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대부님,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행배야. 니캉 내캉 ‘가족’ 아이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명분이 이 세상에 더 있나?”

‘한국판 대부’로 불리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 1980년대 부산에서 세관원을 하다 비리로 쫓겨난 최익현(최민식)은 조폭 김판호(조진웅)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을 접수하기 위해 ‘같은 최씨’이자 조폭 최형배(하정우)를 끌어들이려 ‘가족’을 만든다. 가족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최형배는 옛 친구 김판호 패거리를 두들겨 패고 클럽 운영권을 빼앗는다. 검찰·경찰과 정치권에 뇌물을 뿌리며 이권을 따내는 반(半)건달 최익현과 길바닥 주먹질로 뒷받침하는 진짜 건달 최형배의 검은 카르텔이 ‘가족’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40여 년이 흐른 한국 사회의 가족은 전보다 사뭇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힘은 절대적이다. 오늘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이를 악물고 하루를 버틴다. 그런데 학자들은 “가족을 절대시하는 한국적 가족주의가 이제 한국 사회에 독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대체 무슨 얘기일까. 그들은 “이 가족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해결해야 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비혼·저출산 문제도 풀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명문대 출신 대기업 직원도 결혼을 포기한다

통신사에 다니는 박모(32)씨는 이른바 ‘스카이’ 출신에 연봉은 8000만원이 넘지만 남자친구도, 결혼도 포기한 지 오래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형편상 결혼할 때 지원을 받기도 어렵고, 도리어 부모님께 매달 생활비를 드리고 있다”며 “요즘은 노후 보장이 안 된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은 결혼 상대로 기피 대상”이라고 했다.

역시 스카이 출신에 연봉이 1억원대인 대기업 직원 이모(38)씨는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이제는 결혼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이유는 박씨와 정반대다. “여자친구의 학벌, 집안이 너무 형편없다고 반대하셨어요. 결혼하면 주신다던 아파트도 절대 못 준다고 하시더라고요. 울면서 설득해도 듣지 않으시고.... 결혼한 선배들에게 상담하니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 해봤자 결국 불행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 기대에 맞는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어요.”

고소득 직장인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차고 넘친다. 자신과 결혼 상대의 학벌과 직장, 소득, 모아 놓은 돈, 부모님의 노후 보장 여부까지 기재된 ‘결혼 견적’을 올려 결혼 가능 여부를 묻는다. 과거와 달리 양가 부모의 결혼 지원금 액수, 노후 보장 여부, 성향도 주요한 견적 대상. 댓글은 “결혼은 사랑보다 현실” “부모님 거스르는 결혼은 웬만하면 하지 마라”는 ‘현실적 조언’이 많다.

“왜 이렇게 결혼하기 힘드냐”는 청년들의 외침에 학자들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무한 책임을 요구하는 한국적 가족주의가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국의 효 문화가 은밀한 거래로 변질됐다’고 지적해 화제가 된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중산층 이상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과 유산을 제공하고, 자녀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성공과 봉양을 제공하는 거래적인 가족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결혼이 기존 가족의 자산과 특권을 세습하고 손자녀 세대까지 이를 유지, 확대하는 ‘계급 재생산’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청년들로선 ‘결혼도 육아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 일종의 결혼 파업, 출산 파업으로 간다.”

이런 경쟁에 낄 엄두를 내지 못해 “내 자식에겐 나 같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들을 두고 일부 기성세대는 “이기적이고 과도한 개인주의”라고 비판한다. ‘요즘 것’들은 가족과 효의 중요성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런 청년들의 호소는 도리어 과도한 가족주의에 포섭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슨 얘기일까.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은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배려해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말 자체가 모순적”이라며 “인생은 각자가 책임진다는 인식이 아니라 내 인생의 불행은 부모의 책임이고 내 자녀의 불행은 내 탓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과도한 가족주의”라고 했다.

