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당에 지독하게 따라붙는 내로남불의 꼬리표부터 떼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직시하지 않은 채 남의 허물만 지적하는 것이 내로남불입니다. (중략) 전당대회의 돈 봉투 의혹, 코인 논란 등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내로남불과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우리 스스로 혁신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15일·더불어민주당 송갑석 최고위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조어 ‘내로남불’이 한국 정치권의 전문 용어처럼 사용된 지 오래다.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내로남불이란 단어가 등장한 기사는 2만건에 육박한다. 2015년 9건, 2016년 36건이던 기사 수는 2017년 1063건으로 폭증했고, 2021년 6736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2021년 위키피디아에는 ‘naeronambul’이란 표제어가 등재됐다.
많은 신조어가 반짝 유행하고 사라지는 것과 달리, 내로남불의 생명력은 끈덕지다. 나에겐 관대하고 상대엔 엄격한 이중적 행태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똑같은 퍼주기 공약도 우리 당은 ‘따뜻한 정치’인데 상대 당은 ‘포퓰리즘’이다. 개헌 주장도 우리가 하면 ‘구국의 결단’이지만 상대가 하면 ‘국면 전환용 음모’가 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를 내로남불당이라고 비난하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민주당에서는 드문드문 자당의 내로남불식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1980년대 대학가 유행어가 여의도 정가로
“세상에 이런 웃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부동산을 사면 부동산 투자고 남이 사면 투기다, 자기의 여자 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 관계는 스캔들이다, 이런 웃기는 주장과 꼭 같습니다.”
1996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박희태 당시 신한국당 의원(전 국회의장)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신한국당의 의원 영입을 비난하자 “야당이 (의원을) 영입한 것은 헌법에 위반 안 되고, 우리 당이 영입한 것은 헌법에 위반되느냐”며 한 말이다. 국회 공식 기록에는 박 전 의장의 발언이 최초이지만, 이런 유의 말들은 198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하면 숙달운전, 남이 하면 얌체운전’ ‘내가 사랑에 빠지면 로맨스, 네가 사랑에 빠지면 스캔들’ ‘내가 못생긴 건 개성, 네가 못생긴 건 원죄’ 등이다. 작가 이문열은 1987년 발표한 소설 ‘구로아리랑’에서 “지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믄 스캔달이라 카기도 하고”란 표현을 썼다.
2015년 7월 전병헌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이른바 ‘배신의 정치’ 발언을 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과거 대통령 본인이 했던 모든 것을 스스로 질타하는 유체 이탈 화법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누리꾼 사이에선 ‘내로남불’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무렵 정치권에서는 내로남불이란 단어가 설명 없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구한 韓 정치권 내로남불의 역사
미 뉴욕타임스는 2021년 4·7 재보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참패한 소식을 전하면서 그 원인 중 하나로 내로남불(naeronambul)을 꼽았다. 박원순·오거돈·조국 등을 언급하며 “한국인들은 문재인 정부 진보 인사들의 위선적 행태에 대한 냉소를 ‘내로남불’이란 말로 표출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문재인 정부 집권 여당에 환멸을 느낀 한국인들은 그들이 위선적이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며 내로남불을 소개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정부 여당에는 내로남불이란 꼬리표가 뒤따랐다. 야당 시절 민주당은 병역 면탈,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의 이유로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무위원 후보자 27명에 대해 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나서는 비슷한 의혹이 있는 이들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다주택자들에게 집을 팔 것을 강요했지만, 적지 않은 고위 공직자들이 다주택자로 남거나 집을 팔더라도 서울 강남의 ‘똘똘한 한 채’는 남겨뒀다. 야당 시절에는 청와대 특활비의 투명한 집행과 공개를 요구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옷값을 문제 삼았지만, 집권 뒤엔 특활비와 김정숙 여사 의전 비용 등에 대한 시민 단체의 공개 요구를 거부했다.
