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과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딸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하지만 딸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머니는 큼직한 닭을 한 마리 사와서는 배 속에 인삼과 마늘을 채워 네 시간 뭉근히 끓인 삼계탕을 대접했다. 사위가 될 이에게 잘 익은 닭다리 한 짝을 선뜻 떼어 주고는 그동안 잘 꺼내 놓지 않았던 기억들을 툭툭, 털어놓기 시작했다.
1930년에 태어난 어머니는 1948년 제주에 있었다. 그렇다, 바로 4·3 사건의 제주이다.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었던 딸은 어머니가 던지듯 꺼내 놓는 과거 이야기를 기록하다가 엮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바로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어머니 강정희씨의 이야기다.
지난 100여 년 동안 한반도는 참으로 많은 사건을 겪었다. 한일합방부터 남북 분단과 6·25 전쟁, 이후 남북한 각자의 몫으로 맡겨진 발전과 성장, 그에 딸린 통증과 부작용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그렇기에 평범할 것 같은 불특정 인물의 개인사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적인 요소들이 무심한 듯 불거져 나오기 일쑤다.
강정희씨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살다가 1945년 일본 본토가 공습을 당하자 부모의 고향인 제주로 피란을 온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4·3 사건이 터지고 정혼자가 죽는 등의 비극을 겪고 난 뒤 다시 오사카로 밀항한다. 그리고 결혼한 뒤 아들 셋과 막내딸 양영희 감독을 낳으며 정착하게 된다.
4·3 사건으로 남한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된 양 감독의 부모는 조총련에서 활동하고, 그 절정에서 아들 셋을 모두 북송시킨다. 하지만 잘 알려졌듯 북한은 지상낙원이 아니었으니 아들들의 삶은 피폐하다. 강정희씨는 그런 북의 자식들에게 꾸준히 송금하는 등 일본에서 뒷바라지를 하지만 결국 큰아들을 우울증으로 잃고 만다.
그리고 20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양 감독이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어머니를 뒷바라지하기 시작한다. 북의 가족들에게 지원하는 돈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는 등, 두 사람의 사이는 좋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감독의 배우자가 될 아라이 가오루가 찾아오자 분위기가 바뀐다. 아버지는 생전에 ‘미국인, 일본인과는 결혼 못 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의 존재에 반색하며 긴 시간 삼계탕을 끓인다.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새 식구의 출현이 그저 반가운 것이다.
가감 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보니 딱 보아도 어머니와 딸 사이가 데면데면한 게 확 드러난다. 그런 가운데 양 감독의 배우자 될 사람이 등장하면서 바뀌는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하고 정겹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오랜만에 닭 배 속을 가득 채워 삼계탕을 끓이고 싶어진다. 비록 나 혼자 먹더라도 정겨움만은 느끼고 싶달까?
하지만 삼계탕은 생각만큼 만만한 요리가 아니다. 요즘처럼 가정의 규모가 작아지는 현실에서는 큰 냄비를 갖추지 않는 경우도 많고, 통으로 끓이면 표면적이 작기 때문에 확실히 오래 걸린다. 그래서 나는 볶음용으로 토막 쳐진 포장육을 사 삼계탕을 끓인다. 배 속을 채울 수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표면적이 넓어 국물을 통닭보다 훨씬 빨리 낼 수 있고, 비교적 많이 자란 닭을 가공한 제품이라 맛도 좀 더 진하다.
밥을 함께 먹으며 강정희씨와 양 감독, 가오루 등 세 사람은 나날이 더 돈독해진다. 심지어 가오루가 어머니에게 삼계탕을 끓여 드리고, 2018년에는 강정희씨가 70년 만에 제주도를 다시 찾아 4·3 사건 추모식에도 다 함께 참석한다. 오십대의 딸은 여정 속에서 드디어 어머니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가족은 한계에 부딪힌다. 강정희씨의 알츠하이머 병세가 악화돼 과거를 회상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과 기억을 잃은” 어머니는 만날 수 없는 북의 가족과 죽은 남편을 계속 찾다가 2022년 1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