◇왜 ‘가족’에 매달리나

온갖 장애물(?)을 넘고 결혼에 성공해도 끝이 아니다. 시부모는 “결혼할 때 집까지 장만해줬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기본적인 도리와 교류도 하지 않으려 한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자녀 부부는 “엄연히 독립된 가정에 시부모님이 자꾸 이것저것 간섭한다”며 열을 올린다. ‘너희 집 현관 비밀번호가 뭐냐’고 묻는 어머니와 ‘시댁과 연 좀 끊자’는 아내 사이에서 남자들은 머리를 쥐어뜯는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인생에 대해 ‘무한 책임’을 요구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볼 수 없는 과도한 가족주의 문화”라며 “부모 세대는 자신의 노후 자금까지 끌어다 자녀의 사업 자금이나 신혼집 비용에 제공하면서 내심 노후 봉양을 바라고, 청년 세대는 부모 세대의 과도한 간섭을 원치 않지만 부모의 유산이나 지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인하는 게 불편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가족주의 해체로 나타나는 문화 지체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정태 위원은 “결혼을 하면 독립된 가정이라고 보는 가치관과 자녀 부부는 원가족에 딸려 있는 가족이라는 기성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라며 “기성세대가 원가족이 더 우위라는 입장을 고수할수록 부담을 느낀 아래 세대는 가족을 생성하길 꺼리고, 그럼 자연히 출산율도 떨어진다”고 했다. “‘스무 살 넘은 자식은 다 큰 성인이고 독립하는 게 당연하니 간섭도 하지 말고 신경도 끄라’고 외치는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이 세대 불문 인기를 누리는 것도 과도한 가족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의 피로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이런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왜 한국인은 가족주의를 놓지 못하는 걸까. 학자들은 “노동시장이 양분되고 복지시스템도 안정적이지 않은 사회적 특징 탓에 의지할 곳은 ‘가족’밖에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노 위원은 “한국처럼 가족주의가 강한 이탈리아, 스페인 등도 출산율이 낮게 나타나는데 공통적으로 부모는 자녀를 고용 안정성이 높은 상위 노동시장에 진입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크고, 하위 노동시장으로 밀려난 청년들은 부모의 노후를 자신이 책임질 수 없다는 부담감이 커 결혼을 포기하거나 늦추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했다. 출산율이 떨어질수록 미래에 대한 전망은 더 나빠지고, 그럴수록 ‘우리 가족만이라도 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가족주의가 더 심화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픽=송윤혜

◇기로에 선 한국식 가족주의

영화 ‘대부’의 주인공 마이클 콜리오네(알 파치노)는 마피아인 아버지·형제들과 달리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다른 패밀리의 공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마피아가 된다. 마이클은 ‘가족’을 위해 콜리오네 패밀리를 합법적 사업체로 만들려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더 잔혹한 범죄와 부패에 연루된다. 결국 가족과의 관계마저 파탄나며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전상인 교수는 “한국식 가족주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 결말도 비극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정서적 교류가 중심이 아닌 경제적 관계로 심화될수록 갈등이 깊어지면서 모두가 불행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서이종 교수는 “지금과 같은 가족주의는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갈등을 더 키우고 비혼과 저출산을 키울 것”이라고 했다.

학자들은 “기성세대, 특히 기득권일수록 가족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가족의 핵심은 정서적 공동체인데, 한국의 가족은 과도한 경제적 공동체가 되면서 정서적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며 “기성세대는 자녀에게 자꾸 물려주고 책임을 대신 지려 하기보다 자녀가 스스로 독립하도록 하고 자녀 가족과 대등한 정서적 공동체를 이루는 방향으로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이 빨리 자립·독립하는 걸 돕는 방향으로 정부가 복지 시스템을 전면 재편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학자들은 청년 세대에 대해 “부모 세대에게 지원은 바라면서 간섭은 받지 않으려는 이중적인 태도는 버리고 독립된 성인으로서 독립된 가정을 꾸리려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정태 위원은 “한국 사회가 과도한 가족주의 경쟁으로 전체가 쇠락할 것인지, 다른 변화를 통해 분위기를 바꿀 것인지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