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 빠졌던 ‘아시아의 진주’가 깨어났다. 2019년 민주화 시위와 이듬해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봉쇄됐던 홍콩이 다시 관광객들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4년간 공백을 겪은 홍콩은 관광 산업에 뼈아픈 타격을 입었지만 아시아 문화의 중심지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 치열한 의지의 결과물로, 코로나 이전에는 없었던 관광 랜드마크들이 홍콩 도시 곳곳에 새겨졌다.

쇼핑과 미식의 도시라는 과거의 영광도 아직 유효하다. 네온사인 불빛이 가득한 도시의 아름다운 야경은 여전했고, 음식은 입에 착 달라붙었으며, 무방비로 지갑이 열리는 화려한 상품이 즐비했다. 다소 뻔한 홍콩의 풍경들은 과감히 제외하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 홍콩 여행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풍경들을 중심으로 이 도시를 훑었다.

①서구룡문화지구의 M+ 뮤지엄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홍콩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고 있다. ‘뮤지엄 그 이상’이라는 뜻을 가진 이 미술관은 홍콩·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미술관을 표방하며 2021년 개관했다. 건물 외벽에 짙은 녹색 유약을 바른 도자기 타일을 덮어 대나무 기둥을 형상화했다. /홍콩관광청

◇홍콩의 야심작 ‘서구룡 문화지구’와 ‘M+’ 미술관

최근 홍콩에서 가장 떠오르는 관광지는 ‘서구룡문화지구’다. 구룡반도 남서쪽 끝에 약 40헥타르의 바다를 메워 새로운 땅을 만들었다. 홍콩 최대 번화가 침사추이(尖沙咀) 바로 옆에 위치한 금싸라기 땅에 너른 잔디밭이 펼쳐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구밀도를 감당하려고 산 중턱까지 회색 콘크리트 건물을 빼곡히 채운 홍콩에선 무척 낯선 풍경이다.

풀밭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선 거대 건축물들은 모두 문화 예술과 관련된 시설. 핵심은 M+ 뮤지엄이다. ‘뮤지엄 그 이상’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건축, 디자인, 영상 등 시각 예술을 총망라한 미술관을 지향한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되기 위해 10년이 넘는 준비 기간을 거쳤다.

건물은 철(凸)자 모양을 하고 있다. 밤이 되면 건물 외벽이 거대한 스크린이 돼 바다 건너편 홍콩 섬에서도 ‘M+’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보인다. 근처에 있는 홍콩 최고층(118층) 건물인 국제상업센터(ICC)와 한 쌍을 이루는 이 풍경은 코로나 팬데믹을 전후해 홍콩을 상징하는 모습 중 하나가 됐다.

②M+ 뮤지엄을 대표하는 전시 공간 ‘지그 갤러리’. /홍콩관광청

M+는 영국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건축한 스위스의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와 드뫼롱이 설계했다. 건물 외벽을 짙은 녹색 유약을 바른 세라믹 타일로 덮어 대나무를 형상화했다. 전시관 창문으로 바다와 홍콩섬 쪽을 바라보면 대나무 숲 속에서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3층에는 넓은 테라스에 잘 꾸며진 정원이 펼쳐져 있는데, 홍콩섬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다. 미술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뮤지엄 곳곳의 디테일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시간이 훌쩍 흐른다.

M+엔 묘한 정치적 맥락이 있다. 바로 옆에선 ‘홍콩고궁박물관’과 중국 전통 연극을 위한 ‘시취(戱曲·희곡) 센터’가 문을 열었다. 서구룡문화지구 자체가 중국의 ‘문화 선전지’로 기획된 곳이기 때문. M+ 역시 이런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동시에 M+는 홍콩의 ‘저항 정신’을 잊지 말라는 요구도 함께 받고 있다. 중국 본토의 권위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좇은 홍콩 예술가들의 흔적을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M+가 아직 끝나지 않은 홍콩과 중국 정부 간의 긴장이 드러나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좀 더 많은 것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M+의 정도련 부관장은 “전시 기획과 관련해선 (중국 정부로부터)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라며 “홍콩과 중국 본토의 마찰은 홍콩 반환이 결정된 때부터 당연히 예상되던 문제였고, 이런 환경으로 인해 형성된 홍콩 사람들의 독특한 정체성 자체가 홍콩과 M+가 가진 자산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복잡한 이야기를 떠나, 서구룡문화지구는 잘 꾸며진 곳에 가서 아름다운 사진을 남기고 싶은 여행자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곳이다. 길게 늘어선 마천루, 푸른 바다, 녹색의 잔디밭을 한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곳이 세계에서 몇 군데나 될까. 특히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해 질 녘이 되면 수많은 홍콩 주민이 이곳을 찾는다.

③홍콩의 쇼핑몰 ‘K11 뮤제아’의 중앙 홀 ‘오페라 시어터’에서 천장 쪽을 바라본 모습. /홍콩관광청

◇쇼핑몰의 미래를 보여주는 ‘K11 뮤지아’

홍콩 전통 야경의 명소는 침사추이의 ‘스타의 거리’다. 빅토리아만을 사이에 두고 홍콩섬을 바라볼 수 있는 해안선을 따라 마련된 산책로다. 이 거리에 2019년 홍콩의 새로운 쇼핑 1번지, ‘K11 뮤지아(MUSEA)’가 문을 열었다. 그리스 신화 ‘뮤즈’에서 이름을 따온 이곳은 홍콩 대표 기업 그룹 중 하나인 K11의 에이드리언 청 대표가 야심차게 만든 복합 예술문화 공간. 그는 글로벌 예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화기업가이자 사회사업가, 그리고 ‘수퍼 컬렉터’로 알려져 있다. K11 뮤지아는 홍콩 부호인 그가 10여 년간 100여 명의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와 협업해 만들었다.

