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마무리투수 오승환이 2군 훈련장에서 송진 가루가 든 로진백을 들고 있는 모습. 인터뷰 중엔 잘 웃었지만 마운드에 오르자 무표정 '돌부처'가 됐다. "이게 가장 밝은 모습입니다."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불펜에서는 최고의 클로저(closer)가 몸을 풀고 있었다. 현충일이던 지난 6일 삼성이 NC와 벌인 대구 홈경기. 삼성이 3점을 앞선 채 9회초가 되자 마운드에 오승환(41)이 올라왔다. 한미일 리그 통산 500번째 세이브라는 대기록까지 아웃카운트 3개가 남았다. 세이브(save)는 팀의 승리를 지키는 마무리투수에게 주어지는 기록이다.

오승환은 첫 타자를 안타로 출루시키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이어진 상대 타선을 직선타 아웃, 삼진, 땅볼로 잡으며 16개 공으로 뒷문을 걸어 잠갔다. 표정이 없어 ‘돌부처‘로 불리는 그는 손에 든 공을 스윽 쳐다본 뒤 관중석을 향해 10년에 한번 지을까 말까 한 미소를 보냈다. 까마득한 후배 선수들이 최고참 오승환에게 얼음과 물을 뿌리고, 얼굴에 케이크 생크림까지 묻혔지만 이날만큼은 돌부처가 아니었다. 축하 세리머니가 끝나고,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그의 첫 마디는 묵직했다.

“세이브, 정말 힘드네요.”

마무리투수는 실력과 강심장으로도 버티기 힘든 극한 보직으로 꼽힌다. 선발이나 계투진과 달리 마무리는 ‘뒤’가 없기 때문이다. 이 벼랑 끝에서 오승환은 20년간 1위를 지켰다. 프로 데뷔한 2005년 두 자릿수 세이브로 신인왕에 뽑혔고, 이듬해 KBO 한 시즌 최다인 47세이브를 거뒀다. 한국시리즈 최다 세이브(11회)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 미국에 600세이브를 넘긴 마리아노 리베라, 트레버 호프먼이 있지만 문화와 환경이 다른 한미일 3국 리그를 누비며 500세이브를 올린 투수는 오승환이 처음이다.

그래픽=송윤혜

◇프로 첫 선발·2군행 극약 처방

대기록 달성에 관심이 쏠리던 지난달 초 경북 경산의 2군 훈련장에서 그를 만났다. 경기력 회복 차원에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선발 등판을 한 뒤 마무리 복귀를 위해 짧은 휴식을 가지던 때였다. 구위는 떨어졌고 제구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제 소속팀이 아니라 야구 인생의 승패를 결정짓는 마무리 등판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진을 안타까워하는 팬이 많습니다.

“‘오승환이 아니라 팬들이 돌부처가 되고 있다’는 댓글이 있더라고요.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반등하면 오히려 더 좋아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더 이를 악물고 있어요.”

-타자들이 ‘더 이상 오승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존심 상하죠. 그런데 티를 내고 표현을 하는 건 바보예요. 야구뿐 아니라 사회 생활도 그렇잖아요. 자존심만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죠.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게 회복하는 길이겠지요.”

-올해 연봉을 구단에 위임했다고요?

“지난 시즌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한 팀 성적에 베테랑으로서 책임을 지고, 올 시즌 개인과 팀 반등을 위해 백지 위임을 했습니다. 백의종군한다는 각오로요.”

-부진 탈출을 위해 데뷔 후 처음으로 선발로 뛰었는데.

“끝판대장이 아니라 첫판대장이라고 하더라고요. 포수 강민호는 ‘드디어 꿈을 이뤘네’라며 농담했고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만큼이나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전화한 사람도 많았고, 짠하다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고요(웃음).”

-성과가 있었나요.

“1군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효과가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죠. 다만 긴 이닝 동안 다양한 타자를 상대하며 여러 구종을 점검한 게 좋았습니다.”

-최근 부진으로 ‘은퇴설’까지 나왔습니다만.

“세이브 같은 개인 기록 욕심 때문에 현역을 고집한다고 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아직은 몸 상태가 좋기 때문에 은퇴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떠밀리듯이 퇴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미련이 남은 건가요?

“우승을 한 번 더 하는 게 마지막 목표입니다. 과거 5차례 정상에 올랐지만 현재 팀 멤버들과 우승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요.”

-팀이 7위(6일 현재)인데 가능할까요.

“일단 끝까지 해봐야죠. 거꾸로 말하면, 어떤 팀이든 우승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잖아요?”

아무튼주말 오승환-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딸을 원해 치마 입힌 부모님

“잘하건 못하건 경기장에서 실실 웃고 그러는 거, 아주 보기 싫다!”

오승환은 서울 우신중 야구부 시절 목동 구장을 찾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친구들과 장난치는 걸 좋아하던 골목대장이었지만 가부장적 아버지에 아들만 셋인 집안에서 감정 표현은 사치였다. 훗날 이기든 지든 덤덤한 표정을 짓는 ‘돌부처’ 오승환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프로 데뷔 후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에서 5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를 제외하면 그가 환하게 웃는 표정은 보기 어려웠다.

