량생산하여 전쟁에 활용하고, 병농(兵農) 분리 정책을 추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사람과 물건의 자유로운 왕래와 유통을 촉진하기 위하여 관소(關所·세관)와 통행세를 폐지하는 등 혁신적 정책을 취하여 천하 통일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공격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 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는 오다 노부나가가 좀 더 살았더라면 일본은 일찍이 중앙집권적 절대왕정 국가가 되고 개혁적 중상주의 정책으로 큰 경제 성장과 기술 진보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보다는 노부나가가 더 살아 과대망상을 가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할 기회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에게 치욕과 비극을 안겨준 임진왜란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히에이산을 내려온 산자락에 빈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식사 때라 운전사에게 장어집을 소개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운전사는 웃으며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곳을 안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그곳까지 20분 정도 걸리며 택시 요금은 3000엔 정도 나올 것이라며 그래도 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판단하도록 하고자 하는 취지로 보였습니다. 좋다고 대답하고 승차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운전사는 우리 일행이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가는 도중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부지런히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택시 미터기가 3000엔에 이르렀으나 아직 식당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운전사는 그 순간 미터기를 꺾어 더이상 요금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자신이 짐작하고 말했던 것보다 많은 요금이 나오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500~600엔 정도의 거리를 더 가서 장어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식당에 도착하여 실제 요금을 지급하겠노라고 하였으나 한사코 사양하였습니다. 자기가 말한 것은 책임져야 한다며. 일본 제일의 장어집이라는 말도 우스개 삼아 한 말로 알았는데, 식당에 비치해 놓은 자료들이 메이지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있는 장어집으로 명성이 높은 곳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교토를 생각하면 교토의 역사적 이야깃거리나 명승지에 앞서 먼저 그 택시 운전사가 생각나는 것이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