한마디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갤러리와 쇼핑몰이 혼합된 공간이다. 이곳만을 위해 특별하게 디자인된 명품 브랜드 스토어를 비롯해 곳곳에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이 채워져 있다. 35m 높이 중앙 홀은 마치 거대한 극장을 연상시켜 ‘오페라 시어터’로 불린다. 천장에는 일본 작가 지하루 시오타의 붉은색 실 작품이 화려하게 드리워져 있다. 쇼핑몰 안팎 곳곳에는 수많은 조각과 회화 등 예술 작품이 배치돼 있는데, 미술관처럼 전시작이 수시로 바뀐다. 쇼핑몰에서 예술품을 소개하는 도슨트를 운영할 정도로 다양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K11 뮤지아 건물은 외형 역시 중국스러운 화려함의 결정체다. 건물 상부 발코니가 굴곡져 있어 파도가 치는, 혹은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홍콩 건물의 특징인 ‘용문(龍門)’도 인상적이다. 풍수지리상 용이 드나드는 공간을 둬야 한다며 건물 중앙이 뻥 뚫리도록 설계한 것. 대륙의 기상이 거대 자본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의 결과물이 나오는지 감탄했다.

④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본 홍콩섬 센트럴 인근 야경. ⑤홍콩의 야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빅토리아 피크’를 향하는 홍콩의 명물 ‘피크 트램’. ⑥라마 섬 남쪽 속쿠완 부두 근처 풍경. 부두 근처로 어선과 소형 양식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과거 어촌 마을의 풍경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홍콩관광청

◇구도심 투어로 홍콩의 옛 정취 찾아볼까

조던역과 몽콕역 근처에 위치한 야시장은 홍콩의 필수 관광 코스 중 하나다. 여기서 활동 반경을 남북으로 조금만 더 넓혀도 화려한 도시 풍경 속에 숨어 있는 ‘진짜 홍콩’의 모습을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을지로나 성수동처럼 낙후한 구도심이 ‘힙’한 동네로 떠오른 것처럼, 전통적이고 레트로한 홍콩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남쪽으로는 야우마테이역이 있다. 홍콩이 땅을 넓히기 위해 매립을 하기 전에는 부두가 있던 곳 근처라고 한다. 근처 ‘상하이 거리’를 따라가 보면, 3∼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지닌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중식 셰프의 90%가 사용하는 칼 전문점 ‘찬치키 커틀러리 컴퍼니(陳枝記)’나 ‘만키 도마(萬記砧板)’ 등 60년 이상 된 명장들의 가게를 만나볼 수 있다.

홍콩 영화를 좋아한다면 북쪽으로 삼수이포역에 가볼 만하다. 과거 도시 빈민층이 살던 이곳에는 ‘무간도’에 나온 압리우 거리(전자기기 상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의 구도심이 주거 지역과 떨어져 있는 것과 달리 상업 지구와 주거 지역이 겹쳐 있다. 도심 한복판에 식료품을 파는 노점들이 길게 늘어서는 등 거리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1955년 홍콩 야우마테이에 문을 연 ‘만키 도마집’. 이곳에서 만든 나무 도마를 선물받는 것이 홍콩 주부들의 꿈이라고 한다. /홍콩관광청

야우마테이와 삼수이포 곳곳에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예술영화 극장, LP숍, 카페, 소품점이 보석처럼 숨어 있다. 미쉐린 스타를 받은 곳들은 아니지만, 서민들이 즐겨 찾는 홍콩의 ‘B급 구르메’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나만의 맛집 지도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 야우마테이역에서 몽콕을 지나 삼수이포역까지 뒷골목 곳곳을 누비며 걸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큰길로 곧장 걸어가면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홍콩 특유의 빛바랜 색감으로 덧칠해진 고층 건물들을 보면 휴대폰 카메라를 내려놓기가 힘들어진다.

◇페리 타고 복잡한 도심 벗어나 섬으로 가볼까

홍콩 하면 보통 화려한 도심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홍콩의 대중교통 선박인 페리를 타고 20~30분만 이동하면 도심과는 또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섬마을에 방문할 수 있다. 항구이자 어촌이 가득했던 홍콩의 과거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지만, 이곳 섬마을에는 그 원형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특히 이곳 섬들에는 도심 생활에 지쳐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홍콩의 ‘힙스터’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주윤발의 고향인 라마섬이 대표적이다. 라마섬에는 페리로 갈 수 있는 항구가 두 군데 있는데, 두 곳의 분위기가 딴판이다. 북쪽 용수완 부두 근처 ‘힙스터 군락’은 서양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마치 유럽 휴양지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남쪽 속쿠완 부두 근처에는 과거 어촌의 정취가 짙게 남아 있다. 썰물 때 갯벌에서 바지락이나 게를 잡는, 한국에서도 익숙한 어촌 풍경도 볼 수 있다. 매립지가 대부분인 홍콩에는 인공 해수욕장이 많은데, 이 섬에서는 자연 해수욕장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라마섬을 오가는 페리는 보통 홍콩 섬 센트럴 항구에서 타는데, 오전 6시 30분부터 자정 너머까지 30분 단위로 운행한다. 뱃삯은 평일 기준 19홍콩달러(약 3200원). 항구에 도착하면 수조에 가득한 해산물들을 즉석에서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라마섬을 오가며 감상하는 홍콩섬 남쪽의 스카이라인은 페리 선상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홍콩의 또다른 얼굴이다. /홍콩=류재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