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地上)의 평온이 깨질 때 지하(地下)의 쓸모가 비로소 빛난다. 최근 흥행한 넷플릭스 시리즈 ‘택배기사’는 혜성 충돌로 사막화된 2071년의 서울이 배경이다. 폐허가 된 서울 강남 압구정 일대에는 최하층 시민인 난민들이 거주하고, 선택받은 소수의 중상류층은 지하 특별구역으로 들어가 산소를 공급받으며 산다.

지난달 31일 서울의 이른 아침을 뒤흔든 사이렌은 지하 공간의 존재를 새삼 일깨웠다. “위이잉~” 난데없는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깼다가, 먼발치서 들려오는 “실제 상황”이라는 방송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스마트폰이 사이렌보다 더 요란하게 울렸다.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화들짝 정신이 들어 곧바로 TV를 켰지만 앵커는 “북한이 남쪽 방향으로 우주발사체를 발사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허둥지둥하는 사이 ‘서울시의 경계경보는 오발령’이라는 행정안전부 문자가 날아왔다.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나선 출근길,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민방위 대피소’ 표지판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민 대피 시설로 지정돼 있는 서울 강서구청 지하 2층 지하 상황실. 평소에는 강당으로 쓰이다가 유사시 770㎡(약 233평) 넓이에 최대 933명이 대피할 수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대피소 표지판, 따라 들어가보세요

실제로 미사일 발사나 폭격 같은 공습이 벌어지면 지하 깊숙한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 전국적으로는 1만7542곳의 지하철역, 터널, 아파트나 빌딩의 지하 주차장 등이 주민대피시설로 지정돼 있다. 서울의 대피소는 3232곳(6월 현재 기준). 평소 주차장이나 강당, 상가, 체력 단련실로 쓰이는 지하 공간들은 유사시 대피소로 바뀐다. 그 면적만 서울 땅 넓이(605㎢)의 약 7%인 40㎢. 단순 계산으로는 서울시 인구의 3배 이상이 내려가 있을 수 있다.

지난 4일 오후 2시,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된 서울 강서구의 체육 센터를 찾았다. 대피소 표지판을 따라 차량이 드나드는 출입구로 지하 1층 주차장을 걸어 내려갔다. 바깥은 여름 더위가 시작됐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썰렁하고 습한 기운이 들어 팔뚝에 닭살이 올라왔다. 오래된 에어컨을 켰을 때 같은 퀴퀴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행안부 국민재난안전포털은 이곳에 최대 6763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주차구역의 절반 정도엔 차가 들어차 있었다.

또 다른 대피소인 종로구의 오피스 빌딩 지하 2층 주차장은 에어컨 실외기들이 더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5분 만에 땀이 삐질삐질 나 뛰쳐 나왔다.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되면 24시간 상시 개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건물 출입이 안 되는 곳도 있었다. 927명이 대피할 수 있는 어느 보건소 건물은 주말에는 출입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픽=송윤혜

◇77% “집 근처 대피소 모른다”

서울에 경계경보가 울린 직후 포털 사이트 네이버는 접속자가 몰려 일시적으로 먹통이 됐다. 주변 대피소 위치를 찾을 수 있는 행정안전부의 ‘안전디딤돌’ 앱도 켜지지 않았다. 미리 대피소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실제 공습이 벌어졌을 때 우왕좌왕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평소 대피소를 알아두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했고 지난 3일부터 이틀간 20~50대 남녀 4022명이 응답했다. ‘집 근처 대피소 위치를 알고 있다’는 23%에 불과했다. 50대(33.4%), 40대(23.5%), 30대(18.8%), 20대(16.4%)로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모른다는 비율이 높았다.

회사(학교) 인근 대피소를 알고 있거나(38%) 이동 중 경보가 울렸을 때 대피소를 찾는 방법을 알고 있다(37%)는 응답은 비교적 높게 나왔다. 이동 중에는 빨간 배경에 민방위 로고가 그려진 대피소 표지판을 찾거나 안전디딤돌 앱에서 인근 대피소를 검색할 수 있다. 김태환 용인대 경호학과 교수는 다만 “이동 중에 공습이 벌어지면 대피소로 지정된 곳을 찾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는 일단 가까운 지하로 빨리 몸을 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경계·공습·화생방경보의 차이를 알고 있다는 응답은 12%에 그쳤다. 모른다는 응답자가 55%로 과반이었고 나머지 33%는 “약간 알고 있다”고 했다. 적의 공격이 예상될 때 내리는 ‘경계경보’ 사이렌은 1분간 높낮이 없이 평탄하게 울린다. 이번에 서울에 울린 경보다. ‘공습경보’는 공격이 임박했거나 진행될 때 물결치듯이 5초간 올라가다 3초간 내려가는 사이렌이 3분간 울린다. ‘화생방경보’는 사이렌 없이 음성 방송만 나온다.

