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탑 3000개를 쌓으면 집안이 평안해질 것이니라.” 스물셋에 강릉으로 시집와 4남매를 낳았지만, 아들 둘을 차례로 잃고 집안에 우환이 끓이질 않았던 한 아낙네는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난 산신령의 말대로 산속에 움막을 짓고 홀로 돌탑을 쌓기 시작한다.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며 장장 26년간 정성으로 3000개의 돌탑을 쌓고, 아낙네는 66세에 세상을 떠난다.
‘전설의 고향’이 아니다. 1986년부터 10여 년 전인 2011년까지 강릉시 완산면 대기리 노추산에 3000개의 돌탑을 쌓은 ‘노추산 모정탑(母情塔) 길’의 주인공 차순옥씨의 이야기다.
강릉을 잘 안다 생각했다. 그런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천 년 축제 ‘단오제’를 지켜온 이 도시엔 노추산 모정탑보다 훨씬 오래되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산불로 ‘방해정’의 일부가 타들어가는 것을 망연자실 지켜봐야만 했던 게 한 달 전. ‘핫플’에 가려 미처 놓치고 있던 강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로 했다.
◇사천, 푸른 바다의 전설
“예로부터 ‘강릉산수갑천하(江陵山水甲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비할 데 없이 빼어나다는 뜻인데 경치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바닷가 바위 하나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 강릉입니다.”
강릉 지역사 전문가로 유명한 박도식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의 말이다. 강릉은 강원도 18개 시군 중에서도 최다 문화재를 보유한 곳.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가 130여 개나 된다. 유서 깊은 곳이니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눈이 시리게 푸른 색감을 자랑하는 사천 해변엔 이무기의 전설을 품은 ‘교문암(蛟門巖·교암)’이 숨어 있다. 문득 지나치기 쉬운데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동그란 바위는 가까이 가서 보면 가운데가 갈라진 듯 금이 가 있다. 거대한 바위가 어떤 연유로 금이 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장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따르면 바위의 사연은 이렇다.
‘옛날에 사화산의 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백사장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내가 무너질 때 늙은 교룡(이무기)이 그 밑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그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는 바람에 두 동강이 나서 구멍이 뚫렸다. 그 모양이 마치 문(門)과 같이 되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교문암이라 불렀다.’
박 교수는 “교문암과 함께 허균의 생가 애일당 터 뒤로 이무기를 닮은 산도 있는데 허균이 문집에 호를 ‘교산(蛟山)’이라고 쓴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며 “강릉 사천은 허균의 태를 묻은 그의 고향이자 터전이었던 곳”이라고 덧붙였다. 애일당 터, 허균의 흔적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 세운 ‘교산 시비’ 등이 멀지 않은 거리에 모여 있다.
북쪽인 주문진으로 향하는 길목, 소돌 포구 부근엔 또 다른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소돌아들바위’다. ‘옛날에 노부부가 백일기도를 하며 아들을 얻은 후 자식 없는 부부가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 때문인지 신혼부부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는 게 인근 횟집 주인의 말. 소돌아들바위뿐 아니라 바람과 파도가 조각한 기암괴석이 해안 산책로를 따라 이어져 볼거리를 더한다. 방파제의 끄트머리, 강릉 출신 김은숙 작가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2’에 배경으로 등장한 빨간색 ‘소돌항 등대’도 지나치면 아쉽다.
강릉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는 또 있다. 동해안 최고의 비경을 간직한 해안 드라이브 코스 ‘헌화로’는 익히 알려진 신라 4구체 향가 ‘헌화가’ 이야기가 숨은 길이다. 노옹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쳤다는 이야기 속 절벽이 헌화로 어디쯤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강릉 시내에선 차로도 50여 분 떨어져 있지만, 동해와 어깨를 나란히 드라이브 하다 보면 눈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두 여인의 강릉 생가
허균의 이야기는 초당동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이어진다. 허균과 그의 누이이자 시인 허난설헌(허초희)의 생가 터 일대를 문학공원으로 꾸며놓았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허난설헌 생가 터의 ‘강릉 초당동 고택’, 허난설헌의 이름을 딴 ‘초희 전통차 체험관’으로 이뤄져 있다.