클라이맥스는 이른바 ‘조국의 강’이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 법무장관을 지낸 조국 전 장관은 공직에 나서면서부터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과거 정의와 공정의 화신인 양 상대 진영을 엄중하게 꾸짖고 비판했는데, 막상 그를 검증해보니 자녀 교육과 재산 축적에서 문제 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2009년부터 트위터에 차곡차곡 쌓아온 1만여 개의 글은 자신은 물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에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이 밖에 특목고를 없애자면서 정작 자기 아들들은 모두 외고를 보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전·월세 보증금 인상률을 5% 이내로 제한한 임대차 보호법을 대표 발의해놓고 법 국회 통과 전 자신이 보유한 아파트 전세금을 9%가량 올린 박주민 의원 등도 내로남불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문재인 정부 집권 4년 차인 2020년에는 대학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를 선정했다. 아시타비는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최근 논란은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이 당 안팎의 압박으로 탈당한 것과 관련돼 있다. 이들은 검찰 조사가 개시되지도 않았는데 사실상 출당시켜 놓고, 숱한 비리 의혹으로 기소된 이재명 대표는 왜 대표직을 유지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김남국 의원의 코인 의혹과 관련해 일부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상대 진영의 흠결은 힐난하면서, 제 식구 감싸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당이 우리 정부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시찰을 비난하는 것도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였다. 문재인 정부 때는 오염수 방류를 문제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의 내로남불 역사도 짧지 않다. 2015년 8월 정종섭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은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이란 건배사를 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지지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소추했었다. 야당을 중심으로 정 장관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새누리당은 “의례적 덕담에 지나지 않는다” “야당의 정치 공세가 과하다”며 그를 두둔했다.
지난해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자녀 입시 특혜 의혹에 휩싸이자 야당을 중심으로 윤석열 대통령(당시 당선인)이 내로남불적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임명 철회 요구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두고 그가 ‘조국 사태’ 때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최근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김태우 전 서울 강서구청장의 실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에 국민의힘이 반발하자, 민주당은 “그동안 정부 여당은 검찰이 수사만 해도 범법자로 낙인찍어 왔다. 그런데 자기 편은 대법원이 확정 판결한 사안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고 비판했다.
◇인간 본성? “정치 미숙과 양극화가 원인”
내로남불은 왜 만연해졌을까. 심리학은 내로남불을 인간 본성의 하나로 본다. 잘못을 했을 때 자아 붕괴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로남불이라는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행위자-관찰자 편향, 허구적 독특성 효과 등이 있다. 전자는 내가 한 행동의 원인은 상황 등 외적 요인에, 타인의 행동 원인은 그 사람의 성격 등 내적 요인에 귀인하는 경향을 뜻한다. ‘내 잘못은 실수, 네 잘못은 실력’과 같은 논리다. 후자는 자신은 남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착각을 의미한다. 남이 뇌물을 받으면 중대한 범죄지만, 내가 받으면 사정이 있다는 궤변이다. 철학자 허경은 저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에서 “내로남불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었던 적이 없으며, 사실상 (오직 줄이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 영원히 근절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결점 중 하나”라고 했다. 오늘날 내로남불이 사회적 의식 전면에 부상한 이유는 “내로남불이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정치학)는 한국 정치의 미숙함과 정치 양극화에서 내로남불이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내로남불과 같은 윤리적 문제가 터지면 국민들로부터 응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내로남불 정치인이) 이슈메이커로 주목을 받게 된다. 실제 논란이 있었던 의원들이 후원금도 많이 받지 않나. 또 거짓을 얘기해도 우리 편은 옳고, 참을 얘기해도 상대편은 틀렸다고 보는 ‘탈진실’ 시대의 정치 양극화도 원인이다.” 김 교수는 “내로남불이 자라나는 토양을 만든 게 문재인 정부”라며 “조국 사태가 대표적이다. 서민을 위하는 척, 도덕적인 척, 개혁적인 척했지만 모두 위선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겐 관대하고 상대방에겐 엄격한 편의주의적 도덕성 잣대를 지녔다”고 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이 강력한 도덕성을 갖고 있었다면 민주당이 위축됐을 테지만, 양쪽이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그렇지 못했다”며 “내년 총선, 2027년 대선에서 도덕성이 쟁점이 되지 않으면 정치권 내로남불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