-야구를 어떻게 시작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야구장에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야구는 나와 상관없는 세계였어요. 부모님이 익산에서 작은 도금 업체를 하다 서울에 금은방을 내며 이사를 했는데 전학 간 초등학교의 담임 선생님이 달리기를 잘하던 내게 야구를 권하셨어요. 처음엔 재밌었는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초보라서 실수가 잦았습니다. ‘쟤 때문에 경기를 진다’는 다른 학부모들의 불평을 듣고 여러번 집으로 도망쳤어요.”

-3남 중 막내인데 집에선 어떤 아들이었나요.

“부모님은 막내로 딸을 원했다고 해요. 아쉬움이 크셨는지 유치원 때는 여자아이처럼 단발머리를 하거나 머리를 땋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내게 치마를 입히셨어요. 그런데 부모님 바람과 달리 전형적인 개구쟁이로 컸습니다(웃음).”

-무표정한 얼굴이 트레이드 마크인데.

“이상하게 마운드에만 오르면 표정이 싹 그렇게 바뀌어요. 알고 보면 후배들에게 장난도 잘 걸고, 집안일도 열심히 합니다. 과거 합숙을 하면 요리, 설거지는 제가 도맡아 할 정도였어요.”

-마무리투수가 천성이군요?

“지금도 가사의 ‘마무리’인 설거지를 특히 열심히 합니다. 하하.”

-승리 후 하늘을 가리키는 ‘손가위 세리머니’는 무슨 의미인가요.

“포수인 (진)갑용이 형의 제안으로 경기 끝나고 밋밋하니깐 세리머니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환호와 성원을 보내주는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거예요.”

승리 세리머니 하는 오승환과 강민호/뉴시스
물세례 받는 오승환.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대구=뉴시스] 이무열 기자 오승환이 한·미·일 통산 500 세이브를 달성한 뒤 선수들이 얼굴에 케익 세리머니를 하며 축하해 주고 있다

◇3번의 팔꿈치 수술

오승환은 한미일 명문 구단에서 뛰며 마무리 전문 투수로 성장했다. ‘기록의 사나이’인 그의 야구 인생은 굴곡 없이 평탄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고등학교 때 프로 지명을 못 받았고, 대학·프로에서 치명적인 팔꿈치 수술을 3차례 받는 등 지뢰투성이였다.

-고교 때 왜 프로 지명을 못 받았나요.

“경기고 시절 척추 분리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투수 노릇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내게 관심을 가진 프로팀이 없었죠. 눈, 귀를 닫고 운동만 하던 어느 날 숙소에 동기들이 안 보였어요. 프로 신인 드래프트 날이었는데 결과를 확인하러 PC방에 간 것이었습니다. 동기들 대부분이 지명됐는데 제 이름만 안 불렸습니다.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유망주에서 낙오자가 된 것이죠.”

-대학에 진학하고도 미래가 불투명했습니다.

“단국대 야구부에 들어가서 맡은 첫 보직은 ‘장작 담당’이었습니다. 당시 허리 상태는 좋아졌는데 오른 팔꿈치가 아파서 달리기도 못 했습니다. 동계 훈련장 난로에 넣을 땔감을 준비하는 게 제 일이었어요.”

-결국 수술을 받았죠.

“공을 던지면 60m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팔꿈치 인대가 손상돼 다른 신체 부위의 인대를 떼어 팔꿈치에 끼워넣는 토미존 수술을 2001년 겨울에 처음 받았습니다. 반년 넘게 재활했는데 2002 월드컵이 열리는 줄도 모를 만큼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이후 2010년(삼성), 2019년(콜로라도 로키스)에도 팔꿈치 수술을 받았습니다.”

-힘든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웨이트트레이닝이 보약이라는 의사의 말에 죽어라 몸을 만들었죠. 원래 호리호리했는데 대학 때 웨이트로 체격을 키웠습니다. 한창 때는 스쿼트를 250㎏까지 들었죠. 지금은 언감생심이고요. 하하.”

◇돌부처도 패하면 밤잠 설친다

오승환은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와 자주 비교된다. 해외 리그를 제외하면 한 구단(삼성)에서 마무리 보직만 맡았고, 한국시리즈 같은 큰 무대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리베라는 44세에 은퇴할 때까지 652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래픽=송윤혜

-오승환의 야구 인생은 지금 어디쯤 와 있나요.

“어떤 선수는 1회부터 시작해 6~7회로 나아가지만 저는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9회’였습니다.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선수였죠. 오승환이라는 이름 뒤에는 늘 물음표가 따라다녔어요.”

-무슨 뜻이죠?

”대학 때 팔꿈치 수술을 받고 프로에 데뷔할 때 ‘투구 폼도 딱딱하고 구종도 단조로운데 통하겠느냐’는 뒷말이 무성했습니다. 2014년 일본(한신 타이거스)에 처음 진출할 때 일본의 세밀한 ‘스몰 야구’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요. 미국에 갈 땐 힘 있는 타자들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많았죠.”

