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무인(無人), 누군가에겐 무주공산.

이곳은 양심의 시험장이다. 물건을 고르고 값을 치르는 행위 모두 ‘자율’이기 때문이다. 무인 점포. 직원을 없애 인건비를 줄인 대신 24시간 열려 있다. 접근성과 편의성은 크게 높아졌으나, 인심이 팍팍해지면서, 무인 상점은 무법 현장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노원구의 한 무인 편의점이 3인조 강도단에 털렸다. 벌건 대낮이었다. 용의자는 10대로 추정된다. 성장기에 간덩이는 커지기 마련이고, 여러 무인 점포를 돌며 금고를 터는 무뢰배도 늘고 있다. 지난달 관악구에서 붙잡힌 일당, 알고 보니 15세였다.

범법의 연령층은 어려지고 있다. 광주의 한 무인 과자 가게에는 두 초등학생 꼬마의 사진이 인쇄된 ‘신상 전단’이 나붙었다. ‘1차 절도, 4월 22일 오후 4시 43분, 아이스가이피치 4개, 미니멜츠 초코 2개, 청포도·딸기 1개 훔쳐감….’ 모두 2만8200원어치였는데, 두 번째 절도 현장에서 적발됐다고 한다. “그래도 애들인데…”라는 비판 못지않게 “오죽하면!”이라는 목소리가 격렬했다. 무인 점포 절도가 그만큼 심각한 사회 현상이 돼버린 것이다.

◇바늘도둑 소도둑 될라

지난 9일 광주의 한 무인 점포 유리벽에 붙은 게시물. 이곳에서 물건을 슬쩍 한 아이들의 신상 정보가 담겨 있다. 무인 점포 절도 문제 해결법을 놓고 큰 논쟁을 야기했다. /조선일보DB

누가 주로 터는가. 보안업체 에스원의 고객사 무인 점포 빅데이터(2020년 1월부터 2022년 6월까지) 분석 결과, 절도범 연령대는 10대가 가장 많았다. 34.8%였는데, 일반 절도 사건의 10대 비율(14.8%)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무인 점포가 ‘소년 범죄’의 입문 코스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에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여덟 곳의 현금 통을 습격한 대전의 10대 청소년 세 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털이에 걸린 시간은 점포 한 곳당 5분 내외였다.

어디가 주로 털리는가. 현금이 많은 매장이다. 업종별 절도 발생률을 살펴보면 무인 인형 뽑기방(35%), 코인 사진관(22%), 코인 빨래방(17%) 등 순이었다. 범행은 주말(43.4%)에 집중됐다. 에스원 측은 “등교하지 않는 토·일요일을 이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업주들은 도난 피해뿐 아니라 영업 방해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이중고를 겪는 상황”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은 몇 백~몇 천원 수준이지만 중·고교생은 만원짜리도 그냥 옷에 집어넣는다”는 한 문구점 주인의 고백처럼, 고통은 업종 불문. 한 무인 점포 업주는 “며칠 뒤 잡아서 실토를 받아내긴 했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교육상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아프니까 사장이다?

무인 시장은 이미 대세다. 코로나로 비대면 환경이 가속화됐고, 인건비 절감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CU·이마트24·세븐일레븐·GS25 등 이른바 ‘편의점 빅4′ 무인 점포 역시 2020년 499곳, 2021년 2125곳, 2022년 3310곳으로 늘었다. 무인 당구장, 무인 키즈룸, 무인프린트 카페 등 업종도 다각화되고 있다. 무인 점포는 전국 약 10만 곳으로 추산된다. 범죄도 덩달아 오른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1년 3월부터 2022년 6월까지 발생한 절도 건수는 6344건. 판매 품목이 소액이라 미신고가 많아 실제 규모는 훨씬 크다는 게 업계의 추정이다.

온라인 카페 ‘아프니까 사장이다’에는 업주들의 충혈된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한 초등학생이 손에 닿는 전기 코드는 전부 뽑아놓고는 ‘빼빼로’ 하나 훔쳐서 달아났어요.” “한 20대 손님이 동전 교환기에서 15만원어치를 바꿔갔네요, 이런 경우 영업 방해가 될까요?” CCTV가 있긴 하지만 사후 대책일 뿐 예방 효과는 미미한 게 현실. 코인 빨래방을 운영했다는 한 회원은 “털린 이후로는 무인이 아니라 ‘감시 빨래방’이 됐다”고 했다. 무인 점포마다 “고소 조치” “50배 배상” 등의 경고문이 부착돼있으나, 경고문은 경고문일 뿐. “무인 점포는 도둑에게는 꿀입니다.”

