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금이다.
우리는 바쁘고, 금값은 오르니까. 편의점이 ‘금 자판기’를 들여놓은 이유다. 말 그대로 24K 순금을 즉석 판매하는 기계. GS리테일 측이 지난해 9월 말부터 자사 편의점 및 슈퍼마켓 5곳에서 시범 운영했는데, 골드러시가 잇따르며 도입 한 달 만에 약 1000돈(3.75㎏)이 판매됐다. 반년 만인 지난 4월까지 누적 매출은 28억 6600만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설치 매장을 29곳으로 늘렸고 올해 100곳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GS리테일 관계자는 “금값 상승세가 계속돼 금을 향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액으로도 쉽게 금을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주고객 층은 3040세대. 소규모 금매매에 뛰어드는, 이른바 ‘소금(小金)’ 채굴족을 노린 것이다.
◇지갑 얇아도 골드 컬렉터
자판기에서 고를 수 있는 금 종류는 1돈·3돈·5돈·10돈. 자판기는 매일 국제 시세를 자동 반영하는데, 지금껏 판매된 미니 골드바 3103개 중에서 1돈(56%)이 압도적으로 많이 팔려나갔다. 도난 카드 사용 등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본인 인증 과정을 거쳐, 최종 결제 직전 휴대폰으로 본인 인증을 완료한 후 구매할 수 있다. 할부(카드)도 가능하다. 결제가 끝나면 손톱만 한 금괴가 플라스틱 통에 담겨 툭 떨어진다. 한 블로거는 “12개월 할부면 3만원으로 금 한 돈을 살 수 있다”며 “대학생도 금 모으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금 좋아하는 건 만국 공통. 2009년 독일을 시작으로 아랍에미리트·싱가포르 등이 일찍이 ‘금 자판기’를 도입했고, 지난해 인도에도 설치됐다. 한국에서도 2009년 주얼리업체 미니골드(혼 그룹) 측이 금 자판기 ‘골드모아’를 선보인 바 있다. 이듬해 홈플러스 잠실점 등 유동인구 많은 도심에 설치됐으나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화려한 부활을 알리고 있다. 특히 ‘돈줄’이 몰린 서울 강남 지역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중이라고 한다. 지난 23일 역삼동 편의점 자판기에서 1돈짜리 금을 구매한 한 40대 남성은 “돌 선물용인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금화하기에 돌반지보다 골드바가 유용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비상(飛上), 금!
금값은 3월부터 가파르게 올랐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후폭풍 등이 겹치며, 안전 자산인 금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졌기 때문이다. 금은 매장량이 한정돼 있어 화폐와는 달리 재화의 희소성이 유지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11일 금 1g당 가격은 8만6546원으로 국내 최고가를 기록했다. 스위스 최대 투자은행 UBS는 지난 18일 ‘지금 금을 사야 할 세 가지 이유’라는 리포트를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달러화 약세 장기화, 각국 중앙은행의 금 사재기 추세, 미국발 경기 침체 위험이 그 이유였다. “올해 말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높다.”
종잇조각인 지폐와는 달리, 금은 언제든 엿 바꿔 먹을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비상금이 되는 것이다. ‘금배지’가 대표적이다. 편의점 이마트24는 가정의 달을 맞아 이달까지 ‘순금 카네이션 배지’(1g, 1.875g, 3.75g) 등을 시세보다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카네이션은 시들지만 금은 그대로니까. 한국금거래소와 손잡고 매주 금값보다 2000~3000원씩 싸게 내놓은 것인데, 관계자는 “금값은 우상향 가능성이 커 소액이나마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선물”이라며 “현금성 자산인 데다 재테크 요소까지 갖춰 수요가 늘고 있다”고 했다. 작년보다 판매가 25% 늘었다.