정찬권 국가안보재난연구원장은 “오랫동안 민방위 훈련이 관공서나 학교 위주로 형식적으로 이뤄져 왔고 지난 정부에서는 그마저도 없었으니 시민들이 대피소 위치나 경보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며 “북한 도발은 우리가 안고 사는 상시적인 위험인 만큼 민간 부문이 훈련에 동참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등 1년에 한 번이라도 (훈련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공습에 대비한 전국 단위 민방위 훈련은 2017년 8월 23일을 마지막으로 이뤄지지 않다가 지난달 16일 6년 만에 공공기관과 학교에서만 열렸다. 다음 민방위 훈련은 을지훈련 기간인 8월 23일로 예정돼 있다.

◇생존 필수품은 직접 챙겨야

서울시 위급 재난 문자를 받고 놀란 회사원 최모씨는 아침 7시 잠옷 차림으로 편의점으로 달려가 2L 생수 다섯 병을 샀다. 아내와 초등학교 1학년 딸을 데리고 대피할 채비를 했다. 무거운 담요 대신 기능성 바람막이를 3벌 넣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견과류와 참치 통조림을 챙기고 해열제를 플라스틱 약병에 부어 넣었다. 이 모든 걸 담고 나니 다시 울리는 ‘오발령’이라는 문자. 그는 “덕분에 재난 가방을 준비했으니 다행인 건가 싶었다”고 했다.

대피소에는 구호 물품이나 비상식량은 없었다. 김태환 교수는 “머무는 기한을 정해둔 규정은 없지만 폭격을 일시적으로 피하는 용도로 장기 체류를 고려한 시설은 아니다”라고 했다. 대피 시 생존에 필요한 물건은 직접 챙겨야 한다는 것. 경보 소동 직후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생존키트’ ‘방독면’ 같은 키워드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권에 올랐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위급 상황에 대비한 생존 가방을 갖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4%였다. 지난해 책 ‘생존배낭’을 펴낸 우승엽 도시재난연구소장은 “서울 경계경보 사건 이후로 생존배낭을 준비한 사람이 늘어났을 것”이라며 “전쟁 위험뿐 아니라 폭우나 화재 등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생존배낭은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도 국민재난안전포털을 통해 “평소 가족 수대로 비상용 백(Go Bag)을 준비해두라”고 권고한다.

생존 가방이 없다고 답한 사람들에게 긴급 대피할 때 챙길 것(복수 응답)을 물었더니 손전등(76.9%)이 1위였다. 생수(71.5%), 구급약(58.8%), 담요(52.8%)가 뒤를 이었다. 우 소장이 생존 가방에 꼭 챙기라고 조언하는 세 가지는 ①보온을 위한 의류 ②식수와 초코바·통조림 등 식량 ③손전등과 라디오 등의 비상 장비다. 그는 “욕심을 부려 무겁게 꾸리면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몸무게의 10%선이 적당하고, 집뿐만 아니라 회사나 자가용 트렁크 등에도 생존 가방을 하나씩 구비하는 게 좋다”고 했다.

◇반려동물, 데리고 갈 수 있을까

경계경보 이후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또 하나의 이슈는 반려동물이었다. 정부나 지자체가 지정한 대피소에 반려동물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설문 참여자 가운데 반려동물이 있는 644명에게 추가로 물었다. “경보가 울렸을 때 반려동물과 함께 갈 수 있는 대피소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0.5%는 ‘반려동물과 함께 집에 남겠다’고 답했다. 동물은 밖에 풀어주고 대피하겠다는 응답은 35.4%, 집에 두고 대피하겠다는 응답은 24.1%였다. 20대에서는 대피하지 않고 반려동물과 남겠다는 응답이 49.6%로 절반에 달했다.

공습에 대비한 대피소에 반려동물 대책까지 별도로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정부 부처의 입장이다. 온라인에서도 전염병이나 위생, 소음 문제 등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으로 반려동물 수용은 어렵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우승엽 소장은 “반려동물을 집안에 두고 대피할 때는 큰 대야에 사료와 물을 충분히 놓고 수도꼭지를 살짝 틀어 물이 졸졸 흐르게 해두라”고 했다.

자연재해나 전쟁 시 반려동물 대피에 대한 규정을 마련한 나라도 있다. 호주는 주별로 재난 시 반려동물 피난 계획을 수립하고 있고, 주한미군은 한반도 유사시 자국민을 해외로 후송하는 민간인 대피작전(NEO)에서는 사전 등록한 반려견·반려묘도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해 함께 이동하도록 한다. 다만 ‘사람보다 우선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소동이 있고 6일 뒤 현충일, 또 한 번의 사이렌이 울렸다. 지난번과 똑같이 높낮이 없는 1분간의 ‘추모 사이렌’이 이번에는 전국에 퍼졌다. 현충일 오전 10시에 울리는 사이렌을 앞두고 행안부는 거의 매년 “공습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것이니 동요하지 말아 달라”고 안내한다. 경보 사이렌에도 가슴 한번 쓸어 내리고 땅 위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6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