고택 안채에 들어서면 허난설헌의 생을 넌지시 엿볼 수 있는 두 편의 시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아들 딸을 잃고 쓴 시 ‘아들딸 여의고서’를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가 ‘연꽃 따는 노래’를 읊을 땐 ‘남이 봤을까 반나절이나 부끄럽다’는 시구에 조선시대 수줍은 여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생가 터 주변으로 펼쳐진 울울창창 소나무 숲을 꼭 거닐어 볼 것. ‘솔향 강릉’에서도 강릉 시민이 즐겨 찾는 산책로다. 인근엔 강릉의 대표 음식 ‘초당 순두부’를 내세운 식당들이 모여 있다. 보슬보슬 부드러운 순두부 요리를 맛보고 산책 삼아 둘러보고 나서 초희 전통차 체험관에서 차를 한잔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차 시음은 2000원, 다도 체험은 차 포함 5000원이다.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강릉’과 ‘경포 아쿠아리움 석호 생태관’, 카페 ‘테라로사’ 등도 모두 도보 5~10분 거리여서 한 코스로 즐길 수 있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에서 차로 5~10분 가면 강릉을 대표하는 또 다른 여인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인 율곡 이이의 생가 ‘오죽헌’이 있다. 조선 중종 때 지어진 건물엔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 용꿈을 꿨다 하여 ‘몽룡실’이라 불리는 생가와 율곡의 유품 소장각인 ‘어제각’, 기념관 등이 있다.
두 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300여 년 전통의 ‘강릉 선교장(船橋莊)’도 다시 들여다볼 만하다.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한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이자 강릉을 대표하는 고택 체험 명소다. 지난 산불 때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귀한 문화재라 그런지 햇살을 받는 기와 한 장, 고색창연한 툇마루 하나도 각별하게 느껴진다. 풍류를 즐기고 접빈객을 맞이하던 활래정 주변을 거닐거나, ‘좌청룡’ ‘우백호’라는 이름의 선교장 둘레 길을 걷다 보면 선교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고택 안팎으로 작약, 모란, 상사화, 장미가 만발해 운치를 더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30분 선교장 내 ‘열화당’엔 파이프오르간 연주곡이 울려 퍼진다. 한국인 최초로 뉘른베르크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서 1위를 한 바 있는 오르가니스트이자 대를 이어 선교장을 지키는 한지윤 강릉 선교장 문화예술국장이 그때그때 다양한 레퍼토리로 연주한다. 고즈넉한 고택에 ‘넬라 판타지아’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면 성스러움이 가득 차는 듯하다. 선교장 입장(성인 5000원) 시 공연 무료, 숙박 체험은 4인 기준 1박 5만원부터 최대 6명 25만원까지.
◇월화거리 속 애틋한 사연
강릉에서 나고 자란 수필 작가 진영하씨는 “‘핫플’로 떠오른 월화거리 내 ‘월화정’에도 고유의 설화인 ‘무월랑과 연화 부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고 안내한다.
시대만 다를 뿐 이야기의 맥락은 춘향전과 비슷하다. ‘신라 진평왕 때 강릉에서 벼슬을 하던 무월랑은 연화 아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연화는 부모의 뜻에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갈 위기에 처한다. 이에 연화가 편지를 써 연못의 물고기에게 주었는데 사흘 동안 연못에 나타나지 않던 물고기가 헤엄쳐 신라 무월랑이 낚시하던 곳으로 가 무월랑에게 편지가 전해졌고 이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다. 남대천 부근 월화정에 가면 이야기 속 ‘사랑의 큐피드’였던 편지를 문 물고기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야기를 모르고 조형물부터 본다면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만한 위치다. 월화정만 보고 발걸음을 옮기지 마시라. 폐철도길을 따라 강릉역에서 부흥마을에 이르는 2.6㎞ 구간에 조성된 월화거리에는 진 작가 추천 ‘인생 샷 명소’로 소문난 ‘노암터널’, 주전부리 천국 ‘중앙시장’ 등이 기다린다. 크고 못생겨서 버려질 위기에 처했던 강릉·평창 감자를 기사회생시켜 음식과 굿즈로 만들어 파는 ‘감자유원지’ 등 철로 주변으로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 식당이 이어진다.
지난 12일을 시작으로 매주 금·토요일 오후 6~11시에 ‘월화거리 야시장’이 개장(~11월)하며 즐길 거리가 더해졌다. 남대천 위를 가로지르는 월화교에선 야간 분수 쇼도 펼쳐진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일요일은 오후 2시와 8시, 금·토요일은 오후 9시에 한번 더 진행한다.
◇강릉은 극장이다
이야기 가득한 강릉에선 오는 25일부터 내달 14일까지 ‘강릉은 극장이다’를 주제로 ‘2023 강릉 관광 브랜드 공연’ 프레 페스티벌이 열린다. 관광 거점 도시 육성 사업의 하나로 축제 기간 강릉의 주요 문화재와 관광 자원 등이 극장으로 변신한다. 오는 25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공연하는 ‘新사임당-사임당을 그리다’를 시작으로 27·28일과 내달 3·4일 오후 2시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야외 특설무대에선 강릉 대표 음식인 옹심이와 장칼국수, 일명 ‘옹칼’의 탄생 비화를 재미있게 풀어낸 다이닝 공연 ‘옹칼의 비밀’을 선보인다. 관객이 감자전과 막걸리, 옹심이를 맛보며 즐기는 체험형 공연. 야외 객석은 주막이 된다.
