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독일인 친구 부부가 그의 영국인 친구 부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작센주 드레스덴에서 공증인으로 활동하다 얼마 전 은퇴하였으나 10여 년 전부터 작센주 한국 명예 영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드레스덴 엘베강 언덕 위에 있는 그의 집은 포도밭을 낀 바로크 스타일의 작은 성채(城砦)로서 마당에는 국기봉을 세워 태극기를 높이 매달아 놓고 있습니다. 이제 공증인으로서도 은퇴하였으니 한국과 관련된 일을 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며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시작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유럽을 함께 여행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견원지간이었던 독불 관계가 청소년 등 젊은이들의 교류를 통하여 형제 관계로 변모한 예를 한일 관계에도 적용해보고 싶다는 취지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정을 짜서 서울에 왔기에 저도 함께 부산에 가서 챙겨주게 되었습니다. 1박의 짧은 부산 체재이므로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지 궁금하여 부산 출신 박수영 의원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상의를 했더니 일정을 짜보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유엔기념공원을 1순위로 올려 놓았습니다. 오랜 공직 생활에도 방문한 적이 없어 조금은 미안한 생각으로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아름답게 잘 정돈된 공원에 들어선 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아 정말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외국 친구들이 감동하는 것이 역력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이처럼 잘 모시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감동인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참전 유엔군 2311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군이 886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영국인 손님은 그 이유를 물으며 의아해하였습니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미국은 유해를 미국으로 모셔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안장된 분 가운데 유일한 장군 한 분이 계셨습니다. 미국인 리처드 위트컴(Richard Whitcomb)입니다. 전에 어렴풋이 들었지만 이번에 그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 30분쯤 발생한 부산 역전 대화재로 600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군수기지 사령관인 위트컴 장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이재민을 위하여 군수기지 창고를 열어 천막, 식료품, 의류와 침구류를 공급하여 이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수 물자를 함부로 민간 구제 물자로 사용하는 일은 위법이었습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의회 청문회에도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면할 수 없어 전역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지원 물자를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을 돕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부산대 건립 등 교육사업 지원, 메리놀 병원, 성분도 병원 등 의료기관 건립 지원, 전쟁고아를 위한 보육원과 고아원 지원 등입니다. 그는 1982년 7월 12일 서울에서 작고했고 유언에 따라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감동인 것은 물론입니다만 이번에 알게 된 감동 스토리는 더 있습니다. 위트컴 장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하여 부산의 뜻있는 분들이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 운동을 시작한 일입니다. 건립 위치는 남구 대연동 평화공원 내로 정하고 성금 모금을 시작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1만원씩, 3억원을 목표로 진행하는데 벌써 2억7000만원 정도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기업인이 3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나섰지만, 위트컴 장군을 기억하기 위한 시민운동인 만큼 많은 부산 시민이 동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물러났다고 합니다.
그동안 친해진 영국인 손님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나며 작별 인사로, 귀국하면 자동차를 사야 하는데 기아나 현대차를 사야겠다며 웃었습니다. 저는 서울로 돌아오면서 부산 시민은 아니지만 위트컴 장군을 위한 조형물 건립 운동에 힘을 보태기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