-야구 인생이 참 아슬아슬했군요.

“20년 넘게 늘 9회에 야구를 하는 심정이었어요(야구공은 실밥이 108개라 ‘108번뇌‘로도 불린다).”

-선발투수를 향한 욕심은 없었습니까.

“풀시즌 선발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선발에 대한 도전이 나를 자극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팀 스포츠인 야구에서 개인의 결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팀에서 요구하는 보직을 충실히 맡을 뿐이죠.”

-1점 차 리드에 자주 등판했는데 부담이 크지 않았나요.

“어려운 상황에 감독님이 나를 믿고 마운드를 맡겨줬다, 중요한 순간에 공을 던지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점 차라고 긴장하고 있으면 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절박한 경험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선발과 마무리투수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마무리는 팀 승리와 직결되잖아요. 팀이 3시간 동안 앞서다가 마지막 3분에 뒤집히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니까요. 내 실투 하나로 패하면 충격이 꽤 크죠.”

-’돌부처’도 자책을 하나요?

”겉으로 티를 안 낼 뿐 많이 자책해요. 블론세이브(마무리투수가 동점 또는 역전을 허용하는 것)를 하면 밤에 잠이 안 와요. 나를 너무 몰아붙이면 긴 시즌을 소화하기 어려우니까 때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뻔뻔해지려고 해요. 누구나 그렇지 않습니까?(웃음)”

-마무리투수는 힘이 빠진 타자들을 1이닝만 상대한다고 해서 ‘귀족 마무리’라는 말도 있는데.

“그 반대예요. 9회가 끝나면 경기도 끝나요. 앞 이닝에서 2~3번 삼진을 당한 타자라도 마지막 이닝에 들어서면 집중력이 확 올라갑니다. 대타(代打)는 또 얼마나 무섭게 달려들겠습니까. 역전 한 방을 노리는 ‘9회말 2아웃’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승부에 대한 중압감,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요.

“후배가 예전에 ‘승환이형은 블론세이브한 날 집에 있는 술이 다 없어진다’고 했는데 옛날 얘기고요. 운동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경기하면서 풀어야죠. 성적으로 만회하는 게 최고예요. 안 좋은 경기를 하고 나면 ‘빨리 좋은 경기를 해야지’ 하면서 잊어버려요.”

<아무튼주말>오승환 -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세이브는 팀이 1승 한 것일 뿐”

타자들은 오승환의 공을 돌직구라 부른다. 돌덩이처럼 공이 묵직하기 때문. 동갑인 이대호는 “승환이 공은 차라리 바위”라고 했다. 레슬링 선수보다 강한 악력(약 82kg)을 자랑했고, 그가 던진 공의 분당 회전수(2400~2500회)는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높았다. 9회에 오승환이 등판하면 승률이 100%에 육박하던 시절, 류중일 삼성 감독은 “삼성은 8회까지만 야구하면 이긴다”는 말을 남겼다. 오승환은 구속이 전성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면서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 부진을 경험하고 나서야 500세이브에 도착했다. 한국 선수 중 오승환 다음으로 많은 세이브를 기록한 건 선배인 임창용(한일 통산 386회)이다.

-누적 500세이브, 참 어렵게 달성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세이브 하나 올리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느꼈습니다. 올 시즌 성적이 부진해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지난 2일 499세이브를 기록하고 아홉 수 없이 바로 500번째를 채워서 다행입니다.”

-그날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실점이 많아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어머니는 매일 카톡 메시지를 보내주셨고요. 작년 초 10살 연하 아내와 결혼하고 지난 4월 아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았죠. ‘야구 정말 어렵구나’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대한 압박이 심했을 텐데 표정에선 잘 안 느껴집니다.

“통산 400세이브 때도 기자들이 긴장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원래 개인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편입니다. 내가 세이브를 한다는 것은 그저 팀이 1승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500세이브를 한 건 소속팀의 500번째 승리를 지킨 것이죠.”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이라면.

“예전에 대구 시민야구장 시절 홈팬들이 공 한 개 던질 때마다 열광해주셨던 게 떠올랐어요. 이제 운동장에서 뛸 날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팬들이 9회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힘닿는 때까지 노력해야죠.”

-마운드에서 터득한 인생 철학이 있을까요.

“조급하거나 괜히 긴장해봤자 될 일도 안 되더라고요. ‘늘 하던 대로 하자‘며 평정심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삼성 2군 훈련장에서 만난 오승환은 체격이 다른 선수들의 2배는 돼 보였다. 우람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때문인지 지나가는 후배 선수들은 오승환을 볼 때마다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후배들 군기 안 잡아요. 하하.” 오승환을 두려워하는 선수는 9회에 그를 상대해야 하는 타자뿐일 것이다. 9회를 책임져야 하는 이 ‘승리 청부사’는 다시 마운드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