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고들 한다. 이때의 본성은 대체로 부정적인 느낌이다.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인간이 무너진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은 다르다. 갑작스럽고 엄청난 변화를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되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상을 보란듯 그려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의 주인공 소피 이야기다.
성실하게 부모님의 모자 가게를 지키는 소피는 마을에서 우연히 마법사 하울과 조우한다. 쫓기는 신세인 하울이 순간을 모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황야의 마녀로부터 저주를 받아 아흔 살 할머니로 변해버린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황해 난리를 치겠건만 소피는 침착하게 움직인다. 저주를 풀어보겠다고 집을 나서 시골을 배회한다.
그러다가 바로 하울의 주거지인 움직이는 성을 맞닥뜨린다. 초대받지도 않은 신세이건만 소피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성의 환경에 적응한다. 성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다며 청소부를 자임한 소피는 저주 탓에 하울만 다룰 수 있는 불의 악마 칼시퍼와도 금세 안면을 트고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베이컨과 계란. 소피가 처음치고는 비교적 잘하는 가운데 성의 주인인 하울이 나타나 조리를 이어받는다.
아무래도 성과 칼시퍼의 주인인지라 하울의 조리는 참으로 능수능란하다. 칼시퍼의 불길에 베이컨을 지져 기름을 녹여내고는 화덕 벽에 거침없이 부딪혀 깬 계란을 팬에 올려 함께 익힌다. 계란 껍데기를 먹은 칼시퍼가 신이 나서 불길을 키워주니 하울과 소피, 그리고 하울의 견습생인 마르클 세 사람의 따뜻한 아침 식사가 순식간에 준비된다.
영화의 세계에 온갖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이 등장하지만 흥으로 따지자면 하울의 베이컨과 계란이 단연 최고다. 메뉴의 난이도도 높지 않은 데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워낙 맛있게 그려내 따라 해보고 싶어진다. 덕분에 영화 속 베이컨과 계란은 ‘하울 정식’이라 불리며 인터넷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맛있는 하울 정식의 비결이 있을까? 일단 계란을 잘 깨는 게 중요하다. 흔히 계란을 그릇 가장자리처럼 좁고 날카로운 면에 부딪히는데 그러면 계란 노른자가 껍데기 조각에 찔려 터질 수 있다. 익히기도 전에 노른자가 터져버리면 영화에서처럼 ‘서니 사이드 업’으로 익힐 수 없으므로 일단 불합격이다. 하울이 괜히 평평한 화덕의 벽에 계란을 깨는 게 아니니, 거침없어 보이는 움직임에 섬세함이 배어 있다.
한편 베이컨은 기름을 좀 덜어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삼겹살을 자주 먹어 버릇해 잘 알고 있다. 같은 불판에 김치라도 구워 먹을라치면 튀지 않도록 기름을 적절히 덜어내야 한다. 그래서 고깃집 불판도 기울여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돼지 삼겹살로 만든 가공육이므로 베이컨도 구우면 기름이 엄청나게 녹아 나온다. 따라서 적당히 덜어내고 계란을 올려야 프라이팬이 난장판이 되지 않고 그럴싸한 요리처럼 만들 수 있다.
따뜻한 아침 식사를 나눠 먹은 덕분에 셋은 금세 가까워지고 소피는 움직이는 성에 자리를 잡아 조금씩 분위기를 파악한다. 소피의 나라와 이웃 나라가 전쟁 중인 가운데, 하울은 새로 변해 양쪽 세력을 모두 견제한다. 그만큼 소진되는 자신을 칼시퍼의 불로 회복시키지만 전황이 심각해질수록 많은 힘을 쓰고 인간으로 돌아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한편 초대받은 하울 대신 왕을 만나러 간 소피는 황야의 마녀를 만나는데, 그가 왕궁의 마법사에게 힘을 빼앗기고 자신보다 더 늙은 할머니가 되자 거둬들인다.
그렇게 할머니가 더 늙은 할머니를 보살피게 된 가운데 황야의 마녀는 하울의 심장을 빼앗으려 든다. 칼시퍼의 힘이 약해진 사이 그로부터 하울의 심장을 분리하려 든 것이다. 그러다가 마녀에게 불이 붙자 소피는 당황해 물을 끼얹고, 칼시퍼와 하울의 심장은 둘 다 소멸의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할머니로부터 돌려받은 심장을 하울에게 돌려주고 키스하자 하울이 살아나는 한편, 칼시퍼도 하울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는다. 그런 가운데 소피의 저주도 풀리니 희게 센 머리만 남고 다시 젊은이로 돌아온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교통정리도 이루어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