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갈비 스테이크 등 여덟 가지로 구성된 '라싸브어'의 디너 코스. /양세욱 제공

서울 안 ‘작은 프랑스’ 서래마을에 들어서면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든다. 사평대로에서 서래로로 접어들면 인구 구성부터 달라져 국내 프랑스인 열 가운데 넷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는 통계를 실감하게 된다. 1985년 한남동에서 옮겨와 서래마을의 구심 역할을 맡아온 서울프랑스학교 하교 시간이라도 겹치면 넓지 않은 거리는 유쾌한 프랑스어로 활기가 넘친다.

오랜만에 찾은 서래로 양편에 늘어선 카페며 와인바, 레스토랑 가운데 익숙한 간판은 드물다. 빠른 트렌드 변화에다 잦은 경기 변동까지 겪으면서 외식업은 급변하고 있고, 경쟁이 치열한 서래마을은 더 그러하다. 서래마을 한복판에서 오너이자 셰프로 스물두 해째 프랑스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라싸브어(La saveur·프랑스어로 ‘맛’이라는 의미) 진경수 셰프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서래마을 터줏대감 진경수는 부러움을 살 만한 경력과 경험을 두루 갖췄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배웠고, 대학 졸업 후 프랑스로 건너가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요리를 익혔다. ‘푸른 리본’이라는 의미의 르 코르동 블루는 1895년 파리에 설립된 가장 오래되고 명성이 높은 요리학교이다. 지금은 한국에 이 학교 출신 셰프들이 드물지 않지만, 2002년 문을 열 때는 이 경력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백년식당(TV조선)’ ‘수요미식회(tvN)’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타 셰프이자 두 해 동안 청와대 주방 시스템을 탈바꿈시킨 총괄 셰프 경력까지 더해졌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식탁보 위에 일류 셰프가 조리한 최고의 요리들이 차례대로 오르고, 웨이터의 친절한 해설과 와인까지 곁들이며 맛을 음미하는 파인 다이닝은 미식의 정점이자 음식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울지라도 특별한 날에 즐기는 제대로 된 한 끼를 포기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파인 다이닝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용어마저 낯설던 파인 다이닝을 정착시킨 데도 진경수의 역할이 컸다.

라싸브어는 지난달부터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프랑스 요리를 더 많이 알리고 싶다는 오랜 소망대로 메뉴 가짓수를 줄이고 이에 맞춰 디너 스테이크 코스 기준으로 10만원 후반대이던 가격을 9만5000원으로 낮췄다. 에스카르고, 푸아그라 같은 전통 식재료를 쓴 화려한 메뉴 구성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런 변화는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퓨전이 거스를 수 없는 트렌드가 되면서 요리의 국적을 따지는 일조차 점점 힘들어진 지금 프랑스 요리가 언제까지나 소수의 전유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진경수는 말한다.

식전빵에 이어 전식으로 렌틸콩 수프, 계피향을 가미한 항정살을 올린 카무트 샐러드, 새우와 엔초비를 곁들인 파스타가 차례로 나온다. 이달에 처음 선보인다는 새우 엔초비 파스타의 균형이 절묘하다. 메인으로는 블루 치즈 소스의 한우 안심, 포트와인 과일소스의 한우 등심, 비네거 소스를 곁들인 호주산 양갈비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미디엄과 미디엄 레어의 중간 굽기로 내는 양갈비의 식감은 명성 그대로이다.

디저트로는 아포가토와 에스프레소를 곁들인 프렌치 바닐라 아이스크림, 초콜릿 망고 플레이트를 낸다. 코스 구성을 단출하게 하면서도 디저트 두 가지는 남겼다. 주요 소비층인 30대의 취향을 고려한 결정이다. 모든 메뉴는 한두 달을 주기로 달라진다. 성게알 파스타를 비롯해 다음 달에 선보일 메뉴 구상이 벌써 한창이다.

요리의 팔할을 여행에서 배웠다고 말하는 진경수는 새로운 여행을 준비 중이다. 프랑스 요리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스페인 요리를 현지에서 경험할 계획이다. 경영자이자 요리사로 낯설던 프랑스 요리를 정착시킨 집념이 어떤 요리 세계로 그를 이끌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