◇장독에 1g ‘황금쌀’ 모아요
티끌 모아 태산. 돌반지 전문 브랜드 뽀르띠가 1g짜리 ‘황금쌀’을 판매하고 있는 이유다. 길이 7㎜, 높이 4㎜짜리 실제 쌀알 크기의 순금 제품으로, 쌀알 하나에 13만 2700원. 미니 장독도 판매한다. 곡식으로 항아리를 채우듯, 적금식 소액 투자의 즐거움과 함께 자녀에게는 재화 투자의 가치를 미리 교육할 수도 있다는 설명. 0.2g 황금 부적도 있다. 지폐처럼 얇지만 엄연히 ‘골드바’다.
같은 개념의 1g ‘순금콩’도 이달 초 출시됐다. 주얼리 브랜드 수앤진골드 측은 “출시 한 달이 채 안 됐는데 150개가 팔렸다”고 했다. 큰 그림을 위해 조각 조각 황금 퍼즐을 모으도록 한 ‘퍼즐 골드바’도 있다. 이달 기준 3억원어치 판매됐는데, 전년 동기 대비 250% 상승한 수치다. 최근 ‘골드바 구독 서비스’까지 시작했는데, 매달 말일 g당 금값 고정액을 자동 이체하면, 다음 달 금값이 떨어질 경우 구독 가격에서 차액을 예치금으로 적립해준다. 김진관 팀장은 “주식·부동산 열기가 꺼지면서 현물 자산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며 “큰돈을 투자하기는 힘든 젊은 세대를 겨냥해 금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는 시도”라고 했다.
◇쥐똥만 한 금쪽이
“‘득금’ 축하드립니다.” 온라인으로 개인끼리 잡금을 사고 파는 ‘쥐똥금’ 매매도 활발하다. 골드바처럼 매끈하게 성형하지 않고 마치 쥐똥마냥 동그랗게 뭉쳐 유통하는 ‘막금’이다. 순도가 검증되지 않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잘 모아 녹이면 두툼한 골드바가 된다. 중고 거래 앱이나 인터넷 카페를 통한 거래가 대부분인데 가끔 ‘댓글 경매’도 진행된다. 지난 22일에도 2돈짜리 쥐똥금이 시작가 5000원에서 출발해 63만 3000원에 최종 낙찰됐다. 투명한 저금통에 쥐똥금을 모은 ‘인증샷’ 게시도 활발하다. 미래를 기약하는 이들에게는 금쪽 같은 내 새끼. “귀엽죠? 올해 목표는 30개 모으는 걸로.”
디지털에서 쥐똥은 더욱 작아진다. 한국금거래소 측이 운영하는 모바일 금은방 ‘금방금방’에서는 0.005g의 금부터 거래가 가능하다. 실시간 바뀌는 금 시세를 확인해 코인처럼 매수하거나, 본인이 보유한 금을 비대면 간편 감정 이후 판매할 수도 있다. 박병숙 디지털에셋팀장은 “올해 일간 거래액이 약 1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며 “가입자 역시 하루 200명꼴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금통장 털고, 금니 팔고
올랐으면 팔아야 한다. ‘금통장’이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금통장’은 돈을 은행 계좌에 넣으면 해당 은행이 매일 시세와 환율에 따라 금을 매수한 뒤 이익을 통장에 적립해주는 금 투자 방식이다. 대표적 상품인 신한은행 ‘골드리슈 골드테크’의 경우 지난 19일 기준 누적 계좌 16만 2119개. 전년 동기 대비 1656개 줄었다. 잔액 역시 4667억원에서 3884억으로 줄었다. 그만큼 손을 털고 나갔다는 얘기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최근 금값 상승으로 이익 실현에 나선 고객이 늘어난 결과”라고 했다.
입 안에도 금이 있다. 충치와 맞바꾼 비상금, 시세가 높아야 한 푼이라도 더 받는다. 치과용 폐금 매입 업체 금니마켓 관계자는 “금값이 올라 판매 문의도 늘었다”며 “금니를 택배로 보내주면 도착 당일 매입 금액을 입금한다”고 말했다. g당 평균 3만 2000원~3만 3000원 수준으로, 지난 한 달 이 업체 온라인 매입 신청자만 400명에 달한다. 올라가는 금값, 그러나 내려갈 수도 있다. 한 재테크 카페에 이런 글이 떴다. “금니 팔려다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올해 많이 오를 것 같아요.”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