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셋이 모이면 단톡방이 생긴다. 술잔 부딪치다 또 만나자며 만들고, 여행지에서 인연이 돼 만들고, 산후조리원 동기끼리 또 만들고.... 모두가 웃으며 들어가지만 나오기는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 스마트폰 단톡방이다.

온 국민의 단톡방 수감 생활을 끝낼 비장의 카드가 등장했다. 지난 10일 카카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단톡방에서 나갈 수 있는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도입했다. 기존에는 단톡방에서 나가기를 클릭하면 ‘○○○님이 나가셨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는데 이제는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퇴장하는 길이 열린 것. 서비스 도입 소식을 듣고 냉큼 카톡 앱을 열었다. 회사·동문·동네 모임 등 단톡방이 모두 15개! 대화가 활발한 방은 1~2개뿐이었다. 평소 탈출을 벼르던 채팅방부터 공략했다. 단톡방 나가기를 누르고, 뒤도 안 돌아보고 퇴장했다. 이 땅에 카톡이 시작된 지 13년. 단톡방 탈출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유현오

◇완전 범죄 가능해진 단톡방 탈출

증거를 남기지 않고 단톡방에서 사라지기까지 1분도 안 걸렸다. 카카오톡 업데이트(10.2.0버전)를 마친 뒤 앱 화면 오른쪽 위에 있는 톱니바퀴 모양 설정으로 들어가 실험실 항목에서 ‘채팅방 조용히 나가기’를 켜면 탈옥 준비는 끝난다. 단톡방에서 나가기 아이콘을 누르면 ‘조용히 나가기’를 할지 묻는 팝업이 뜬다. 단톡방 감옥을 나갈 열쇠를 손에 쥔 순간.

단톡방에서 흔적 없이 나가는 '조용히 나가기' 기능./카카오

100명이 넘는 대학 동문방부터 탈출을 감행했다. 얼굴도 잘 모르는 80년대 학번 선배님들의 ‘라떼는~’ 무용담과 정치인 비방으로 하루에만 50개가 넘는 톡 메시지가 쏟아지는 곳. 과거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람에 지쳐 2~3차례 나갔지만 그때마다 방장의 초대로 강제 소환되면서 탈옥을 포기했었다.

대화가 끊긴 어느 새벽, ‘조용히 나가기’를 눌렀다. 그리고 방에서 나간 이후 2주가 지났다. ‘왜 나갔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단톡방에 있던 3명에게 “얼마 전 단톡방에서 나갔다”고 했더니 모두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중 1명은 “실은 나도 어제 탈출했다”고 고백했다.

인원이 적은 경우는 어떨까. 회사 동기 10명이 모인 채팅방도 시도해봤다. 이 방에서도 누구 하나 몰래 나간 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말 없이 나온 것 같은 찝찝함이 있었지만 완전 범죄(?)를 했다는 짜릿함이 더 컸다. 특사가 된 기분도 들었다. 단톡방 탈출에 성공한 다른 지인들은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이제야 도입한 거냐”며 오히려 카카오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단톡방 퇴장 기능은 서비스 초기부터 ‘사라질 권리’를 주장하는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카톡 이용 실적이 회사 매출로 연결되는 카카오 입장에선 결단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카톡 먹통 사태가 계속 일어나고, 국회가 단톡방 퇴장 기능을 의무화하는 ‘몰래 퇴장법’ 입법까지 추진하자 두 손을 든 모양새다. IT 업계에 따르면 카카오 내부적으로 개발자와 기획자 사이에 퇴장 기능 도입을 두고 의견 차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세진 ‘단톡방 추노’

단톡방을 벗어날 길이 열렸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채팅방에서 나가는 사람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을 뿐 단톡방 구성원 명단을 보면 언제든 나간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 새 카톡 기능 도입 이후 회사, 대학에선 나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탈옥수’를 다시 잡아오는 단톡방들도 적지 않다. 카카오는 이런 ‘단톡방 추노(推奴)’를 줄이기 위한 계정 보안 조치도 마련했다. 모르는 사람이나 카톡에서 차단을 해둔 사람으로부터 단톡방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기능이다. 한 카톡 이용자는 “학교에서 특정 학생을 계속 단톡방에 불러 모욕감을 주는 사이버 불링(온라인 집단 괴롭힘)이 이번 업데이트로 줄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단톡방 스트레스를 해소할 근본적인 대책이 되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50명, 100명 이상 거대 단톡방의 경우 1~2명이 사라져도 티가 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인원이 적은 직장 부서, 학교 단톡방은 말 없이 퇴장했다간 발각될 가능성이 크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있는 ‘시월드 단톡방’도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각지대다.

한국은 유독 단톡방의 파워가 강하다. 서울 성동구의 한 초등학교 1학년 담임 교사는 “학부모 단톡방을 만들면 나중에 특정 학생, 부모 뒷담화를 하는 식으로 변질되는 경우를 숱하게 봐서 학부모 연락처를 공개하지 않는다”며 “그래도 엄마들은 어떻게든 번호를 알아내서 단톡방을 만들더라”고 했다.

◇단톡방 나오려 야반도주까지

카톡 서비스 초기에 단톡방은 순기능이 많았다. 코로나 때는 대학 수업 자료 공유, 기업 회의가 단톡방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단톡방이 서로의 안부를 수시로 물을 수 있는 기능 덕분에 가족 간 유대감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명(明)보다 암(暗)이 더 크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2%가량이 ‘단톡방 때문에 스트레스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퇴근 후 밤까지 알람이 울리고, 나와 상관 없는 톡이 쏟아지지만 눈치가 보여 나갈 기회를 놓친 경우들이다. 이 때문에 온라인에선 “톡 대화가 뜸한 밤에 야반도주를 하라”는 팁까지 등장했다. 서버 이상으로 카톡이 먹통이 된 날이 더 편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민MC 유재석은 예능 프로에서 카톡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연락에 대한 피로감이 있다”고 털어놨다.

대기업에 다니는 임준협씨는 “5년 전 해외 근무 당시 알고 지낸 한국인 10여 명과 단톡방을 만들었는데 서로 안부를 묻던 방이 귀국 후에는 정치 문제로 말다툼을 하는 등 감정 싸움이 격해져 나왔다”며 “정치 얘기를 금기어로 하면 부동산, 주식 얘기로 과열되면서 대화방이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대나무 숲이 됐다”고 했다.

◇단톡방도 다이어트가 필요해

조용히 나가기 기능 도입을 계기로 단톡방 엑소더스(대탈출)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리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방 정리를 하듯 단톡방 개수를 과감히 줄일 것을 조언한다. 나에게 필요한지, 내가 관심 있는 주제인지, 원래 모임 목적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지, 단톡방에 있어 행복을 느끼는지 등 ‘필관목행’ 기준에 따라 단톡방도 다이어트를 하라는 것.

도저히 탈출이 어려운 단톡방의 경우 메시지 알림을 무음으로 하되 카톡에서 ‘키워드 알림’을 설정하는 것도 방법. 본인 이름이나 ‘공지’ ‘회비’ 등 필요한 내용을 키워드로 설정하면 해당 내용이 단톡방에서 언급될 때마다 푸시 알림을 받을 수 있다.

정리 컨설턴트인 윤선현 베리굿정리컨설팅 대표는 “쓸모없는 단톡방을 정리한 이후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점검하면서 단톡방 다이어트를 꾸준히 이어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