강릉 선교장에서는 내달 8일부터 14일(12일 휴관)까지 매일 오후 6시 30분과 8시 30분에 관람객이 극중 결혼식 하객이 되는 참여형 뮤지컬 ‘월하가요’가, 강릉아트센터 소공연장에선 오는 27·28일 오후 2·5시에 허균과 허균의 소설 속 주인공인 홍길동이 만나 모험을 펼치는 판타지 창작 뮤지컬 ‘목소리의 주인’이, 내달 2·4일 오후 3시와 7시 30분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선 미디어융합댄스 퍼포먼스 공연 ‘단오지향’ 등이 연이어 펼쳐진다. 자세한 내용은 ‘2023 강릉 관광 브랜드 공연’ 프레 페스티벌 홈페이지(www.festivalgn.com) 참조.
“강릉 인물·음식·명절로 5色 공연 보여주고파”
‘강릉 관광 브랜드 공연 축제’ 예술감독 맡은 박용재 시인
박용재 시인은 강릉 사천면 사천진리 허균의 생가인 ‘애일당 터’ 인근에서 태어났다. 글을 쓰고 단국대 문예창작과에서 강의도 하는 그가 강릉시 관광 거점 도시 육성 사업인 ‘2023 강릉 관광 브랜드 공연 프레 페스티벌’(5월 25일~6월 14일)의 예술총괄감독을 맡았다. 작년 10월부터 일주일 중 3일은 서울 본가, 4일은 강릉 작업실을 오가며 ‘3서 4강’ 하고 있다. 올해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이 공연 축제의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천 해변이 훤히 내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강릉 관광 브랜드 공연 프레 페스티벌’에 대해 설명해 달라.
“강릉은 이야기와 콘텐츠가 풍부한 곳인데 관광 명소로만 머물러 있으니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다. ‘바다’ ‘커피’ 그다음은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인물, 음식을 공연으로 재미있게 풀어 여행객들에게 새로운 추억을 선사하고 궁극적으로는 강릉을 알리는 축제다. 첫걸음을 떼는 해라 ‘프레(Pre-)’를 붙였지만, 사실상 축제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강릉은 극장이다’라는 주제는 어떤 의미를 담았나?
“이번에 선보이는 5개의 공연은 ‘강릉아트센터’뿐 아니라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이나 ‘선교장’ 등을 야외 공연장으로 활용한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인 ‘오죽헌’은 공연장은 아니지만, 공연의 배경이 된다. 강릉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를 테마로 하니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강릉 전역이 극장이 되는 셈이다.”
-’마당컬’ ‘이머시브(관객 몰입형) 뮤지컬’ 등 공연 장르가 다소 생소하다.
“강릉 선교장에서 공연할 ‘월하가요’는 혼례에 초청장을 받은 관객이 하객이 되어 이동하면서 즐기는 국내 최초 야외 이머시브, 인터랙티브 형태의 창작 공연이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에서 공연할 ‘옹칼의 비밀’은 관객이 마당에서 음식을 시식하면서 함께한다. 마당극과 뮤지컬이 결합된 장르라 해서 ‘마당컬’이라 이름 붙였다.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하는 ‘단오지향’은 단오제의 칠사당 신주 빚기 등을 소재로 한 댄스 퍼포먼스다. 단오제를 새롭게 즐기는 방식으로 전통 연희 양식에 미디어를 활용했다.
-준비 과정에서 ‘산불’이 발생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안타까운 일이고 이로 인한 관광 침체가 걱정됐지만, 고급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극복해보자는 의지로 준비했다. 야외 공연장인 강릉 선교장이나 허균 허난설헌 기념 공원은 문화재, 관광 자원이다 보니 관객의 안전과 문화재 보호가 우선이라 꼼꼼하게 점검하고 있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공연이 있다면?
“5편 모두 순수 창작이자 신작이라 기대를 모은다(웃음). 그래도 관객 참여형 공연들은 당일 반응에 따라 현장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강릉의 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이번 축제로 기대하는 바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육성 사업이 아니라, 강릉의 유·무형문화 유산들을 공연 콘텐츠로 만들어 후대에 전하는 ‘브리지(가교) 역할’을 했으면 한다. 아울러 강릉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며 머물다 가는 관광객이 늘었으면 좋겠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있을까?
“물론이다. 전석 1만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있는 공연을 선보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