◇CCTV 앞 절정의 연기력

한 무인 점포 업주가 게시한 CCTV 사진. 계산하는 척 연기하다가 물건만 들고 사라졌다고 한다. /네이버 카페 '아프니까 사장이다'

“바코드 찍히지도 않는데 시늉만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찍히니 당황하며 ‘빼기’ 누르고…. 삼성페이로 계산하는 척하고 가져감. 경찰에 신고하니 지구대 분들도 웃네요.” 분노한 사장이 지난 3월 온라인 게시판에 용의자 사진과 함께 올린 글 내용이다. 이 같은 ’연기’는 무인 점포 내 가장 일반적인 절도 방식이다. 얼마 전 5만원어치 만화 캐릭터 카드 두 상자(60장)를 가져간 어린이, 100만원어치 물건을 19차례에 걸쳐 슬쩍한 50대 남성의 공통점. 그러나 연기는 금세 탄로 난다.

더 심각한 건 얼굴에 철판을 깔아버린 경우다. 화장실마냥 소변을 보고 뒤처리도 하지 않은 채 사라지는 행태도 적지 않다. 지난해 6월 경기도 김포의 한 인형 뽑기방에 대변을 누고 달아난 20대 여성이 단적인 예다. 이 엽기적 테러 행각은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여성은 “급해서 그랬다. 생각이 짧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적용한 혐의는 재물손괴죄. 업주는 경찰 조사에서 “바닥 타일의 색깔이 변하고 냄새가 심각해 특수 청소 및 복원에 50만원을 썼다”고 밝혔다.

◇경찰도 울린 눈물의 컵라면…

지난해 12월, 부산 범천동의 한 무인 점포에서 16차례에 걸쳐 누군가 물건을 훔쳐갔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피해 물품은 컵라면이나 쌀, 생수 등 먹을거리였다. 모두 8만원 상당. CCTV로 동선을 추적한 결과 범인은 한 50대 여성이었다. “배가 고파 계산도 안 하고 가져가 죄송합니다.” 정신장애를 앓는 남편과 어느 고시원 복도에 살고 있었다. 경찰은 사비로 생필품을 구매해 이들 부부에게 전달했다.

금은방이나 가전제품 매장은 무인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비싸니까. 무인 점포는 정반대다. 생계형 좀도둑이 많은 이유다. 경찰이 ‘장발장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빵 하나 훔쳤다가 인생이 망가진 소설 속 장발장을 반면교사로, 철없는 소액 절도를 막겠다는 것이다. 대구 달서경찰서 측은 관내 무인 점포 55곳을 돌며 와이파이 문 열림 센서, 집중 순찰 구역 안내문, 처벌 경고문 등을 부착했다. 푼돈을 훔쳐도 도둑은 도둑이라는 사실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빈집털이 막아라… 허수아비까지

서울 영등포의 한 무인 점포에 설치된 '양심 거울'. 도둑질하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라는 취지다. /영등포구청

출입문 앞 키오스크에 신용카드를 넣고 전화번호로 인증을 마친 뒤 QR코드를 발급받아 문을 여는 방식의 첨단 설비도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세 상인에게는 언감생심.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나, 매장 앞에 현직 경찰을 모델로 한 허수아비(등신대)가 놓이고 내부에는 ‘양심 거울’ 등이 설치되고 있다. 몰래 들고 나가려는 당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자각하라는 취지다.

우리 사회의 신뢰 수준이 시험대에 올랐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Legatum)이 발표한 ‘2023 번영 지수’에서 한국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167국 중 107위로 10년 전보다 12단계 추락했다. 사회적 자본은 구성원 간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규범·신뢰 등을 포괄하는 개념. 선진 사회의 필수 가치가 심각하게 약화됐다는 증거다. 지난 3월, 매장 측의 실수로 키오스크에 500원으로 설정된 물건을 스스로 제값(5000원)으로 결제한 지극히 상식적인 한 여대생이 미담으로 큰 화제를 모았을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당 점포는 한 달 뒤 3인조 일당에게 탈탈 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